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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Apr 28. 2022

봄밤

< 작당모의(作黨謨議) 15차 문제(文題) : 19 금  >

   골목길에 내리던 어스름 한 자락을 어깨에 둘러메고 빈 집에 들어섰다. 현관 센서등이 어깨 위 어둠을 받아 들며 반가운 미소로 '왔어요? 수고 많았어요.' 아내처럼 얘기하지만 인호에게 그런 아내는 없다. 그래서일 거다, 반짝 켜지며 아양 떠는 센서등이 언제나 낯선 것은. 그뿐인가. 집에 들어오는 아무에게나 지조 없이 환한 미소를 던지는 센서등 따위란...


   인호는 그런 의미로라면 집 안에 켜켜이 쌓인 깊은 어둠이 차라리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한다. 대학시절부터 혼자 서울생활을 시작했으니 어둠은 차라리 친구의 존재와 비슷하려나. 어둠 속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무서움 때문에 불을 켜거나 TV를 켜놓고 자야 하지만 앙 없는 애증의 관계라고나 할까. 그러나 오늘은 이 어둠도 공기도 낯설다. 이사 온 지 몇 주가 지나도록 짐 정리를 하지 않은 탓일 거다. 굳이 짐 정리를 하지 않은 까닭은 이사 온 동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30년 된 낡은 19평 아파트 전세. 현관 입구부터 덕지덕지 붙어있던 인근 상점들의 스티커와 '저리 대출', '급전 필요하신 분' 같은 명함이 동네의 수준과 사는 사람의 생활 정도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이삿날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내려서부터 산 아래까지 길게 이어진 길은 좁고 복잡하고 누추했다. 얽힌 골목들에 무질서하게 주차된 차들과 오래된 다세대 주택, 그리고 어지럽게 매달린 전선들과 열린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비릿하고 쾌쾌한 음식과 사람의 냄새. 꺾인 골목 모서리나 쓰레기 더미의 축축한 땅에서 보게 되는 배설물과 토사물의 흔적들. 사람 사는 모양이 길거리를 배회하는 고양이들의 삶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요일인데, 짐 정리를 위해 약속도 뿌리치고 왔건만..." 인호는 불을 켜지 않은 채 우두커니 서서 혼잣말을 내뱉었다.

 '오늘도 짐 정리는 물 건너갔군. 대학 동기들이랑 술이나 한 잔 하고 올걸. 희도 나온다고 했는데, 제길!'


   인호는 동네 구경을 나가 보기로 했다. 이사 온 후로 집에 들어오면 밖을 나가지 않았었다. 가택 (家宅軟禁) 내지는 구상태와 맞먹는 잠수 탄 생활이었다. 당장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할 수도 없으니 어쨌든 이 동네와 친해져야 했다. 친해지려면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산책길에서 뾰족한 흥밋거리를 찾을 수 없겠지만 삶이 힘들게 느껴질  때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하염없이 걷는 것은 오랜 인호의 습관이자 의식(儀式) 같은 것이었다.


   인호가 이사 온 아파트로 연결되어 있는 긴 골목길은 그냥 지나가기로 한다. 오히려 이 긴 골목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큰 도로만 건너면 제법 호젓한 길이 있었다. 아파트 단지와 대학가를 끼고 이어지는 길.


   그러나 차도를 건너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호는 뭔가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뒤를 돌아봐도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어떤 그림자 같은 것이 인호의 곁에 붙어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거리에는 가로등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고 어둠은 짙어지고 있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생각에 인호의 발걸음은 서둘렀다가 멈추었다가를 반복했다. 이럴 때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약속이라도 한 듯 거리에 사람은 없었다.

 '야, 최인호, 너, 귀신이 무서운 거야? 사람이 무서운 거야?... 근데 조 무서운 것 같지 않냐?... 어랏, 방 뭔가 지나간 것 같지 않아? 빗처럼 휙 내리던 작은 발광물체 말이야... 에고, 한심한 놈, 지이 어느 땐데 귀신 타령이야...' 인호는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렸고 땀이 나기 시작했으며 뒷목은 서늘해져 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걸까?' 망설이던 그 순간,

 

   인호는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멈춘 채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분명 낯선 그림자가 하나 더 있었다. '내 뒤에 누가 있는 거야, 그림자가 둘이잖아! 사람은 없었는데, 누굴까? 누구냐, 넌?'

그럴 리가 없다. 그림자가 둘이라니. 서울 밝은 밤에 노닐다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 넷이어서 놀란 처용 버가는 꼴이 아닌가.

 "원래는 지옥엽 아끼던 내 것이었으나 앗아간 것을 어찌하랴, 춤을 어라, 노래를 불러라, 아픔을 아는 이는 나뿐이니, 춤을 추어라, 노래를 불러라..." 흥얼흥얼 심을 울리는 노래가 절로 나왔다. 무서울 땐 노래를, 무서울 땐 빨간 맛을, 무서울 땐 야한 생각을. 평소 주문처럼 외우던 일이 닥치니 저절로 발현되는 것이었다.


   '휴~, 결국 내 그림자에 내가 놀란 거였어.' 노래를 흥얼거리며 찬찬히 주위를 살피던 인호는 어이가 없었다. 불빛이 하나일 때나 달 밝은 밤하늘 아래서는 그림자가 하나이겠지만 도시의 불빛은 가로등을 비롯해 상점의 네온사인, 아파트 불빛 등 여러 개가 존재하므로 그림자도 여러 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무대 중앙에 스포트라이트를 여러 개 비춰 주인공의 행동과 말에 집중도를 높이고 생각과 시각의 다양성을 나타낼 때도 이런 장치를 쓰잖는가 말이다.

 '쳇, 순 같은 스포트라이트 세례를 받고 정신 못 차리는 얼뜨기 엑스트라였던 거야.' 인호는 허탈한 기분에 사로잡혔으나 이내 마음을 돌려 생각해 보았다.

 '내 마음속에도 아직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또 다른 '나'의 모습들이 있겠지? 내 그림자가 여럿일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나' 외에도 살아갈 '나'가 존재하겠지. 살아갈 '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도 당당한 '나'이어야 할텐데...'


  

   인호는 그림자 하나로 기진맥진해져 더 이상의 산책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서둘러 편의점이라도 찾아 체중 관리한답시고 기시했던 매운 왕뚜껑라면과 맥주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친해져 보려고 나온 산책길인데 이 동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걸.' 터덜터덜, 허위허위, 툴툴 인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때였다. 밝은 웃음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헉헉 들리는가 싶더니 두 명의 여성이 인호 옆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한가하게 달밤에 운동하러 나온 수저들이겠지, 부러운 것들! 이 야밤에 저 야한 웃음소리는 무엇인고...' 인호는 수틀린 사람처럼 가자미눈을 뜨고 그녀들을 흘겨보았다. 그러다 점점 뚫어져라 바라보게 되었다.

 '난, 왼쪽의 그녀가 좋겠어. 연분홍 레깅스에 흰 운동화잖아. 포니테일 머리 하며 저 엉덩이의 탄력적인 씰룩거림을 보란 말이지. 역시 얼굴보다는 몸매야. 저 몸짓이 환장, 아니, 환상을 갖게 하거든... 분명 어제 꿈을 잘 꾼 거야, 횡재수가 있든. 마치 포상을 받은 기분인걸...' 인호는 맹렬히  일어나는 그녀와의 로맨스를 상상하며 흠흠 헛기침을 해댔다.


   '어라? 난 아무 말도 한 적이 없는데, 저 여자들 왜 뒤로 걸어오는 거야?' 인호는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절대 그런 음탕한 생각은 하지 않았노라 얘기해야 하나, 그런 생각은 입은 듯 안 입은 듯 몸에 딱 달라붙은 당신들의 레깅스 탓이었다고 해야 하나, 난감했다.


   "최 대리님, 맞죠?" 분홍색 레깅스가 반갑게 인호에게 아는 체를 한다.

 "맞네, 저, 수경이에요, 이수경. 2층 교육지원팀에서 일하게 된... 이 동네 사시나 봐요. 저는 저 아파트에 살아요. 언니랑 운동 나왔고요. 제가 한눈에 딱 알아봤잖아요..." 호호호 하이톤의 웃음소리가 문득 무섭다고 인호는 생각한다. '애꾸눈을 한 거야? 어떻게 한눈에 알아봐, 두 눈으로 알아봤겠지.' 인호는 고루한 농담을 떠올리며 혼자 피식 웃었다.

 "아, 그래요. 알겠어요. 어두워서 못 알아봤어요. 미, 미안해요. 얼마 전에 이사 왔어요. 반가워요. 그, 그럼 운동하세요, 언니분도 계신데..." 인호는 앞서 가시라고 손 안내 제스처를 해댔다. 가로등 불빛에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벚꽃 망울처럼 자신 있게 부풀어 몸에 딱 붙은 그녀의 가슴만 보였기 때문이다.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해 시선이 자연 머무른 것일 수도 있겠지만.

 "네, 안녕히 가세요. 회사에서 다시 보게 되면 커피 한잔 사주셔야 해요.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 그녀가 멀어진다. 소처럼 하얗게 터지고 있는 벚꽃 길 속으로, 봄밤 속으로, 진정 가버리는 것이구나. 그 커피, 사줄 수도 있는데...'



   큰길 사거리에서 만난 편의점에서 요깃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어느새 골목은 적막해지고 있었다. 불 꺼진 구둣방 앞에는 '이빨 삽니다' 문구가 한평생 가족을 위해 피를 팔았다는 허삼관처럼 처량하고 쓸쓸해 보였고 이제는 하나뿐인 인호의 긴 그림자만 봄밤을 걸어간다. 내일이라도 당장 수경에게 커피를 사줘야겠다고 마음먹는 인호, 이 동네가 좋아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봄타는 봄밤에 발정난 고양이는 암컷을 따라가버린 모양이다.

<끝>



작당모의 '19금'은 수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연연하는 것은 '금'자가 19번 쓰였는가, 뿐입니다.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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