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그 날: 고교입시>
내 인생을 바꾸었다고 생각하는 지난 선택들을 꼽아볼 때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것이 진학할 고등학교에 대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그 선택의 결과가 내 인생에 부정적이었는지, 혹은 긍정적이었는지는 다른 선택의 삶을 살아본 것이 아니어서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생각들, 그러니까 내 인생을 바꾸었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게 바로 그 선택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우정에 목숨을 걸었던 한 친구가 반 아이들 중 일곱 명을 모으며 앞으로 평생을 함께 하자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는 일곱 명에 나를 포함시켰다. 지금도 그렇지만, 난 인간관계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받은 만큼만 준다.' 라는 인생의 모토로 사람들을 대했는데, 그건 다시 말하면 '받은 만큼은 준다.' 의 의미이기도 했다. 그 친구는 끊임없이 자신의 관심을 베풀었고, 나 역시 받은 만큼의 대가를 매번 지불했다. 그가 치고 나가면 내가 뒤따르면서 우정은 쌓였다. 3학년이 되어 서로 반이 갈리면서도 그 친구가 주도하는 모임은 계속되었다. 투표를 통해 모임의 이름을 '7인회' 라 정하고, 정기적으로 한 달에 두 번, 주말에 모여 목숨을 건 우정을 키웠다.
당시 내가 학교를 다니던 곳은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었다. 원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려면 경쟁률을 확인하고 입학 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러야 했다. 중학교 때 난 공부를 꽤 잘했었는데, 그렇다는 건 내가 A 고등학교에 다니게 될 거라는 의미였다. 모임의 친구들이 A 고등학교에 가기에는 성적이 조금 부족했다. 그들은 한 등급 아래의 K 고등학교에 지원했다. 고등학교에서도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들이 A 고등학교에 가지 못한다면, 내가 K 고등학교로 가면 되지 않나. 목숨이 걸린 우정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담임은 친구들 때문에 인생을 망칠래? 하며 나를 다그쳤다. 담임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친구들은, K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친구들의 인생은 이제 망한 건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내 인생을 위해서라는 담임의 말이 거슬렸던 건, 그 해 A 고등학교에 몇 명이나 보냈느냐가 바로 담임의 성과이자 학교의 명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은 각자가 지원한 고등학교에서 치러졌다. 시험 날 아침, 수험생들을 격려하는, 먼저 진학한 선배들이 준비한 플래카드가 A 고등학교 교문 주변으로 걸려있었고, 그게 수험생들에게 응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배들은 플래카드 아래에서 그들의 출신 중학교 교가를 큰 목소리로 불렀다. 아침부터 시험장에 나와 있던 담임이 나의 등을 두드려주었는데, 그럼 K 고등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는 애들은 담임의 얼굴을 못 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시험을 마치고 데미 무어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사랑과 영혼>을 친구 한 명과 보러 갔다.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영화였지만, 무슨 용기에서였는지 매표소 직원에게 수험표를 당당하게 내밀었고, 그걸 본 매표소 직원은 별 다른 말없이 표를 내어주었다. 영화를 기다리면서 가채점을 해보았는데, 무난한 점수였다.
A 고등학교에서의 경쟁은 치열했다. 첫 성적표를 받아 들었을 때의 반 등수는 중학교 때의 전교 등수보다도 낮았다. 난 충격을 받았었는데, 사실 그 충격은 성적표에 찍힌 등수보다는 당시 담임의 무심한 반응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엔 등수 한 두 개만 떨어져도, 바로 교무실로 호출을 당하고는 어떤 말 못 할 고민이 있는 건 아닌지, 친구들 사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한 추궁을 들어야 했다. 고등학교는 더 할 거라 생각했다. 새로운 담임의 호출을 대비해 나름의 변명거리를 준비했었다. 처음이라서. 적응 중이어서. 하지만 그 변명거리는 담임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담임은 떨어진 성적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상위권의 애들에게로만 향했고, 나에게까지 오지는 않았다. 이후로는 관심을 받은 만큼만 공부했다. 받은 만큼만 준다는 것이 당시 내 인생의 모토였으니까.
선생들의 관심이 줄어서 외롭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처럼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중학교 때의 담임 때문에 이 학교에 온 애들은 많았다. 선생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교실 뒷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으쌰 으쌰 하는 것도 처음 경험해 보는 일탈이었다. 하지만 한 번씩 성적표를 받아 들 때마다 당시의 선택을 후회했었다. 만일 K 고등학교를 갔더라면 어땠을까.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 치열한 K 고등학교를 갔더라면 난 공부를 꽤나 잘하는 학생으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을까. 떨어진 성적이 중학교 때의 담임 탓인 것만 같았다. 나를 A 고등학교로 보낸 담임이 내 인생을 바꾸어 버렸다고, 꽤나 여러 번, 오래동안, 그러니까 옆 반에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을 때까지, 그래서 이 학교에 온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까지, 중학교 때의 담임을 원망했었다.
중학생들의 목숨을 건 우정은 생각처럼 끈끈하지가 않아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되었을 때엔 그 3년 치의 공백만큼 서로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K 고등학교로 간 친구들은 모자란 인원을 충원해 모임의 인원수를 다시 일곱 명으로 맞추었다고 들었다. 그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나 또한 A 고등학교에서 함께 일탈하는 친구들을 만났으니까. 그리고 목숨처럼 중요한 것은 <사랑과 영혼>의 패트릭 스웨이지처럼 사랑에 거는 거구나. 중학생이나 우정 따위에 목숨을 거는 거구나. 그래서 그 영화가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구나. 하는 생각도 잠깐 했으니까.
1년이 지나고 A 고등학교를 지원한 후배들이 입학시험을 치르는 날, 내 중학교 동창들은 1년 전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S 중학교에 영광을!' 이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교문 옆에 내걸었고, 시험을 앞두고 긴장한 후배들을 위해 따뜻한 커피와 차를 건넸다. 그날 제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나온 중학교 때 담임을 봤다. 졸업 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으니 거의 1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몇 명이 옛 스승을 찾아가 반가움을 전했다. 담임은 옛 제자들을 흐뭇하게 안아주었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봤다. 그러면서 담임과 잠깐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지만, 다가가지 않았다. 절대 인사를 드리지 않겠다며 외면했다. 그건 내 인생을 바꾸어 버린 담임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고,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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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