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간의 몽골 여행기(2016)
이곳에서는 여전히 시간의 존재가 무색할 만큼 기나긴 하루를 살아간다. 제자리를 지키던 해가 서쪽 땅으로 내려앉을 때 허브향이 짙은 언덕을 올라가 보았다. 제주도의 오름처럼 여러 언덕이 지평선 끝까지 깔려있었다. 그 위에서 바라본 저녁노을은 다시금 자연에 대한 찬탄을 뿜어내게 했다.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이 당시엔 아쉬웠지만 오히려 기억에는 가장 진하게 남지 않을까. 인간은 가치와 의미를 좇아 사는 존재라던데 이번 여행은 매 순간마다 가치와 의미가 살아 숨 쉰다. 2016년 7월 7일.
오늘도 디마의 아침 배달로 인해 눈을 떴다. 게르 안쪽까지 들어선 햇살이 시야에 들어왔을 땐 바깥은 어떤 모습일까 기대되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 금세 한 접시를 비워내고 세희가 가져온 베트남 커피로 정신을 일깨웠다. 디마가 준비해둔 커피와 홍차도 맛 좋지만, 평소에 잘 먹는 커피를 가져와 이곳에서 먹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 세희 덕분에 달달한 커피를 즐기며 하루를 시작! 밖으로 나가서는 마주치는 사람들과 굿모닝 인사를 나누고 바로 씻은 후, 다음 여정을 위해 짐을 쌌다.
푸르공을 타고 가다가 멈춰 섰을 때, 흙에서 피어난 아기 무궁화 같은 꽃을 발견했다. 꽃을 참 좋아라 하는 나는 길을 걷다가 꽃무리를 발견하면 멈춰 서서 한참을 바라본다. 몽골에서도 새로운 꽃을 발견할 때마다 만져보곤 했다. 행복하다 지금 이 순간이.
한적한 도로 위에서 점프샷은 기본. 차에서 자다 일어난 우리지만 이렇게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아직도 꿈만 같아서 배시시 웃음이 났다. 고등학교 때 밤까지 공부를 함께 하고, 집에 같이 걸어갔던 세희. 그리고 나와 2년 내내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수다꽃을 피운 서경이. 이렇게 셋이 멀리 여행을 온 게 처음인데 하나부터 열까지 척척 맞아서 걱정이 절로 사라졌다. 이 순간만큼은 잠시 멈춰도 좋겠어.
몇 시간을 더 달리니 창밖엔 마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에서는 샤워장을 갔다가 점심을 먹을 계획이다. 샤워장은 어떨까 궁금했는데 여러 칸이 있어서 한 명씩 들어가서 씻고 나오면 된다. 서경이랑 나는 같이 씻기로 해서 다른 사람들 먼저 씻으라고 하고 기다렸다. 두세 명이서 씻어도 충분히 넓은 공간에 따뜻한 물이 잘 나오는 좋은 시설의 샤워장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들려온 쏟아지는 물소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이곳은 마을 주민들도 종종 이용하는 곳이었다. 바로 옆에는 미용실도 있었다. 그곳에서 보마 기사님이 이발하는 모습을 구경했지. 이때 사진을 왜 하나도 안 남겼을까 아쉽다. 샤워할 생각에 너무 들떠있었나!
목욕을 끝내고 인근의 식당으로 이동했다. 내가 주문한 메뉴는 소시지 달걀 볶음 요리. 이제는 몽골 스타일인가 싶은 밥 두 덩이에 올려진 케첩 그리고 채소 무침. 소시지 달걀 볶음 요리의 맛은 한국에서 먹어본 분홍색 옛날 소시지랑 똑같은 맛이었다. 시원한 미니 콜라와 함께 한 접시 뚝딱. 몽골에서 차가운 물이나 음료수를 찾기가 힘들기 때문에(대부분 실온 보관이었다.) 갈증에 시달렸는데 디마가 사준 콜라가 거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세.. 세상에 이 식당엔 화장실이 내부에 있다. 그것도 양변기! 이 마을은 꽤 현대적인 곳인가 보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사진부터 찍었다. 그런데 꼭 이럴 땐 화장실에 들르고 싶지 않다. 초원을 달리는 도중에는 그렇게 가고 싶을 때가 많으면서 말이다. 아이러니해!
씻어서 기분 좋은 우리들. 셋 다 곱게 화장을 했다. 아마 앞으로는 보기 드문 모습일 것이다. 이제 마트에서 가볍게 장을 보고 오늘의 행선지인 욜링암으로 간다. 일 년 내내 녹지 않는 얼음 계곡이 있다고 하여, '시원함'을 경험할 수 있겠구나 하고 무척 기대했다.
한국에서도 즐겨먹던 오렌지 주스와 젤리를 한 아름 안고 행복한 기분으로 출발!
'욜링암(Yol valley)'은 독수리를 뜻하는 욜링과 절벽을 뜻하는 암이 만나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천혜의 비경이라고 손꼽을 수 있을 만큼 욜링암의 실제는 입이 떡 벌어지는 모습이었다. 고개를 올려서야 꼭대기를 확인할 수 있는 높은 산등성이가 뻗어 내리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 경치를 보고 있자니 외마디의 탄식과 함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연의 정취를 사랑하시는 아빠, 엄마가 오시면 참 좋아하실 텐데. 역시나 이곳에도 소원을 비는 어워가 있었다. 길 옆에 난 작은 샘을 따라가다 보면 끝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무엇보다도 걸어가는 길에 느껴지는 청정한 공기, 적당히 선선한 바람,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오른 꽃, 그리고 사이사이 눈부시게 비치는 햇살, 이 모든 것이 이곳에 정체하고 싶게 만들었다. 마음 같아선 여기에 돗자리 깔고 밤이 될 때까지 있고 싶었는데. 디마에게 졸라 보았더니 자기는 저녁밥을 만들어야 해서 안된다고 했다. 이럴 때 갑자기 철저한 가이드가 되셔! 걸어가는 길에 우리는 디마와 수다꽃을 피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몽골어도 배웠다. 안녕하세요(센-베노)에서 진화한 생활회화. 예를 들면 만나서 반갑습니다(오오층-다 타타밴), 고맙습니다(바야르-쓸라), 미안합니다(오호츠크-라라), 괜찮습니다(투그웨-투그웨),좋아요(요스터 생) 같은 문장들을 말이다. 이따 현지인을 만나면 꼭 써먹어야겠다. 요스터 생! 얼음계곡이 나타날 때까진 꽤 많이 걸어야 했는데, 처음에 작은 물줄기로 시작해서 점점 걸어가면 갈수록 계곡물이 서로 마주치는 큰 물가가 나타났다.
드디어 나타난 얼음 계곡! 자연적으로 에어컨 바람이 부는 듯 정말 시원했고, 층층이 쌓인 얼음 협곡은 꽤나 견고했다. 어떻게 사막지역에 사시사철 녹지 않는 얼음 계곡이 존재할까. 정말이지 우주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얼음 조각을 먹어 보니 뼛속까지 저릴 정도로 시원했다. 오늘은 여러 가지로 호사를 누리는 날임에 틀림없다. 이럴 때 잔뜩 즐겨야지. 우리는 얼음 앞에서의 설정샷을 한 장 남기고, 디마 역시 한 장! 인화해서 주고 싶을 정도로 잘 나왔다. 환히 웃는 그의 얼굴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소 무리는 저 멀리서부터 풀을 뜯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한가로이 떠도는 구름과 들판에서 노니는 소들을 보니 내 마음이 평온함으로 가득 차오른다. 너희들은 좋겠다. 욜링암이 곧 집이어서.
들어오는 길에 잠깐 보았던 간이 기념품 가게에 다시 들렀다. 실용적인 털양말을 살까 하고 만져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까끌까끌해서 불편할 것 같았다. 동물 뼈로 만든 장신구나 낙타 인형은 어디까지나 잠깐의 장식품에 불과할 테니까 패스. 하지만 한 땀 한 땀 직접 만드신 작은 융단은 내 눈길을 끌었다. 내가 본 몽골의 축소판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잘 집약해 표현한 풍경. 누가 봐도 이건 몽골이다 싶었다. 이것을 사면 마치 한국으로 돌아가 차를 마실 때 찻잔 밑에 깔고 마시면서 몽골을 그리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까지 했다. 그래, 결심했어. 이건 꼭 사가야 해!
가장 마음에 드는 색감을 지닌 융단을 골라 외쳤다. '인 히트 웨?(이거 얼마예요?)'
돌아오는 대답은 '@$%^&'.
아 물어볼 줄만 알면 뭐하나 대답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이럴 때 곧바로 찾는 사람은 디마다. 도와주세요 디마!! 알고 보니 한화로 약 20000만 원을 호가했다. 가격에 충격받은 나는 흥정을 부탁했고, 약 15000원 정도에 구매할 수 있었다. 2만 5천 투그릭에 얻어낸 융단. 천 단위 혹은 그 이하의 식료품을 사다가 아주 큰돈을 지출하니 아찔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꼭 요긴하게 쓸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오른쪽 모서리에 바느질이 제대로 마무리돼 있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나의 심각한 표정을 보시더니 바로 해주시겠다며 비슷한 색깔의 실로 뚝딱뚝딱- 이렇게 바로 해주시다니. 정말로 감사했다.
차로 1분 거리에 위치한(걸어가도 무방한) 욜링암 박물관에서는 다양한 야생동물을 박제해 논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 있었던 방명록에 우리 이름을 남겼는데, 한글이 꽤 많이 보여서 반가웠다. 이곳에서도 몽골 풍경이 담긴 예쁜 원카드를 하나 샀다. 오늘 머물 게르는 벌써 3번째라서 그런지 신기함보다는 자연스러움이 앞섰다. 짐만 내려놓고 바로 밖으로 나온 비글 같은 우리들.
돗자리를 펴고 아까 산 원카드로 카드 게임을 하려는데 마트에서 산 과자와 젤리는 있는데 어제 먹다 남은 맥주가 사라졌다. 디마에게 물어보니 없다는 답과 함께 게르에서 3분만 걸어 내려가면 집주인이 하는 슈퍼가 있는데 그곳에서 맥주를 팔 수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산책 겸 사러 갔다 오기로 했다. 언덕을 따라 내려가니 한 게르형 슈퍼가 보였고,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앗, 우리와 또래처럼 보이는 한 청년이 웃옷을 벗고 쉬고 있었다. 처음에 좀 당황했지만 인사를 하고 맥주를 사러 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맥주를 안 판다고 했다. 우리는 아쉬움에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그가 I watched korea drama called 'reply 1988'이라고 말했다. 나도 한때 '응답하라 1988'에 푹 빠져 재밌게 보았기에 그 말을 듣자마자 무척 반가웠다. 그래서 혹시 알까-하고 그에게 아이고~김 사장!이라고 외치며 악수를 청하자 놀랍게도 그가 바로 따라 했다. 몽골 땅에서도 한류 열풍이 부는 것인가. 우리는 이 상황이 신기하면서도 너무 재밌어서 한바탕 웃고 나왔다.
맥주를 못 샀어도 색다른 경험에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웬걸 디마가 어디선가 맥주를 가지고 왔다. 우리가 어제 산 노란색 맥주는 아니었지만 자기가 구해왔다며 두 병을 주었다. 이때부터 우리의 추리가 시작됐다. 가장 지배적인 신뢰를 얻는 추리 시나리오는 우리가 맡긴 맥주를 어제 디마가 먹고 오늘 우리에게 주려고 했는데, 살 만한 데가 없어서 당황했다가 우리가 맥주를 사러 간 사이에 디마도 어디선가 구하러 돌아다녔다는 것(ㅋㅋㅋㅋㅋ). 이게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다만 그의 천연덕스러운 모습이 우리를 웃음 짓게 했다. 그리고 또 새로운 맥주를 맛볼 수 있으니까!
원카드를 하면서 한바탕 놀고 나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마치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애들을 부르는 엄마처럼 디마가 우리에게 밥 먹으라고 외쳤다. 그리곤 돗자리까지 친히 배달해줬다. 한눈에 봐도 꽁치 김치찌개 같은 비주얼의 국. 오랜만에 얼큰한 한국의 맛을 느낄 수 있나 싶은 마음에 기대감이 한껏 올랐다. 첫 숟갈을 뜨는 순간 아, 이건 완전히 꽁치 김치찌개다. 깍둑 썰기한 감자와 당근이 들어있어서 좀 다르긴 했지만 국물 맛은 김치찌개와 아주 흡사했다. 몽골식 김치라던데,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디마에게 요스터 생을 외치고 허겁지겁 밥을 먹으려는 찰나, 저 멀리서 다른 여행자를 실은 푸르공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 게르로 오려는 것 같은데 문제는 우리 앞을 지날 때 어마어마한 흙먼지를 날렸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피어오른 흙먼지는 무참히 우리를 덮쳤고, 난 내 밥그릇은 본능적으로 껴안았지만 화장실에 간 서경이의 밥그릇은 지켜주지 못했다. 너무 미안해 서경아.. 무자비하게 지나간 푸르공이 미웠지만, 우리 셋 다 금방 아무렇지 않게 국그릇의 바닥이 보일 때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아아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잘 버텨낼 우리들이여...
하늘다운 '하늘'색을 지닌 오늘의 몽골 하늘. 배도 부르니 자연스레 눕게 되는 것은 인간지사라.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진정한 여유를 이렇게 한 번에 느껴버려도 되는 걸까. 이곳에선 시간의 개념이 무의미했다. 지금은 내 일상이 아닌 여행이니까 잡념의 스위치는 끄고 온전히 즐기도록 노력해야겠다. 하지만 이곳에서 느낀 무수한 감정과 기분은 일상으로 옮겨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긍정의 샘이 넘쳐흐르도록 몽골의 기운이 충만하기를. 이 땅에서 만난 가장 소중한 사람인 가나와 디마가 있어서 이번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 된다. 우리가 몽골에 잘 스며들 수 있도록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온종일 청명했던 날씨 덕분에 밤하늘에도 별꽃이 피었다. 수많은 여행자가 밤하늘의 별을 보기 위해 몽골에 간다고 말하는 이유를 잘 알겠다. 쏟아지는 별빛이라는 표현은 이런 하늘을 두고 하는 말일까. 고요함이 내린 밤하늘의 은하수를 직접 보고 있는 기분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사실 한국에서 별자리 어플을 다운로드하여 왔지만 막상 눈 앞에 있는 별들을 보니 그냥 눈으로만, 마음으로만 담고 싶었다. 왠지 경건해지기까지 한다. 이 귀중한 사진은 함께 투어를 온 동생 영원이, 지은이, 어진이가 찍어서 준 것이다. 고마워 얘들아. 내가 고개를 들어 본 밤하늘이 기억에 오래도록, 선명히 남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