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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Jan 21. 2022

재하, 소진, 현우 이야기 (2)

< 작당모의(作黨謀議) 14차 문제(文題): 작당모의 >

1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소진이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자 재하는 들어오라는 듯 한발 뒤로 물러섰다. 재하가 내준 공간을 지난 소진은 말없이 부엌으로 갔다.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식탁 위에 던져 놓고, 냉장고 문을 열어 캔맥주를 꺼냈다.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재하가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 소진은 천천히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면 소진은 가장 먼저 맥주캔 하나를 꺼냈었다. 하루의 위안이었다.

   “녹음된 거 들었어. 재하 너 연기 잘하더라.”

   소진의 말에 재하는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재하를 힐끗 한번 본 소진이 말을 이었다.

   “이제 된 거 같은데. 슬슬 현우 버려도 되겠어.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할까. 그냥 지겨워졌다고 할까.”

   “너 좋을 대로.”

   “현우가 청혼할 때 버리면 좋은데. 우리가 아직 이혼을 안 했으니 청혼은 안 할 테고.”


   3개월 전, 별안간 현우에게 앙갚음하고 싶다는 재하의 말을 들은 소진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지금처럼 건조한 어투로 ‘그래.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라고만 했었다.

   “여전히 이유는 안 궁금해?”

   “글쎄. 너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상관없어.”

   소진은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는 듯 머리를 갸웃거리며 재하에게 물었다.

   “그냥 헤어지는 걸로는 조금 약하지 않아? 우연한 사고라도 끼워 넣는 게 어때? 혜원이때처럼 말이야.”

   재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걸로 충분해. 현우가 사랑엔 늘 진심이라 몇 달 동안은 폐인으로 지낼 거야.”

   그런가. 앙갚음이라더니. 그냥 헤어지기만 하면 되는 건가. 재하 뒤로 거실 벽에 걸려 있는 결혼사진이 보였다. 사진 속에서 손을 맞잡은 재하와 소진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환한 웃음이 이제는 먼 일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소진은 재하의 마음이 이렇게 약해진 건 모두 혜원이 탓이라고 생각했다.


   혜원은 소진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혜원은 꾸준히 연락을 하며 소진을 따랐다. 소진은 그런 혜원이 귀찮았다. 소진이 귀찮다는 티를 몇 번이나 냈는데 혜원은 둔했다.

   “재하야. 혜원이랑 스키장 한번 갈까?”

   상급자 코스에서 소진의 다리에 걸리며 넘어진 혜원의 부상은 심했다. 혜원은 두 달간의 입원 치료 후에도 심리적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진이 두 번 병문안을 갔고, 재하는 두 번 모두 따라가지 않았다. 퇴원 후에도 다리에 후유증이 남을 거라는 이야기를 병문안을 다녀온 소진이 재하에게 전했다.


   재하는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소진이 좋았다. 입사 후 재하의 험담을 하던 동료에게 실수인 척 커피를 쏟아버리는 소진의 유쾌함에 끌렸다.

   “저것들은 지들이 직접 당해봐야 알거든.”

   당해봐야 안다는 이들에게 소진은 직접 당하게 함으로써 알려주었다. 실수를 가장하든, 사고로 위장하든 소진은 일을 꾸며 그들에게 해를 입혔다. 소진이 벌이는 모의에 가담하면서 재하도 그런 소진의 유쾌함을 즐겼다. 하지만 남에게 해를 입히는 횟수가 잦아지고, 그 강도도 점차 세지면서 재하가 느끼던 유쾌함은 점차 불편함으로 변했다.


   혜원의 사고 이후 재하는 처음으로 소진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혜원의 병문안을 다녀온 소진은 마치 일의 결과를 보고하듯 재하에게 혜원의 상태를 알렸다.

   “두 달 입원에 정신 불안. 그리고 후유증이 남을 다리.”

   이 정도면 만족한다는 말투. 계획대로 잘 마무리되었다는 표정. 소진을 보는 재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소진을 마주하기가 겁났다. 재하는 거실의 사진 속에서와 같은 환한 웃음을 지웠고, 자신의 활시위를 끊었다. 소진은 그런 재하를 이해하지 못했다.


   재하가 몇 달만에 내민 계획이 소진은 기뻤다. 현우의 일을 꾸미며 소진은 둘을 두껍게 에워싸던 예전의 차가운 공기를 다시 느꼈다. 차고 건조하게 날이 파랗게 선 공기. 이 공기를 지금 재하도 깨닫고 있겠지. 차가울수록 더 또렷하게 서로의 온기를 느끼던 그때를 기억하겠지. 소진은 어쩌면 지난날의 재하를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 과거의 재하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는 생각에 소진의 한쪽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당신 웃는 모습 오랜만이네.”

   재하의 말에 소진은 서둘러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가 그랬나.”

   소진은 재하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더 꺼냈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하나와 녹차를 사 들고 나온 재하는 여느 때처럼 회사 앞 작은 공원의 벤치를 찾았다. 재하는 그 작은 공원이 마음에 들었다. 점심시간만 피하면 공원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벤치는 비어있었다. 그 공간 모두를 차지한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늘 앉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삼각김밥의 포장지를 벗겼다. 한 입 베어 물려는데 공원 입구에서 벤치로 걸어오고 있는 현우가 보였다.  


   현우는 재하의 삼각김밥에 시선을 두면서 말을 꺼냈다.

   “이제 거의 끝인 거지?”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진이 곧 얘기할 거야. 헤어지자고. 아마 지겨워졌다고 하지 않을까 싶네.”

   말을 하고 나서 재하는 ‘지겨워져서’라는 건 괜히 덧붙였다고 생각했다.


   재하는 소진이 곧 너에게 다가갈 거라고, 모른 척 자연스럽게 만나 달라고 부탁했을 때 어이없이 황당해하던 현우의 표정이 떠올랐다. 둘 사이에 현우를 끌어들인다는 게 미안했지만, 이런 부탁을 할 사람은 현우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야?”

   “다른 뭔가를 또 꾸며내 봐야지.”

   “미친 새끼. 너 그거 집착이야. 난 네가 망가질까 걱정된다고.”

   “괜찮아. 그래도 난 소진이 놓치고 싶지 않다. 어제는 제법 이야기도 많이 나눴어. 소진이가 슬쩍 웃기도 했는데. 그게 거의 1년 만이야.”

   현우는 재하의 목소리 갑자기 밝아졌다는  느끼고는 재하를 쳐다봤다. 재하가 있었다.


   재하의 첫 직장, 첫 출근을 축하하러 만난 술자리에서 재하는 현우에게 ‘나 인생의 여자를 만난 것 같아.’며 호들갑을 떨었다. 소진이 얼마나 매력이 넘치는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재하의 눈은 빛났고, 맑았다. 연애는 이때껏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던 재하였다. 그런 재하에게 ‘첫사랑인 거야? 이제 너 어른 됐구나.’하며 현우도 함께 기뻐했다. 그날 둘이 취할 때까지 나눈 이야기는 온통 소진에 대한 이야기였다. 재하는 늘 그랬다. 소진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재하는 늘 밝았다.


  현우는 재하에게 소진이를 이제 그만 놓으라고 설득하려던 마음을 접었다. 재하의 웃음을 다시 본 것도 거의 1년 만이었다. 힘들어하는 재하를 옆에서 다독였지만 재하는 웃는 법을 잊은 듯했다. 재하와 인사를 하고 먼저 일어나면서 현우는 재하를 웃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 소진이라고 생각했다. 공원을 나오면서 현우는 뒤돌아 재하를 한번 보고는 나직이 혼잣말을 했다.  

   “그래. 웃으니 됐다.”




Image by Pixabay


그간 함께 해오던 진우 작가님께서 일신 상의 사정으로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필진의 건강 및 신변의 변화 등의 이유로 작당모의는 3월까지 휴식을 가지려 합니다. 따뜻한 바람이 불 때 새로운 글들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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