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인 팀 매거진 이름은 '호시탐탐(虎視眈眈)'으로 정해졌다. 짐승의 썩은 고기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먹을 것을 사냥하기 위해 기회의 순간을 기다리는 호랑이의 매서운 눈으로 글감을 찾고 현상에 대해 숙고하는 진중한 글쓰기를 하자는 취지를 담았다.
'호랑이는커녕 고양이의 맹랑한 눈초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꼬락서니로 무슨 글을 쓴담?'
소정은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호랑이의 눈은커녕 하이에나가 되어 먹잇감을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대며 구걸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보고 괴로워했다.
"딸, 좋은 아이디어 없어?" 소정은 그럴 때마다 딸 찬스를 써 볼 심산으로 묻곤 했다.
"엄마 얘기를 쓰셔야지, 왜 나한테 이러실까?" 다정은 항상 빙글거리며 소정을 놀렸다.
"내 삶이 문학 그 자체라고 날 추켜 세운 건 너였어. 이제 와서 발뺌을 하시겠다고?" 소정은 다정을 협박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엄마의 삶이 드라마틱하면 얼마나 드라마틱하겠어요. 엄마 얘기만 쓴다면 금방 소재의 한계가 오겠지. 그렇다고 없는 남편과 이혼을 하겠어, 다니지도 않는 회사에서 퇴사를 한다고 하겠어. 그동안 듣고 보고 읽고 간접 경험한 것들을 드라마처럼 풀어내라는 얘기지. 상상이 세상을 바꾸고 세상을 만들어 간다며? 그쪽으로는 전문가라며?"
"아휴~"
소정은 본전도 못 찾는 얘기에 한숨만 내쉬었다.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 시구가 달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글을 안 써서 그렇지 쓸라고 치면 작가 타이틀 그게 뭐 대수라고..., 소설가도 되고 시인도 되고 그건 시간문제일 뿐이야.' 소정이 가졌던 과거의 오만한 꿈은 현재의 현실 사이에서 커다란 틈을 보이고 있었고 소정은 그 격차를 실감하는 중이었다. 글은 가래떡이 쉴 새 없이 뽑아져 나오는 것처럼 술술 써지지도 않았고 호시탐탐 매거진 팀에서 일주일에 하나씩 발제하는 주제글 쓰기에도 급급했다. 누가 글쓰기를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글쓰기를 쏟아내는 것이라 했는가. 그것만은 자신 있다고 누가 망발을 하였는가. 소정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자신의 민낯을 하염없이 바라보아야 했다.
게다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기운이 한데 모인 팀이라 그런지사계절의 변화무쌍한 생각과 의도가 한꺼번에 휘몰아치는 경우가 많았다.글의 내용과 문체, 스타일도 4가지 색이었고 발제하는 주제도 고문과 현대문의 형식을 넘나들었다. 꽃이 피었나 싶으면 태풍이 몰려왔고 황금들녘을 고즈넉이 바라보다 된서리를 맞는 기분이랄까. 그걸 또 재미있다고 낄낄대며 즐기는 세 명의 작가들이라니... 모름지기 작가의 모습은 이러해야 한다고 소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형님!' 하며 넙죽 엎드릴지도 모를 일이지.'
그러나 멤버들의 자유분방함은 소정에게는 가끔 자신감 저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톡방에서 소정의 존재감은 '꿔다 놓은보릿자루'였다.상대방을 웃기고 말겠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멤버들은 웃기지 않고는 입 안에 가시가 돋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를해댔다. '순발력과 재치, 누가 누가 잘하나?' 경연장을 방불케 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소정은 '저는 무조건 용인함'이라는 톡을 남겼다. 용납하고 인정한다는 뜻이다. 용인이라는 말에 꽂히자 도시 개그가 이어졌다.
말장난 하지 마산 / 그러면 그냥 성남/ 그래도 대구/ 다들 너무 웃겨요, 포항항항.../강원도 인제 그만/ 인도 차이 나는 클래스군요/ 그렇게 해선 안델센/ 사요나라 좋은 나라/ 오래 살고 볼리비아/ 개그 중단하면 칠레/ 좋은데요코하마/ PARIS 날리는구먼/ 컴퓨터에 버그가, 아마도 요하네스버그/ 백화점 가서 옷사카?/ 그 옷 나고야/ 그만하겠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어떤 도시 이름이 좋을까? 그런 말은 오버 다람쥐로 할까? 여기서 다람쥐가 왜 나오냐?...' 생각하는 와중에 톡은 수십 개가 달리는 중이었다. 이쯤 되면 무조건 관전이 상책이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었다.
'다음 주제는 시 쓰는 밤으로 할까 봐요, 일명 시밤'이라고 톡을 보냈다. 순간의 기다림 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벌건 대낮에 후드득 쏴~ 하고 소낙비가 내리는 격으로 글들이 올라왔다.
율시 가사문학 전부 포함?/ 5, 7언 절구, 고려가요, 향가 포함?/셔블 발긔 다래 밤드리 노니다가 / 둘흔 내 해엇고 둘흔 뉘 해언고/ 그럼 처용가 현대 버전으로 글 써볼까요?/ 재밌겠다. 고대가요 현대 버전은?/ 제망매가, 처용가, 구지가/ 아니 집에 가...
"아, 이건 유구무언이지. 왕따가 된 느낌? 군중 속의 고독이랄까? 하여튼 따라갈 수가 없어." 소정은 팀원들과의 톡이 끝나면 다정에게 징징댔다.
"그렇지, 울 엄마는 face to face가 원칙인데 말이야. 얼굴 보고 얘기하자, 만나서 얘기하자, 톡 하지 말고 할 얘기 있음 전화로 해... 이런 거 전매특허인데 말이지."
"그러니까, 나는 핸맹에 톡맹(핸드폰 사용과 톡 사용에 익숙지 않다는 말)이잖아. 핸드폰 자판도 느리고, 핸드폰 무음인 데다 휙 아무 데나 던져놓고 잘 들여다보지도 않으니 어쩌다 톡방 켜보면 안 읽은 글이 백 개가 넘는다니까. 대화는 끝나 있고... 이거 사람 환장할 노릇이다, 너..."
그렇지만 별 뾰족한 수를 찾을 수는 없다는 걸 소정도 다정도 아는 바였다.
시간은 바람처럼 흘러 어느덧, 마음속으로 약속했던 브런치 글쓰기 시한부 1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얼떨결에 시작한 팀 매거진도 8개월째 였다. 소정은 초조하고 불안했다.
'뭔가 해결책을 찾아야 할 텐데...'
게다가 4시간 남짓 서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일도 힘에 부쳤고 여기저기 아픈 곳도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집에 있으면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30분 내지 1시간 정도는 쉬어줘야 했다.생전 낮잠이라곤 몰랐던 소정이었는데 깜빡 졸았다 생각되는 쪽잠도 깨 보면 한두 시간이 지나있기 일쑤였다.
그날도, 그렇게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당신은 무얼 그리 기다리고 있는 거요?' 귀에 익은 인호의 목소리였다.
소정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허연 천장만 보일 뿐 인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 내가 잘못 들은 거지. 그럴 리가... 없지...'
'이제 2년이면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건가? 남편 목소리도 못 알아듣네, 허허. 하루 종일 골똘히 심각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걸로 봐서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역시나 목소리만 귀에 들렸다.
"그럴 리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려고... 행여 당신을 기다렸다면 믿기는 할 거유? 그립다 할 때는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잊을만하니 나타나셨네. 잊었다 하니 괘심 했던 거요, 아님 내 옆에 누가 있을까 궁금했던 거요?" 소정은 토라지듯 대꾸했다.
'반갑다 소리 한마디 안 하는 거 보니 소정 여사,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네. 인사치레 못하는 거...'
"그게 어디 갈라고... 그걸 꼭 말을 해야 아나? 그냥 아는 거지. 알면서 맨날 확인은..."
'사랑이라는 게 말이오... 그게 이렇게 죽고 나니까 무언지 조금은 알 것 같단 말이지. 살아있었을 때는 나도 잘 몰랐고, 몰랐으니 잘못한 것이 참으로 많았을 거야. 물론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아직도 모르고 살고 있겠지만.
사랑에는 말이오... 예사로움이 필요한데 진지한 욕심만 자리하게 되는 게 문제인 거더라고.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데 나에 대한 충분조건만 찾게 되더란 말이야.
우리 처음 만났을 때 혹시 기억하려나 몰라? 회사 술자리에서 처음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지. 왁자지껄한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생각했어. '와, 저런 여자랑은 절대 결혼하지 말아야지'하고 말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신도 '와, 저런 놈이랑은 절대 결혼하면 안 되겠다' 생각했다며?(ㅋㅋ) 우리 둘은 서로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서로를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거야. 예사롭게 계속 볼 수 있었던 거지. 부담이 없었던 거잖아, 어차피 내 사람은 아니니까 하면서. 태연하게 그렇게 회사생활을 하고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간은 흘렀고, 흐른 시간만큼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지. 그러던 어느 순간, '어? 라? 이게 뭐지? 저 사람에게 이런 면도 있었네? 괜찮은데... 이건 사랑인가?' 하게 된 거잖아. 우리는 "그러게요, 이건 사랑인가 봐요"하며 동시에 어이없어했잖아.'
'그런데 말이야. 만약에 우리가 반대로 한 순간에 '뿅'하며 서로의 매력에 빠졌다고 생각해 보자고. 아님 한 사람만 첫눈에 반했다던가. 어떻게 됐을까? 한눈에 반한 상대에게 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제대로 쳐다볼 수 있었을까? 너무 격하게 빠져드는 것을 지극히 경계했을지도 모르지. 아님 잘 보이기 위해, 마음을 얻기 위해 '나답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야. 상대가 좋아할 것 같은 말과 행동을 했을지도 몰라. 그러면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상대방의 모습을 채워갔을 거야. 그러다 어느 순간, 이게 아닌데? 하면서 멀어지고 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야.'
"그런가? 사랑은 태연하게, 욕심내지 말고, 나다운 사랑을 하라, 뭐 그런 얘긴거지? 그런데 갑자기 웬 사랑타령이야? 그런 거에 별 관심 갖지 않았던 것 같은데... 죽어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런 얘기야? 그럼 슬픈 얘긴거잖아... 이제와 그걸 안다한들 무슨 소용이겠어..." 소정은 긴장하며 듣던 몸을 맥없이 놔버리며 풀 죽어 얘기했다.
'사랑에 빗대 글 쓰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얘기하는 중이야. 요즘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글도 사랑과 같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거야. 예전에 당신, 글에 대한 그리움이 들 때마다 한 번씩 글을 썼었잖아. 물론 기획일을 했던 사람이 글 못쓸까마는, 그런 글 말고 작품 같은 글 말이야. 회사 내 슬로건 공모, 사보에 실렸던 글, 신문 기고문, 칼럼, 각종 공모에 응모했던 글들 말이야. 그 글들을 쓸 때 당신 무척 행복해했었거든. 좋아하는 글 맘껏 쓰도록 밀어주고 응원해줬어야 하는데 무관심해서 미안해. 집안일에 파묻혀 있게 해서 정말 미안해. 계속 일도 하고 글도 썼으면 당신, 더 행복했을 텐데... 사과하고 싶었어.'
"그래, 맞아. 용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사과받고 싶었어. 나 몰라라 하긴 했으니까. 그렇지만 그거 다 핑계야. 나 자신에게 게을렀던 거야.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너무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해"
'그렇게 태연히 말이야, 사랑을 시작했듯 글 쓰는 것도 예사롭게 습관적으로 하길 바라. 다른 사람 의식하지 말고. 주인공이 되려고 애쓰지도 말고. 조연이면 어떻고 엑스트라면 어때?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는 인식이 중요한 거지, 맡은 역할이 만족을 담보하지는 않는 거잖아. 다 알면서... 그리고 힘 좀 빼고 쓰고. 힘 잔뜩 쓰다 똥볼 찬다고 살살하라고 나한테 얘기할 땐 언제고 잔뜩 힘이 들어가셨어, 소정 여사. 힘 빼! 알았지?'
"그랬나? 어쩐지, 힘을 많이 줘서 그런가 여기저기 아프기는 해. 그런데 어째 다시 안 볼 사람처럼 한꺼번에 말씀 너무 많이 하시는데......"
배터리 다된 라디오 소리가 줄어들듯 그렇게 인호의 목소리는 멀리 사라져 없었다. 마지막 말이 힘 빼! 라니, 소정은 눈물을 참으며 헛웃음을 허공에 날려 보냈다. 인호는 비록 현실에 없는 존재였지만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존재이기도 정말 없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고 또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모아지고 쌓인 고민과 걱정이 마음 한구석 코너에 몰려 아우성을 쳐댔다. 하루빨리 해결을 촉구하는 민원이 폭주했다. 단식투쟁도 불사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걱정은 구휼(救恤)을 허했다. 허겁지겁 물만 밥을 욱여넣다 퍼뜩 숟가락질을 멈춘 소정.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지, 잠이 오면 잠을 자고... 그래, 나는 결국 그리움을 다하지 못하였던 거로구나.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지 못했어. 이제부터는 대놓고 그리워해야겠어.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의미가 있다잖아...'
그동안 소정은 글에 대한 그리움을 묻었고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외면했으며 인호에 대한 그리움을 부정했었다.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북카페를 차려야겠다고 소정은 문득결심한것이었는데,
... 1층과 마당을 손보고 가구들은 버리거나 2층으로 옮기면 되겠다, 바리스타 자격증도 도움이 되겠는걸, 이웃 작가들에게 책을 기부받으면 커피는 그냥 드려야지, 가져온 책과 1:1 맞바꿈 하면 다른 책을 읽을 수 있겠네, 한 달에 한 번 하우스콘서트도 괜찮겠다, 카페 한편에 앉아 책 읽고 글 쓰면 참 좋겠다, 그러려면 무인카페처럼 운영을 해야 되나?, 작가들에게 북모임 하라고 카페를 셰어 하는 건?....
소정의 그리움은 밤을 넘기고 있었다.
[끝]
그간 함께 해오던 진우 작가님께서 일신 상의 사정으로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필진의 건강 및 신변의 변화 등의 이유로 작당모의는 3월까지 휴식을 가지려 합니다. 따뜻한 바람이 불 때 새로운 글들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