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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당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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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Apr 28. 2022

숙명

< 작당모의(作黨謀議) 15차 문제(文題): 19금 >

   그러니까. 그건 다른 요일이 아닌, 반드시 요일이어야 했다. 인연을 맺고 19번째 맞이하는 요일.




   만난 지 한 달이 되면서 진혁은 노골적으로 스킨십을 요구했다. 손 잡는 것 정도는 두 번째 만날 때부터 허락하긴 했지만, 그 이상은 계속 거부했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조신하다거나, 부끄러움이 많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내키지가 않아서. 진혁이 스킨십을 요구할 때마다 너 나 그러려고 만나? 라는 뻔한 말을 하거나, 내가 엄한집에서 자라서. 라는 아빠가 들으면 어이없어할 말을 하면 진혁은 당황해하면서 한발 물러나고는 했다.


   진혁의 참을성은 석 달 까지였다. 석 달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자 진혁은 만날 때마다 나를 졸라댔다. 진혁은 제부도를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했는데 그 섬이 그렇게나 이쁘다며 열변을 토했다. 그 속셈 내가 다 안다. 물때를 놓쳐 섬에 갇힌 채로 어찌어찌 뜨거운 하룻밤을 보내보려는 수작. 유치하기는. 내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거부하면 진혁은 말없이 시선을 피하면서 자신이 삐쳤다는 의중을 내비쳤다. 그런 모습은 또 꽤나 귀엽긴 했다.


   나도 슬슬 준비를 하긴 해야 했다. 이제 그 시간이 다가오니까. 진혁에게 아직은 아니고, 우리 나중에 가자. 내가 마음의 준비가 되면. 하면서 미끼를 던졌다. 그게 언제인데? 진혁은 던진 미끼를 바로 물었고, 안달하는 진혁을 보며 우리가 만난 지 19번째 요일이 되는 날. 그날 가자. 제부도. 라고 뜸 들이지 않고 말해주었다. 뜻밖의 대답을 들은 진혁이 한동한 멍하니 있다가 핸드폰을 열어 날짜 계산을 했다. 19번째란 말이지? 그럼, 4월 29일인데. 정말이지? 진혁은 호들갑을 떨었고, 그래. 4월 29일. 하며 진혁을 진정시켰다. 진혁은 왜 19번째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런 둔한 점이 내가 생각하는 진혁의 매력이었다.




   진혁은 정말 둔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만난 어느 누구보다도 목표 달성이 수월했다. 우리의 첫 만남이 요일이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이후로 매번 요일마다 우리가 만났다는 것도 진혁은 기억하지 못했다. 진혁의 동창모임이 있었던 4번째 요일에는 나 떡볶이가 먹고 싶은데. 라고 문자를 보냈다. 진혁은 문자를 보자마자 술자리를 빠져나와 내게 떡볶이를 배달했다. 회사 워크숍이라던 12번째 요일에는 나 바다가 보고 싶은데. 라는 한마디로 워크숍 장소로 향하던 진혁의 운전대를 우리 집으로 돌렸다. 회사에는 밤새 열이 펄펄 나서 응급실에 있다는 핑계를 대고서. 요일마다 진혁을 만나는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진혁은 약속이 많은 사람이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나에게 푹 빠져 있었으니까. 100번째 타깃이 진혁이라는 건 감사할 일이었다.  


   가장 내 속을 썩였던 놈은 76번째 타깃이었던 민수였다. 그 자식은 밀당을 즐겼다. 약속을 잡을 때마다 나 그날 일이 있는데. 나 그날 야근하는데. 하며 간을 봤다. 8번째 요일에는 핸드폰도 꺼놓은 채 훌쩍 여행을 떠나버렸고, 16번째 요일에는 전날 내가 짜증을 한번 냈다는 이유로 잠수를 타버렸다. 그날 그놈 찾아내느라 고생했던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우여곡절 끝에 기어이 19번째 요일이 되던 날, 매번 밀당을 하며 간을 보던 그 녀석의 간을 먹었다. 고생 끝에 먹은 간이어서인지 유독 맛이 좋았다.


   34번째 타깃이었던 우식이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진혁이처럼 나에게 푹 빠져서는 매일 밤마다 나를 보겠다며 집으로 찾아왔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우식이를 만났다. 그러던 놈이 결정적인 날, 그러니까 19번째 요일이던 날에 나에게 문자로 이별 통보를 했다. 나를 너무 사랑하기에 떠날 수밖에 없다나. 미친놈.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그렇게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하더니만. 분노를 누르며 그러다 너 죽는다. 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 문자를 본 우식이는 바로 우리 집으로 달려왔고, 나에게 간을 내어주고 보낸 문자 그대로 죽었다.


   지금까지 나에게 간을 바친 99명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도 구미호로 태어나고 싶었던 건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안쓰럽기는 내가 더할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때에는 그저 남자의 간 100개만 먹으면 사람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젠 그놈의 '19 법' 때문에 사람이 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때문에 생긴 법이니 뭐 할 말은 없다. 할머니의 할머니는 한 명 한 명 사람을 모으는 게 귀찮았는지 <리미티드 에디션 - 백마의 꼬리털로 만든 신상 갓 - 선착순 100명 한정 판매>라는 방을 4대문 안 저잣거리에 붙였고, 그걸 보고 허겁지겁 모여든 100명의 간을 단 하루 만에 먹어 치우고는 사람이 되었다. 그 이후부터 이 악법이 생겼고, 사람 되기가 지랄 맞아졌다.


   그때 생긴 ‘19 법’의 내용은 이랬다.

   1. 타깃은 요일에 처음  사람이어야 한다.  2. 이후로 요일이면 반드시 타깃을 만나야 한다.  3. 만난  19번째 되는 요일에 타깃의 간을 먹어야 한다.  4.  과정을 거친 간이 100개가 쌓이면 사람이 된다.  5. 이를 어기면 리셋. 처음부터 다시.

 

   왜 그렇게 까지 해서 사람이 되려 하는지를 물으면 또 눈물이 난다. 그게 구미호의 숙명이니까. 사람이 되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사람이 되면 결혼을 하고 반드시 딸을 낳아 구미호의 대를 이어야 한다. 내 할머니는 스물네 번의 '처음부터 다시'를 견디고 나서야 가까스로 사람이 되었다고 들었다. 결혼해서는 아들만 줄줄이 낳아서 시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기도 했었지만, 열두 번째 자식을 뱃속에 가졌을 때 할머니의 시어머니도 애 봐주는데 그만 지쳐버려서 이제 제발 그만 낳으면 안 되느냐며 할머니에게 사정을 했다고 했다. 엄마는 할머니가 열네 번째만에 겨우 얻은 딸이었고, 엄마는 그렇게 위로 열세 명의 오빠를 두었다. 그 끔찍한 일을 내가 겪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진혁에게 제부도의 추억을 선사하지는 않았다. 죽을 놈이니 마지막으로 좋은 추억 하나 만들어 줄까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죽고 나면 기억도 못할 텐데 굳이 그럴 필요 있나 하는 생각에 관두었다. 제부도가 멀기도 하고, 혼자 그 먼길 다시 돌아오려면 심심할 테고. 한 가지 진혁에게 미안했던 건 단 한 번의 손놀림으로 간을 꺼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야 고통 없이 죽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드디어 100번째의 간이다.라는 생각에 들떴는지 찌르는 방향이 살짝 어긋나 간 대신 콩팥을 꺼냈고, 그래서 한 번에 죽지 못한 고통으로 열 배쯤은 커진 진혁의 눈을 봐야 했다. 아. 젠장. 이러면 진혁이 놀라는데, 놀라면 간이 콩알만 해지는데. 그럼 딱딱하고 질긴데.


   사람으로 변하는 건 세일러문이나 요술공주 밍키처럼 무슨 변신의 과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이 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됐겠지. 그 잘난 사람. 규칙은 잘 따랐으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이제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아서 구미호의 대를 이어야 한다. 딸 이름도 이미 지어놓았다. 희. 요일마다 기쁜 일이 생기라는 의미로. 첫 번째 아이가 바로 딸이면 정말 좋을 텐데.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의 고생 없이 이 지긋지긋한 구미호의 숙명도 끝이 날 테니까.



작당모의 '19금'은 수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연연하는 것은 '금'자가 19번 쓰였는가, 뿐입니다.

Image by Pixabay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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