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작당모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현 Apr 14. 2022

혜화동의 기억

<그 시절 그 장소: 혜화동>

   혜화동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가본 곳이었다. 혜화동이라는 이름은 동물원의 노래 제목으로 처음 알았고, 그곳이 어떤 곳인지도 노래 가사가 알려주는 게 전부였다.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야 하는 곳.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이 있는 곳. 그곳이 대학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과 어우러진 마로니에 공원이 있고, 주말이면 그 마로니에 공원 곳곳에서 길거리 공연이 벌어지는, 그래서 언제나 젊음으로 생기 넘치는 곳이라는 건 고등학교 2학년 첫 번째 연애의 첫 번째 데이트를 혜화동에서 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이문세의 뒤를 이어 변진섭이, 그리고 신승훈이 발라드를 지배하던 당시에 나는 TV에서는 몇 번 볼 수도 없었던 박학기에 빠져 있었다. 신승훈의 발라드가 귀에 착착 감기는, 옛다. 네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지? 어디 한번 맘껏 울어봐. 하며 애써 참으려는 슬픔에 대놓고 멍석을 깔아주는 느낌이라면 박학기의 발라드는 결이 조금 달랐다. 박학기의 발라드를 듣다 보면 없던 슬픔도 괜히 하나 만들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슬픔은 마음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 간직하다가 혼자 있는 이불속에서나 펼쳐내야 할 감정이란 느낌이 들었다.


   사실 신승훈과 박학기를 한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하기엔 둘이 추구하는 음악성이나 활동영역이 너무나 달랐다. 신승훈은 그 당시 TV를 점령한 주류의 정점이었는데 반해, 박학기는 TV를 외면한 비주류였다. 시인과 촌장, 신촌블루스 등으로 대표되는 동아기획 레이블의 일원이었고,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TV보다는 라디오를 통해 주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중학생이던 그때, 그런 구분으로 음악을 나누기엔 어렸다. 팝송이냐 가요냐. 가요라면 트로트냐, 댄스냐, 발라드냐 정도가 당시 내가 분류할 수 있는 음악 카테고리의 전부였다. TV에 나오지 못하는 건 그의 인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안타까웠고, 그런 마음이 더해져 박학기의 노래가 더 애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박학기의 세 번째 앨범이 나왔다. 매일 듣고 또 들었다. 너무 많이 들으면 테이프가 늘어난다는 걸 처음 경험시켜준 그 앨범에서 난 A면의 세 번째에 있던 <슬픈 음악같은...>이라는 곡에 꽂혔다. 지난 아픈, 슬픈 음악같은… 추억을 잊지 못하는 내용의 노래였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도 따라 슬퍼야 할 것만 같았다. 있지도 않은 추억을 애써 만들어냈고, 노래 가사처럼 그 슬픈 음악같은... 추억을 잊으려 했다. 애써 만든 슬픔을 또 애써 지우는 날들의 반복. 그땐, 그런 게 가능한 나이였다. 감성에 파묻혀있던 그 나이에 처음 연애를 했다. 가장 좋아하는 가수를 묻는 그 애의 질문에 나는 당연히 박학기를 꼽았고,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그 애에게 <슬픈 음악같은...>을 꼭 들어보라고, 그럼 너도 분명 박학기의 애절함에 푹 빠지게 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어쩌면  애를 박학기 콘서트장으로 데리고 갔던 것이 둘의 관계  발전하지 못한  소꿉놀이에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데이트 장소로 더없이 낭만적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곳은 더없이 불편했다. 계단처럼 뒤로 갈수록 조금씩 높아지는 객석은 좁고 딱딱했다. 낡고 얇은 쿠션이 놓여 있긴 했지만, 그건 단지 그곳이 앉는 곳이라는  알리는 역할만  뿐이었다.  안의 공간은 작았다. 객석의 가장 뒤에서도 마이크를 거치지 않는 무대의 작은 소음, 이를테면 노래를 시작하기  목을 가다듬는 소리라든가 노래를 마치고 기타를 내려놓는 소리까지 또렷이 들렸다. 그렇다는  객석의 부주의한 작은 소음도 그대로 무대에 전달된다는 의미였다. 소리는 무대에서만 허용됐다. 발라드여서 가뜩이나 조용한 공연이 시작되면 관객들은 모두 스스로 시키지도 않은 얼음이 되었다. 노래 한곡이 끝나면 그제야 관객들은 불편했던 자세를 고치고, 허리를 펴면서 다음 차례의 얼음 자세를 대비했다. 아주 잠시나마 객석의 소음이 허락되는 시간이었다. 공연이 진행되는 2시간가량은  애에게 뜻하지 않았던 형벌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발도 제대로 뻗지 못하는 좁은 공간에서 소음을 발생시키는 어떤 작은 움직임도 허락되지 않은   알지도 못하는 노래를 2시간 가까이 들어야 했으니까. 박학기를 좋아했던 나를 남자 친구로 두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그러니까 고작 열여덟까지의 어설픈 경험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던 그 시절, 나는 박학기를 좋아했고, 첫 연애를 했다. 그 애와 함께 박학기의 노래를 듣고 싶었고,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곳이 학전 소극장이었고 그 조금은 불편했던 학전 소극장이 동물원의 노래로만 알고 있던 혜화동에 있었다. 혜화동은 그렇게 알게 된 곳이었고, 그게 혜화동의 첫 기억이었다.


   서투르고 미숙했던 첫 번째 연애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 길지 않았던, 그래서 쌓인 추억도 얼마 없었던 연애였는데, 이별 후 나는 작정하고 아파했다. 헤어졌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면 나의 첫 연애가 그저 그런 흔한 이야기가 될까 봐, 그래서 <슬픈 음악같은...> 의 가사처럼 애절하지 않을까 봐, 의미도 없는 후회와 자책을 애써 만들었고, 애써 슬퍼하고, 애써 괴로워했다. 혜화동과 박학기와 첫 번째 연애는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3년 동안이나 애써 슬픈 음악같은... 추억이 되었다. 그러니까 군대에서 그깟 연애 감정 따위는 하루하루를 버티고 견뎌내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까지.


   혜화동의 기억은 그런 것이었다. 실제보다 애써 부풀리고 과장했던 것. 나의 전체이고 세상의 전부라 여겼던 것. 그래서 내 몸 어딘가에 흉터처럼 새겨져 죽는 날까지 끝없이 이어질거라 믿었던 것.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건 단지 내가 걸어온 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이제는 그땐 그랬지 하면서 되돌아볼 수 있는 한때의 좁은 골목길 같은 것이라는 걸.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혜화동의 어떤 좁은 골목길처럼.





봄꽃이 눈을 산란시키는 계절, 작당모의가 돌아왔습니다. 봄처럼 따스한 수필을 쓰시는 파우스트님이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2주에 한 번 목요일, 작당모의다운 글들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