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볶음, 고추장찌개, 고추장 불백, 고추장 비빔밥
내키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한다.
‘떡을 봤으면 떡만 먹을 일이다. 또 다른 일을 벌이지 말자. 귀찮다’ 나의 신조가 이러할 진대, 가끔 뭐에 씐 것처럼 제사를 지내는 수고를 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는 일을 하면서도, 일을 하고 나서도 항상 후회각이다. 다시는 일 안 벌리겠노라 마음속에 돋을새김 한다.
올해 담근 새 고추장을 주시겠다고 한다.
친정도 시댁도 시골이 아닌지라 쌀 한 톨, 마늘 한쪽 부쳐와 얻어먹는 곳이 없는데 가끔씩 이웃에게서나 지인들로부터 예기치 않게 시골스러운 선물을 받을 때면 마음이 따뜻하고 든든하다. 이를테면 된장 고추장 같은 장류나 산나물 죽순 마늘대 같은 푸성귀 종류가 대부분이지만 부모님이 시골에 계셔 아직도 농사일을 경영하신다든지, 어렵사리 귀농하여 재배하고 기른 수확물을 보내줄 때는 감동을 넘어 차라리 눈물겹다.
한 번은 양산 사는, 내 가장 오랜 친구에게 "나, 벌써 고혈압 약을 먹게 되었다"라고 하니 고혈압에는 소나무 잎 발효액을 매일 마시면 좋다며 강원도 심심산골에 사는 아는 오라버니께 부탁하여 소나무 잎을 상자째 보내왔더랬다. 바늘 모양의 솔잎이 두 가닥으로 자라고 있는 조선솔의 잎이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까지 하여 친구를 챙기는 마음이야 갸륵하지만 워낙 손이 큰 친구라 상자 가득 보내온 소나무 잎의 양은 놀랄 '노'자였다. 씻고 말려서 그에 맞는 병을 사고 설탕에 재우기를 이틀에 걸쳐하게 되었다. 혈압에 좋다는 소나무잎 발효액을 담그다 혈압이 급상승하게 생긴 것이다. 이왕이면 어린 백성 어여삐 여기신 세종대왕의 마음으로 담가 보낼 일이지 싶었다.(^^)
나를 생각해 보내어진 음식 재료들은 때를 넘기지 않고 어디 한 점 버리는 일 없이 야무지게 해 먹는데 장류는 두고 먹어야 하는 것이기에 오래 보관되기도 한다. 언뜻 냉장고 속을 들여다보니 고추장이 유독 눈에 많이 들어왔다. 새 고추장 들여놓을 자리를 찾다 보니 눈에 더 띄게 된 것이리라. 작은 통에 들어있는 것도 있거니와 큰 통에 들은 것을 꺼내어보니 몇 년 전 친구 아버님이 담가 주신 것부터 약으로 먹는다는 약고추장까지 제법 양이 많다. ‘내 이것들로 오늘, 무슨 짓이라도 해야겠다, 요절을 내주리라' 이글이글 눈빛이 타올랐다.
친정엄마가 가끔씩 시현해 보이던 '싹쓸이 신공'이다. 이 신공은 눈에 보이는 것이면 모두 불과 함께 산화시켜버리고 말겠다는 비장함과 과감함을 장착해야 한다. 그 대표적 결과물이 맛나니 간장과 소고기고추장볶음이다.
냉장고 속에서 이리저리 뒹구는 야채들을 모아 간장과 달인 '맛나니 간장'.
묵은 고추장들을 모아 소고기와 볶아내는 '소고기고추장볶음'.
“그래 오늘 너로 정했어, 고추장 너 나와!”
백종원표, 김수미표 소고기고추장볶음을 비롯 여러 레시피들은 청양고추나 파, 버섯, 간장, 식용유 등 여러 재료를 넣기도 하는데, 요리의 기본은 과한 재료를 쓰지 않고 간단한 방법으로 맛을 내는 데 있다 할 것이다. 무심한 듯 팍팍.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패션’이 유행인 것처럼 내 요리 스타일은 ‘넣어안넣어(넣은 듯 안 넣은 듯) 스타일’이라 감히 부를 수 있겠다.
<소고기고추장볶음 만들기> -고추장 500g 기준
1. 달군 프라이팬에 후추, 설탕, 매실액, 참기름 밑간을 살짝 해 놓은 소고기와 간 마늘(숟가락 1과 1/2)을 넣고 볶는다.
2. 소고기가 80~90% 정도 볶아졌을 때 불을 끄고 고추장(소고기와 같은 양)과 물(종이컵 1/3)을 넣고 섞는다.
3. 약한 불로 5~10분 정도 저으면서 볶아준다.
4. 단맛을 좋아한다면 설탕이나 꿀 등을 첨가하고 깨소금과 참기름으로 마무리한다.
소고기고추장볶음 하나면 사실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계란만 넣고 비벼 먹어도 좋고 나물이나 열무김치 등 갖가지 재료를 추가해서 볶은고추장 한 숟가락이면 한 끼 해결이다. 이건 만능 가제트 팔에 버금가는 가정집 무기에 속한다.
요리에도 가속도를 붙인다. 고추장 본 김에 제사까지 지내려는 중이다. 추석 명절에 먹다 남은 전을 몇 개 꺼내고 감자와 소시지를 넣어 얼큰한 고추장찌개를 끓인다. 쌀쌀한 날씨에 제격이다. 달짝지근한 고추장 맛이 뒤끝 작렬이다. 돼지고기도 냉동실에서 내려 고추장 볶음도 한다. 주방이 불구덩이에 고추장 타는 연기와 냄새로 매캐하다. 식탁이 온통 붉은색이다. 전쟁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아름답게 죽으리라 각오하며 치장하는 화랑의 홍장(紅粧) 같다.
함께 요리를 하던 남편과 웃음이 터졌다.
‘이거 다 먹고 나면 속이 좀 시끄럽겠는데...’
한참을 웃고도 못내 아쉬워 열무김치에다 볶은 소고기고추장까지 한 숟갈 얹어 비빔밥으로 마무리하고서야 전쟁 같은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 눈 앞에 있지 않아도 마음이 가면 해야 할 일은 언제나 주위에 있다. 마음 가는 대로 일을 하다 보면 일은 술술 풀리고 한 걸음 나아가 일을 더하게 되기도 한다. 취미로 하던 것을 밥벌이로 하게 되면 힘들고 부담되는 것과는 반대의 경우다.
마음 가는 대로 벌인 일이 하나 둘 셋을 넘어 며칠의 끼니를 담보하게 되니 마음이 한결 노곤노곤해졌다. 남편의 점심까지 해결되었지 아니한가. 끼니는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고 지나간 끼니는 돌아올 끼니 앞에 무의미하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해놓은 음식이 몇 끼의 걱정을 날려버렸으니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배부름이 주는 여유와 마음의 포만이겠다.
음식이 주는 ‘살아가는 맛’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