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만 그래도 그렇지. 안녕하시냐고 인사를 제대로 하는 놈이 있었을까. 할머니만 보면 꽥꽥 소리나 질렀지. 귀신이라고, 꼬리가 아홉이나 달린 구미호라고 얼마나 무서워했게요. 초가집 지붕에 달린 하얀 박꽃처럼 그렇게 문지방에 기대앉아 계셨잖아요. 흰머리는 은비녀로 쪽을 찌시고. 은행나무침대 영화에 나오는 하얀 눈을 뒤집어쓴 황장군 같았다니까.”
‘세월에 잡아멕힌 쬐깐한 몸띵이가 무신 장군에 댈꺼여? 멕쩍은 소리, 허깨비믄 모를까. 날 좀 빨리 데려가 달라고 날마다 빌었구먼.’
“연기처럼 할머니가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나, 갑자기 땅으로 꺼져 버리면 어떡하나 조바심이 나서 놀다가도 한 번씩 들여다보곤 했었어요. 마당으로 부서져 내린 달빛이 할머니 백발과 얼굴에 내려앉아 불꽃처럼 번득이던 어느 밤은 잊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다한 날이었제. 거죽만 남은 쇠잔한 몸 깊숙한 디서 커다란 들숨이 날숨으로 터져 나오면서인광(燐光)처럼 불꽃이 일었거든. 온몸에 피어나는 시퍼런 멍들은 차마 아쉬운 미련이었을라나, 이 생에 남은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이었을라나... 암튼 가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죄다 가지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잉게, 잊어버리시게...'
이제는 그만 그리움을 내려놓으라는 할머니의 말에 소정은 머리를 힘없이 흔들며 나직이 내뱉었다.
“세상에 미련도, 그리움도 다 가지고 가는 거라고요? 이렇게 그리운데요? 그리움이 또 다른 그리움을 부르며 그립다 그립다 주문을 외는데도요?..."
거울 속의 소정도 울었고 그런 소정을 바라보는 소정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혼자 대화하는 버릇을 가지게 된 건 순전히 그 사고 때문이었다. 소정의 일상은 남편 인호의 교통사고 이전과 이후로 명확하게 나뉘었다. 인호가 세상을 떠난 후, 소정은 지나는 세월 아래서만 기거했다. 세상이 알아볼까 깊게 숨어 지내던 아래 세상에도 예외 없이 쳐들어오는 적들은 있는 법이어서 그 적들과 마주하는 날이면 소정은 신열을 앓듯 끙끙 앓았다. 그것은 '기억'이었다. 불안한 시선과 마음의 동요가 '덜컹'하고 걸쇠를 맞물면 여지없이 마주하고 있는 사물에 이입되었고 사물이 뭐가 됐건 말을 하는 것이었는데, 그날은 대상이 거울이었고 거울 속의 인물은 어릴 적 살던 뒷집 할머니였다.
"아이고, 우리 엄마, 또 누구와 대화 중이신가 보네. 오늘은 거울과의 데이트예요?"
언제 들어왔는지 인기척도 없이 딸의 모습이 거울에 들어왔다. 애써 태연한 척 명랑한 척했지만 다정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어, 어... 할머니, 뒷집 살던 할머니가 내려놓으래, 다 내려놓으래. 그럼 편해진다고..."
“거 보슈, 얼굴도 한번 뵌 적 없는 할머니가 말씀 한번 딱 부러지게 잘하셨네. 엄마도 이제 그만 슬퍼하고 잊어버리고 털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벌써 1년이야. 지금은 봄이고... 벚꽃이 얼마나 흐드러지게 피었는 줄 알아? 엄마도 이제 엄마의 봄을 찾아야죠. 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진작에 말씀하셨구만. 그건 또 듣지 못했다 할 거지?"
"그러게나 말이다. 왜 그런다니, 도대체..."
"허허, 참. 남 말하듯 하시긴. 엄마 이야기네요. 거울 하고도, 스웨터를 붙잡고도 그렇게 얘기를 하는 양반이 왜 이러고 사느냐고 엄마 자신한테는 얘기 안 해봤어요? 엄마 자신한테 미안하지도 않수?"
"야 야,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내 일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하니까 잔소리 같아. 어릴 때 어미한테서 듣던 말들을 커서 되갚아 준다더니 한꺼번에 부어버릴 작정이야? 그만해. 어서 씻고 옷부터 갈아 입어." 소정은 딸과의 대화를 피해 거실로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혼자 이야기하지 말고 사람하고 대화를 하라고요, 그게 정상적이야, 남들도 다 그렇게 하고 살고. 아님 글로 쓰던가. 엄마, 옛날에 문학소녀였다며? 소녀가 성장해 문학 중년이 되는 거지. 엄마 속엣말 다 쏟아내면 멋진 작품 하난 나올걸? 제가, 마음껏 이야기하고 글 쓰는 판을 만들어 드릴게요.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 알았죠?”
“그래?... 그럼 그럴래?” 소정은 또다시 무심한 얼굴로 나른하게 대답했다.소정은 뭐라도 해야 하는데 무엇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 듯 소파에 털썩 몸을 부렸다.
며칠 후, 다정은 소정에게 브런치라는 글쓰기 플랫폼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강력히 밀어붙여야겠다고 다정은 마음먹었다.
"브런치라고? 그 아침과 점심 사이에 먹는 그 브런치 말이야"
"헤헤 맞아요, 그 브런치. 엄마가 왜 먹는지 모르겠다며 투덜대던 그 브런치야."
소정은 브런치를 싫어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식 애호가에게 브런치는 느끼하고 거북한 것이었다. 양이 적은 것도 못마땅했고 빵 종류는 먹는 내내 겁겁했다. 그러나 무겁지 않은 한 끼라는 점을 감안하면 마음 편하게 요것도 조금, 조것도 조금 먹으라는 뜻이니 접근방식은 나쁘지 않다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브런치를 먹듯 가볍게 시작하라는 얘기지, 네 얘기는?"
"맞아요, 가벼운 일기부터 수필, 사진, 그림 그리고 소설까지 장르가 다양해서 입맛대로 골라 읽고 내키는 대로 쓰고 싶은 거 쓰시면 돼요.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요. 글 쓰다가 재미있어지면 문화센터 같은 데서 글쓰기 수업 들어도 되고 전문적으로 써야겠다 싶으면 문학창작과 수업을 들어도 되고. 엄마 인생 자체가 문학인데 걱정할게 무어야? 아니다 싶으면 언제고 때려치우면 그만이고."
'언제고 때려치워도 된단 말이지...'
소정은 다정의 설명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기는 듯 얼굴에 홍조를 띠며 물었다.
"관심이 가긴 해. 그런데 혹시... 내 글을 보고 뭐라고 뭐라고 꼬투리 잡는 사람은 없겠지? 글이 왜 그 따위냐고 비난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사느냐고 힐난하는 사람은 없겠냐는 거지."
"하하하 엄마는 그게 걱정이유? 그걸 보고 근거 없는 자신감, '근자감'이라고 부르던데. 내가 머리에 옷에 신경 쓰며 괜찮냐고 물으면 항상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도 네 모습 신경 쓰고 볼 사람 없다 하셨죠. 그거예요. 꼼꼼하게 읽고 관심 가지는 사람 없어요. 도대체 뭔 자신감이람..."
"내가 또 너무 앞서갔네, 그렇지?"
"그럼요..."
소정과 다정은 서로 마주 보며 한참을 웃었다. 지나가던 봄도 따라 웃을 웃음이었다.
소정은 지난 1년이란 시간을 되짚어봤다. 인호의 사고 이후 1년이었다. 평소에 보지 않던 TV 드라마만 열심히 보았다. 눈으로 열심히 본 것에 비하면 머리에 남는 것은 별로 없는 TV 속 세상이었다.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도 불쑥불쑥 빼서 쌓아놓고 읽었다. 친구들을 불러 그악스럽게 음식을 해 먹기도 했고 친구를 만나러 밖으로 나가 돌아다녀 보기도, 유명하다는 커피숍을 전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진리를 찾기 위해 혹은 재미를 찾기 위해 집중했던 일들이 아니니 오히려 삶은 시들시들해졌고 풀이 죽어갔다. 도저히 살 수 없다며 유체이탈을 감행한 소정의 영혼이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다 돌아와 무겁고도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드는 나날이었다.
'그래, 앞으로 딱 1년 동안이야. 지난 1년, 흘러가 버린 1년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자. 위로라고 덧붙여도 좋고.'
소정의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년간의 시한부, 언제 때려쳐도 좋을."
"1년간의 시한부, 언제 때려쳐도 좋을."
힘주어 몇 번을 반복해 말하자 구호처럼 입에 착착 감기는 것 같았다.
1년이라는 시간은 참 재미있는 시간이다. 첫 직장에서의 1년을 돌아봐도 그렇고 지난 1년을 돌아봐도 그랬다. 생각보다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다. 역사를 바꿀 시간쯤은 충분하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감정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지만 참고 버틸 만한 시간이기도 하다. 설렜다가 기가 죽었다가, 다독였다가 슬펐다가, 화났다가 우울했다가... 그러나 한편 소정은 그런 드라마틱한 시간 동안 내재돼 있던 감정의 파편들을 토해내고 쏟아내는 것이 글쓰기가 아닐까 생각됐다. 그것 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은 마치 여행하는 것과 같으리라. 눈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살피는 것 그러나 발은 한 발 한 발 앞을 향해 걸어가는 것, 멋진 장소에서는 잠시 멈추고 나를 내려놓는 것 그리고 그 장소와 하나가 되는 것, 소중한 기억 속 장면을 들추어 보는 것. 상처들 아픔들 슬픔들을 쏟아내는 것, 그리고 나를 위로하는 것, 위로받는 것...
"뭐야? 주말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야? 누가 결혼이라도 하제? 아님, 출판사에서 연락이라도 왔어?"
"얘는, 얘는, 가끔 이렇게 속물적이더라."
"네~에, 고고하신 소정 여사님, 우리 세계에선 현실적이다 라고 합니다만. 됐고. 무슨...?"
다정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소정이 말하기 시작했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숨이 넘어갈 기세였다.
"사건의 전말은 말이야... 초코 작가, 진마에 작가, 진성 작가를 대표해서 초코 작가가 내게 메일을 보내온 거야. 함께 글 써보자고. 너, 초코 작가 알지? 어느 날, 밤 새 서로 글 읽으며 댓글 달고 낄낄댔다던 그 작가 말이야. 유쾌하고 유머스럽고 젠틀한. 그리고 진마에 작가도 알지? 나이는 어리지만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로처럼 카리스마 뿜뿜이라던 작가 말이야. 진성 작가는 또 어떻고.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하는 홍길동처럼 넓고 깊은 보폭을 가졌다고 했었잖아. 그 어마어마한 작가들과 함께 글을 쓰는 일이야. 이게 믿기냐고. 내가 너무 기쁘다며 흔쾌히 승낙을 하자 간 밤에 바로 톡방을 만든 거야.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더라고. 한참 동안 톡을 했는데 작가들이 너무 멋있고 똑똑한 거야. 잠깐 쫄기도 하고 내가 너무 뒤처지지 않을까 걱정도 됐는데 그냥 눈 딱 감고 모른 척하기로 했어. 너무 좋은 기회잖아. 언제 내게 이런 기회가 오겠어. 누가 날 불러 주겠냐고. 절대 놓칠 수 없지... 간 밤에 너무 행복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잘 됐지, 딸, 듣고 있어?"
"네, 듣 고 있 어 요. 잘 됐네, 잘 된 일이야.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봐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무슨 일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 사람 안 맞는 건 '간 안 맞는 음식' 먹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야. 엄마가 잘 알아서 하시겠지만 조금 더 천천히, 알았죠? 하여튼 축하해요.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이 나는 더 좋네요."
'간 안 맞는 음식이라... ' 다정의 방을 나온 소정은 생각을 곱씹으며 거실을 왔다 갔다 했다.
생각해 보라고 딸이 충고를 했으니 뭐라도 고민해봐야 하는데 뭘 살펴봐야 하지, 소정은 골똘히 생각했다. 커피숍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게 소정의 취미였다. 저 사람 성격은 어떨까,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을까, 어떤 직업이 맞을까,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면 조화로울까... 뭐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 말이다.
'자, 어디 보자. 심심한데 한 사람 한 사람, 어떤 사람인지 한번 살펴나 볼까?. 정확한 건 아무것도 모르니, 대충... 작당을 벌일만한지, 재미는 있을지, 대화를 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있는지...'
'음... 한 사람은 한여름 대지의 기운을 가지고 있군. 다소 뜨거울 수 있으나 샘물을 지니고 있으니 단물 같은 역할을 하겠구나. 한 사람은 사방이 물인데 겨울이라. 얼어붙은 물이 철옹성이니 고집이 장난이 아니겠어. 웬만하면 알았다고 하는 게 상책이겠는걸. 또 한 사람은 봄날의 나무로구나. 겨우내 움츠렸던 나무에서 싹이 나기도 꽃이 피기도 하니 변화무쌍한 성격이지만 의지 하나만큼은 알아줘야겠네. 나는 쓸쓸한 가을의 들판이니 여러가지 기운을 받으며 나누며 지내면 좋겠네.'
그러고 보니 네 사람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기운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조화로운 조합이었다. 소정은 이렇게 설레본 적이 언제였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글에 대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계속]
이번 작당모의 문제文題, '작당모의'는 2부에 걸쳐 연재됩니다. 다음 주 목요일에 2회가 계속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