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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May 12. 2022

인생을 바꾼 선택

<그 시절 그 날: 고교입시>

   내 인생을 바꾸었다고 생각하는 지난 선택들을 꼽아볼 때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것이 진학할 고등학교에 대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그 선택의 결과가 내 인생에 부정적이었는지, 혹은 긍정적이었는지는 다른 선택의 삶을 살아본 것이 아니어서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생각들, 그러니까 내 인생을 바꾸었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게 바로 그 선택이었다.


   중학교 2학년 , 우정에 목숨을 걸었던  친구가  아이들  일곱 명을 모으며 앞으로 평생을 함께 하자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는 일곱 명에 나를 포함시켰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간관계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받은 만큼만 준다.' 라는 인생의 모토로 사람들을 대했는데, 그건 다시 말하면 '받은 만큼은 준다.'  의미이기도 했다.  친구는 끊임없이 자신의 관심을 베풀었고,  역시 받은 만큼의 대가를 매번 지불했다. 그가 치고 나가면 내가 뒤따르면서 우정은 쌓였다. 3학년이 되어 서로 반이 갈리면서도  친구가 주도하는 모임은 계속되었다. 투표를 통해 모임의 이름을 '7인회'  정하고, 정기적으로  달에  , 주말에 모여 목숨을  우정을 키웠다.


   당시 내가 학교를 다니던 곳은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었다. 원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려면 경쟁률을 확인하고 입학 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러야 했다. 중학교 때 난 공부를 꽤 잘했었는데, 그렇다는 건 내가 A 고등학교에 다니게 될 거라는 의미였다. 모임의 친구들이 A 고등학교에 가기에는 성적이 조금 부족했다. 그들은 한 등급 아래의 K 고등학교에 지원했다. 고등학교에서도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들이 A 고등학교에 가지 못한다면, 내가 K 고등학교로 가면 되지 않나. 목숨이 걸린 우정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담임은 친구들 때문에 인생을 망칠래? 하며 나를 다그쳤다. 담임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친구들은, K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친구들의 인생은 이제 망한 건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내 인생을 위해서라는 담임의 말이 거슬렸던 건, 그 해 A 고등학교에 몇 명이나 보냈느냐가 바로 담임의 성과이자 학교의 명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은 각자가 지원한 고등학교에서 치러졌다. 시험 날 아침, 수험생들을 격려하는, 먼저 진학한 선배들이 준비한 플래카드가 A 고등학교 교문 주변으로 걸려있었고, 그게 수험생들에게 응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배들은 플래카드 아래에서 그들의 출신 중학교 교가를 큰 목소리로 불렀다. 아침부터 시험장에 나와 있던 담임이 나의 등을 두드려주었는데, 그럼 K 고등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는 애들은 담임의 얼굴을 못 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시험을 마치고 데미 무어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사랑과 영혼>을 친구 한 명과 보러 갔다.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영화였지만, 무슨 용기에서였는지 매표소 직원에게 수험표를 당당하게 내밀었고, 그걸 본 매표소 직원은 별 다른 말없이 표를 내어주었다. 영화를 기다리면서 가채점을 해보았는데, 무난한 점수였다.


   A 고등학교에서의 경쟁은 치열했다. 첫 성적표를 받아 들었을 때의 반 등수는 중학교 때의 전교 등수보다도 낮았다. 난 충격을 받았었는데, 사실 그 충격은 성적표에 찍힌 등수보다는 당시 담임의 무심한 반응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엔 등수 한 두 개만 떨어져도, 바로 교무실로 호출을 당하고는 어떤 말 못 할 고민이 있는 건 아닌지, 친구들 사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한 추궁을 들어야 했다. 고등학교는 더 할 거라 생각했다. 새로운 담임의 호출을 대비해 나름의 변명거리를 준비했었다. 처음이라서. 적응 중이어서. 하지만 그 변명거리는 담임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담임은 떨어진 성적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상위권의 애들에게로만 향했고, 나에게까지 오지는 않았다. 이후로는 관심을 받은 만큼만 공부했다. 받은 만큼만 준다는 것이  당시 내 인생의 모토였으니까.


   선생들의 관심이 줄어서 외롭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처럼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중학교 때의 담임 때문에 이 학교에 온 애들은 많았다. 선생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교실 뒷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으쌰 으쌰 하는 것도 처음 경험해 보는 일탈이었다. 하지만 한 번씩 성적표를 받아 들 때마다 당시의 선택을 후회했었다. 만일 K 고등학교를 갔더라면 어땠을까.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 치열한 K 고등학교를 갔더라면 난 공부를 꽤나 잘하는 학생으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을까. 떨어진 성적이 중학교 때의 담임 탓인 것만 같았다. 나를 A 고등학교로 보낸 담임이 내 인생을 바꾸어 버렸다고, 꽤나 여러 번, 오래동안, 그러니까 옆 반에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을 때까지, 그래서 이 학교에 온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까지, 중학교 때의 담임을 원망했었다.




   중학생들의 목숨을 건 우정은 생각처럼 끈끈하지가 않아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되었을 때엔 그 3년 치의 공백만큼 서로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K 고등학교로 간 친구들은 모자란 인원을 충원해 모임의 인원수를 다시 일곱 명으로 맞추었다고 들었다. 그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나 또한 A 고등학교에서 함께 일탈하는 친구들을 만났으니까. 그리고 목숨처럼 중요한 것은 <사랑과 영혼>의 패트릭 스웨이지처럼 사랑에 거는 거구나. 중학생이나 우정 따위에 목숨을 거는 거구나. 그래서 그 영화가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구나. 하는 생각도 잠깐 했으니까.


   1년이 지나고 A 고등학교를 지원한 후배들이 입학시험을 치르는 날, 내 중학교 동창들은 1년 전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S 중학교에 영광을!' 이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교문 옆에 내걸었고, 시험을 앞두고 긴장한 후배들을 위해 따뜻한 커피와 차를 건넸다. 그날 제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나온 중학교 때 담임을 봤다. 졸업 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으니 거의 1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몇 명이 옛 스승을 찾아가 반가움을 전했다. 담임은 옛 제자들을 흐뭇하게 안아주었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봤다. 그러면서 담임과 잠깐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지만, 다가가지 않았다. 절대 인사를 드리지 않겠다며 외면했다. 그건 내 인생을 바꾸어 버린 담임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고,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Image by Pixabay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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