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소운 Sep 03. 2020

때 늦은 동치미국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타이밍이다

어처구니가 없다고 한다.

어이없다고도 한다.

맷돌의 아래위를 연결시켜 주는 장치,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은 돌릴 수 없다.

'참, 어처구니없네'하며 망연자실할 때가 많아지고 있다.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다.


작년에 김장을 하며 못내 아쉬워 뒤늦게 동치미를 좀 담갔더랬다. 일주일쯤 지나면서 맛있게 익어 고구마를 구워 먹을 때나 가래떡을 구워 먹을 때 조금씩 아끼며 꺼내 먹었다. 어쩜, 올해도 맛있게 담가졌구나 뿌듯해하며 후루룩 꿀꺽꿀꺽 소화제로 마셨다. 어느 날은 어린이집에 가져가 점심때 나눠 먹기도 했다. 동치미도 담그시냐며 친정엄마가 해주시던  그 맛이라고 감탄사가 난무했다.

이래저래 먹다 보니 얼마 남지 않게 되었고 좀 지나서 꺼내어 먹어야지 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시기라는 것이 있다.

때는 시간이다. 타이밍이다.

아침 일어날 때, 약속 시간 맞춰 나가야 할 때, 밥 먹을 때, 잠잘 때, 사랑한다 고백할 때, 고맙다고 표현할 때, 미안하다 말해야 될 때...

시기는 적당한 때나 기회를 말하는데 때의 개념보다는 조금 긴 시간을 말할 때 흔히 쓴다.

방학기간, 여름철, 장마철, 대학시절, 신혼 초, 30대, 40대, 갱년기...


때를 놓치고 시기를 놓치면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되거나, 하게 되더라도 때를 맞추었을 때 보다 좋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되기도 한다.

더 힘들게 가야 하고, 더 많이 돌아가게 될 수도 있다.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얻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야기한다.

‘그때가 좋을 때다’

‘다 때가 있다’


동치미가 살아있었다.

때를 못 맞춘 것은 의도가 아니라 순전히 건망증 때문이었다. 아껴서 먹으려던 동치미를 기억 저 편으로 보낸 건 기억을 담당하고 있는 ‘해마’란 녀석의 태만에서 기인한 것이다.

올여름이 푹푹 찌게 더웠다면 생각해 낼 수도 있었겠지만 긴 장마와 태풍 그리고 코로나 시대가 기억 회로에 장애를 초래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지, 이 자슥을 그냥...’


그나마 다행인 건 김치냉장고 깊숙이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과 냉장 온도를 낮게 맞추어 놓았다는 것이다. 서둘러 꺼내 보았다.

‘동치미가 아직 살아있다’

살얼음이 동동 떠 있는 것이 제법 식욕을 동하게 한다. 쨍하고 맑은 날은 아니지만 꺼낸 김에 제사를 지내든지 어떻게든 해 먹어야 한다. 이것들을 심폐소생시켜야 할 의무와 사명이 나에게 있다.



동치미무 무침 만들기

무는 나박나박 썰어 물에 담가 짠맛을 뺀 후, 꼭 짜서 갖은양념을 넣고 버무린다.

할머니와 엄마 역시 동치미가 오래되면 동치미무를 꺼내 짠지처럼 무쳐 밑반찬으로 삼으셨다.


한 겨울, 살얼음을 깨고 양푼 가득 동치미를 담아오면 4형제는 엄마가 잘라주신 길쭉한 무를 들고 아사삭 아사삭 깨물어 먹곤 했다.

군고구마 한 입에 동치미 국물 한번, 동치미 무 한입에 동치미 국물 한번.

겨울철 훌륭한 야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따뜻한 날씨 때문에 동치미가 서둘러 익어 군내가 나기 시작하면

 “아이고 아까워서 어쩌나, 빨리 먹을걸...” 아쉬워하시며 꺼내 만드셨던 동치미무 무침이다.


unbelievable 동치미 국수 ~ yeap!

누가 한여름에 동치미국수를 먹을 수 있을까?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시원한 동치미 국물로 국수를 만들어 보자.

살얼음은 덤이다.

고명으로는 동치미에 넣어두었던 무청과 쪽파 그리고 고추. 짭조름하고 칼칼한 맛이 풍미를 더한다.

특히 고추는 ‘신의 한 수’다. 이거 없으면 청양고추라도 다져 넣을 일이다.

맑은 동치미 국수에 양념 김치나 동치미무 무침을 올려 먹으면 김치말이 국수를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이들을 위해서 비빔국수도 추가했다. 동치미 덕에 국수 먹는 날이 돼 버렸다.

김장김치를 송송 썰어 설탕과 깨소금,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무친 양념김치를 고명으로 얹거나 비빔국수를 만들 때 같이 비비면 아삭한 식감도 즐길 수 있다.


때가 늦었다고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아 다행이다. 때가 늦어도 안되는 건 아니구나. 다시 하면 되는구나 지혜를 배운다.


통을 비우다.

동치미를 모두 꺼내어 한여름에는 말도 안 되는 ‘Unbelievable 동치미 국수’도 말아먹고 무침도 해서 밑반찬도 만들어놨다.

통을 씻어 물기를 빼고 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통은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

우리 마음도 그러하다.

마음을 비워야 여지가 생긴다.

여지가 생겨야 들어올 것이 들어올 수 있다.

사람도, 사랑도...


동치미 국수 먹어 좋은 날, 바람 불어 맘 켕기는 날!





이전 03화 ‘묵은 김치’가 담 넘어올 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