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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Apr 14. 2022

무아(無我)는 오래 마음에 남아

<그 시절 그 장소: 음악감상실>

    비 내리는 우(雨) 요일에는 그곳에 가야만 했다. 그곳에 가기 전까지는 가슴 한가운데서 광포하게 날뛰는 격랑을 잠재울 수 없었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만 남는다면 나는 살아갈 거야. 하지만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없어진다면 온 세상이 낯설어질 거야’, <폭풍의 언덕> 한 구절의 ‘그’는 나에게 있어 ‘그곳’이었고 그곳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이었고 음악을 들으며 쓰는 '시(詩)' 였다.


   그곳은 내가 다니던 J여고와 D여고 사이, 허름한 상가건물 2층에 있었다. 건물 입구부터 잔잔히 들려오는 음악소리 따라 여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몇 개의 등받이 의자와 테이블, 왼편으로는 LP판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MUSIC BOX가 보였다. 은은한 커피 향을 맡으며 자리에 앉으면 조금 전까지 뒤적였던 교과서의 존재가 잊혔고 교실을 채웠던 한숨이 날아갔다. 야간자습 중 학교를 탈주한 고등학교 2학년의 두 반항아, 우리는 볼륨의 크기에 구애받지 않고,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 없이 공간 가득 흐르는 음악을 마음에 담았고 온 몸에 퍼지는 자유를 만끽했다.


   무아(無我). 음악다방 이름이었다. 이름은 심오했지만 음악다방이라 하기엔 모자란 부분이 많았다. 전문 DJ가 아닌, 단지 음악을 사랑하는 20대 후반의 세 남자는 여고생의 인기를 기대하며 음악다방을 연 것이겠지만 당시 고등학생은 교칙상 커피숍 출입을 할 수 없던 때였기에 다방은 항상 한가했다. 디스크(음반)는 80% 이상이 '빽판'이라 불리는 복사판이어서 '치직' 음반 튀는 소리도 함께 들어야 했다. 뮤직박스 안에 신청곡을 쓴 쪽지를 넣으면 무조건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는 우리가 좋아하고 좋아할 법한 노래를 알아서 틀어주기까지 했다.


   비 오는 창가 자리에서 시를 쓴 날은 멋진 음악과 함께 '갑분시(갑자기 분위기 시 낭송회)'가 연출되기도 했고 디제잉이 끝나면 우리 자리에서 음악 얘기를 많이 해주던 DJ 아저씨도 있었다. 아저씨가 좋아한다는 나자레스 Nazareth의 <Love Hurts>을 듣고 또 들었던 곳. 팝송 얼뜨기가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접했던 곳...

우리가 몰랐던 노래를 알게 된 날은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라디오 방송 프로에 신청곡을 틀어달라는 엽서를 보냈고 방송 나오는 시간을 기다렸다 공테이프 혹은 영어회화 테이프에다 녹음을 다. 라디오를 듣다 좋은 음악이 들려도 카세트 ‘REC’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테이프 하나가 만들어지면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으며 허전함을 달래던 시절이었다.


   1년도 안돼 문을 닫은 ‘무아’를 잃고 나는 한동안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마음 구석을 채웠던 음악이 사라졌고 나는 길을 잃듯 방황하였는데 다시 길을 찾게 된 건 학력고사가 끝나고 나간 단체미팅 자리였다. 유독 말이 없었지만 음악 얘기에 눈을 반짝이던 한 남학생이 있었다. 1980년대 팝 시장을 휩쓴 대중적인 가수와 노래들을 꿰고 있는 것은 물론 천재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핸드릭스와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제프 백의 연주를, 딥 퍼플, 스콜피온스, 레드 제플린 등의 헤비메탈을 좋아한다고 했다. 돈이 생길 때마다 LP판을 사 모은다는 그가,

 “내가 자주 가는 음악감상실이 있어. LP판 사는 가게도 있고. 네가 궁금하다면 같이 가고 싶은데, 같이 갈래?” 물어왔고 나는 자유와 일탈의 근거지 ‘무아 다방’을 떠올리며 “좋아! 정말 좋아!” 두 손을 합장한 채 입으로 가져갔다.


   “어라? 가자고 한 음악감상실이 여기야? ‘무아’라고?”

어느 날 있었다가 어느 날 없어진 곳, 기억 속에서 잊혀 가고 있던 곳, 무아가 무의식을 깨우며 다시 살아나고 있는 중이었다. 작년까지 다녔던 무아 다방의 이름과 같다니, 우연이 아닌 운명이었다. 무아 음악감상실이 오래 되었으니 무아 다방 이름은 여기서 따온 것이겠다 생각하니 들어가는 입구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무아 음악감상실은 광복동에서 용두산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5층 건물 중 4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4층까지 올라가던 길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장소가 꽤 이상했다. 무아는 다른 음악다방처럼 차를 마시고 나가면서 계산하는 게 아니라 입구에서 돈을 내고 티켓을 받고 들어가는 입장식이었다. 차를 마시는 테이블도 없고 의자는 모두 뮤직박스 방향을 보고 빼곡히 놓여 있었다. 극장처럼. 말 없이 두 손 모아 쥐고 앉아 경건히 음악만 들을 일인가 싶었다. 입장권은 신청곡을 적는 리퀘스트 용지였으며 한쪽 귀퉁이를 찢어서 내면 음료수를 마실 수 있었다.


당시 무아 음악감상실의 입장권. 신청곡을 적어 뮤직박스 투입구에 넣으면 DJ가 노래를 틀어주었다.


   '음악다방’이라는 이름과 ‘음악 감상실’이라는 이름 차이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등받이 의자에 푹 눌러앉아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음악을 듣느냐, 음악만 듣느냐의 차이였다. 음악다방이 음악 아마추어들의 아지트라면 음악 감상실은 마니아, 즉 음악 덕후들의 해방구 느낌이었달까. 그래서 신청하는 음악들은  찢어질 듯 날카로운 헤비메탈 사운드가 주류를 이루었고 한동안 듣고 있으면 귀가 먹먹해지며 시간을 잊고, 무아의 경지에 오른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감상실 이름이 무아인 이유를 알았어!”


   이후, 그 친구와 나는 남포동을 나갈 적마다 무아를 찾았다. 영화 보고 무아로, 밥 먹고 차 마시고 무아로, LP판을 사고 무아로, 어떨 때는 그냥 무아를 가기 위해서.


   86년, 87년  당시만 해도 외국의 최신 원본 음반들을 고르며 살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엠프 좋은 전축이 있는 집들이 드물었던 때였기에 음악 감상실은 젊은이들 사이에, 음악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에게 인기 있는 공간이었다. 젊음과 반항의 상징처럼 여겼던 헤비메탈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 ‘무아’는 부산에서는 음악 고수들이 출입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고 하루 종일 음악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일컬어 ‘무아 폐인’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아름다웠던 시절과 공간은 시대의 흐름 따라 변하기도,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어서 80년 초, 워크맨의 등장, 88년 CD 출시, 91년 노래방 등장으로 개인 음악 감상 시대가 열렸고 음악다방, 음악감상실은 점차 쇠퇴해 갔고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다.


불탄 들판에, 외롭게 자기 집만 남아 있는 광경을 상상해봐… 이건 말이야, 견디기 어려운 광경이야.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비채/p202


   무아(無我)라는 것이 본디 만물에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實我)가 없다는 뜻이 아니던가. 원래 없는 것으로, 무상(無常)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그러나 그 시절, 그 공간이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는 이유는 그 공간에서는 혼자가 아닌, '나'와 '무엇(음악)'과 '다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숨 쉬고 함께 공유하였기에 비로소 그 공간은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 대문 사진 출처 : 국제신문 2016년 2월 1일 자, 23면


봄꽃이 눈을 산란시키는 계절,
작당모의가 돌아왔습니다.
봄처럼 따스한 수필을 쓰시는 파우스트 님이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2주에 한 번 목요일, 작당모의다운 글들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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