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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Oct 14. 2020

시간이 지나는 길

소리 없이 가시라, 스치지 말고 가시라

바람이 소리 없이 다녀갔다.

구름이 저 편으로 밀려나 알았다.

잎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았기에 안다.

먼저 떨어진 잎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걱서걱 울기에 알았다.

바람의 소행이다.


수면으로 바람이 스치어 지나간다.

물구나무섰던 산들이 부르르 몸을 떨고

장대 끝 잠자리 놀라 뱅그르르 맴돌며 난다.

뽀얀 얼굴 미소 머금고 억새는,

비비적 흐느적 뒤늦은 사랑 고백에 여념이 없다.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냥 스칠 뿐이다,

바람의 지난날을 얘기한다.


시간이 지나는 길에는

바람이 먼저 와 여름을 거두어 가고

아직 당도하지 않은 겨울을 재촉한다고.

준비 없는 이별 앞에 낮달마저 하얗게 질렸는데

나는 그제야 가을의 쓸쓸함을 확인한다.


쓸쓸함 뒤에는

궁색한 변명만 남을 터인데

만약, 바람의 기척을 느끼거든,

바람이 오는 길을 알게 되거든,

그냥 지나 가시라, 스치지 마시라

당부를 남긴다.


시간이 지나는 길 위에서

한숨처럼 뒹구는 낙엽을 보며

슬픔이 차 오르는 소리를 듣는다.


                                                    (2020. 10. 14)




<시를 쓰면서...>

흐르는 시간 위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소리가 없다. 무색무취하다.

저 혼자 부는 바람에는 소리가 없다. 바람은 대상이 있어야 소리를 낸다. 바람소리는 잎을 스치는 소리이고 물 위를 스치는 소리이다.

넓은 잎 사이에 바람이 들면 서걱대며 낮은 소리를 내고 가늘고 얇은 잎 사이를 지날 때면 사각대는 가벼운 소리를 낸다. 맑고 정갈한 소리를 낸다.

바람이 바다 위를 건너오면 비릿한 냄새를 잔뜩 묻혀오고 잔잔한 냇가를 스치면 향긋한 풀냄새도 함께 실어온다.

저 혼자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자신의 향기도 지니지 못한 바람인데

한차례 지나가고 나면 잎이 떨어지고 낙엽이 쌓이고 시간은 흐른다.

나는 아직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 많은데, 두고 볼 일들이 많은데, 할 것들이 남아 있는데, 바람은 자꾸 재촉을 한다. 시간을 재촉하고 세월을 끌고 간다.

가려거든 혼자나 가지. 스치지 말고 혼자서 가지.

흔들어 놓지나 말지. 저 혼자 부는 바람이, 소리도 없는 바람의 소행이 괘심 하다.

한숨처럼 뒹구는 낙엽을 보며 슬픔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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