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간의 몽골 여행기(2016)
한국에서 골머리를 앓던 수많은 할 일, 복잡한 인간관계, 쓸데없는 잔걱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의 현재와 더불어 과거, 미래 사이에서 무수한 혼란을 겪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지금 내 상태, 감정에만 집중해 이 외의 것들은 생각하지 않게 된다. 낯선 환경에 새롭게 적응하려는 인간의 당연한 형성 과정일 수도 있지만 비로소 나만을 위한 시간을 오랜만에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밤도 어제와 같이 침낭 속에서 잠못이루면 어떡하지, 이렇게 깜깜한 어둠 속에서 홀로 눈을 껌벅이고 얼마나 있어야 잠에 들 수 있을까, 인공적으로 불을 켜는 순간 벌레들이 나에게 달려들지 않을까 하는 지금 '나'에 대한 생각을 하다 잠드는 게 얼마만 일까. 2016년 7월 6일.
처음으로 맞이하는 몽골의 아침이다. 동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게르를 돌며 내는 소리에 선잠을 깼다. 침대 옆으로 나는 낯선 짐승의 소리가 순간 섬찟했지만 아마 개나 양이겠지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내 디마가 접시를 들고 오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접시에는 아침밥답게 간단한 요리가 담겨 있었다. 원래 집에서 일어나면 시원한 물과 함께 정신과 입맛을 깨우는데, 이곳에선 물을 마셔도 시원하지가 않아 갈증이 완벽히 해소되지 않는다. 대신 과일과 오이로 수분 공급을 할 수 있었다. 아침 식사 후에 밖으로 나가보니 눈부신 햇살이 대지를 빛으로 적시고 있었다. 간단히 씻고(물티슈로 얼굴을 쓱 닦고) 바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차강 소브라가(Tsagaan suvraga)'라는 곳이다. 디마는 가는 길에 있는 마을에 들러 필요한 물품을 살 거라고 했다.
가나는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나담 노래를 틀어줬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은 선율과 음색에 조용히 들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따라 부르게 되는 매력(?)이 있다. 평화롭게 달리던 중, 갑자기 차 앞으로 양과 염소 떼가 잔뜩 나타났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도로 주변으로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가축들은 모두 주인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주인들은 자신의 가축을 알아본다고!
마을에 도착했다! 어제부터 내 핸드폰은 먹통이었지만, 세희 핸드폰은 다행히 잘 돼서 부모님께 전화를 걸기로 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엄마와 페이스톡을 했다. 걱정 많은 우리 엄마에게 나는 정말 잘 있고, 여기 너무 좋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서경이 어머니랑도 통화하는 데 너무 반가웠다.
마을에는 슈퍼마켓뿐 아니라 동대문 시장 같은 의류 상가, 펍 등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 시도해 봤지만 영어를 할 줄 아는 분들이 아무도 없었다. 서경이랑 화장실을 찾을 겸 펍의 입구 앞까지 들어갔다가 그냥 나왔다. 차로 돌아와서 슈퍼마켓에서 산 것들을 바로 개봉! 초콜릿 우유와 프링글스. 참 맛있다!!
몽골에서 생존 필수품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물티슈라고 답할 거다. 물이 귀한 이 곳에서는 물티슈로 씻고 닦고 해야 한다. 현지 마트에서 한국산 물티슈는 어딜 가나 살 수 있어서 걱정 없었다.
식당에서 도착했다. 어김없이 양요리가 나왔는데, 계란과 함께 먹으니 먹을 만했다. 디마와 에르카가 직접 해주는 양 요리가 아니면 양맛은 어딜 가나 똑같았다. 이때 식사를 하면서 데이비드에게 유투버 영국 남자 Josh를 아는지 물었다. 그가 모른다고 답해 나는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영국인인데 한국을 사랑해서 한국 문화를 전파하는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차강 소브라가에 왔다. 하늘색이 밝지 않았지만 다행히 비는 안 내렸다. White stupa(하얀 불탑)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이곳은 아주 오래전 바다였다고 한다. 몽골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 불릴 만큼 층층이 쌓인 백색의 암석 지형이 매력적이고 경이로웠다. 이때 우리는 '인간은 미물이구나'를 여실히 느꼈다. 사람들이 왜 대자연 앞에서 치유를 받는지 알 것 같다.
언덕 밑에 내려가면 이 거대한 석회암 지층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해서, 내려가려고 했으나 모래바람의 습격과 미끄러운 샌들 때문에 포기했다. 용감한 세희가 디마랑 내려가는 동안 서경이랑 나는 에르카, 그리고 영국인 커플과 이야기했다. 에르카는 우리에게 몽골 이름을 지어준다고 했다. 그는 우선 내 한국 이름의 뜻을 물어봤다. 나는 클 보甫의 빛날 경耿이니, '크게 빛나라'라는 뜻이다. 이걸 말해주자 에르카는 잠깐 생각하더니 'Chacha'라고 말했다. 오! 듣자마자 뭔가 귀여운 느낌의 이름이 마음에 쏙 들었다. 서경이에게는 'Toya'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둘 다 '빛'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새로운 이름이 생겨 신이 났다. 고마워요, 에르카!
게르 캠프로 가는 길에 푸르공 안에 있던 한몽사전을 발견했다. 이 사전에 쓰여있는 것 중 신기했던 것은 몽골 울란바타르 대학에 한국어 관련 학과가 많은 것이었다. 아무래도 한국과 몽골은 깊은 연고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디마에게 몽골어를 조금씩 배우는 것이 너무 재밌어서 이 사전에 나오는 단어도 몇 개 읽어달라고 했다.
오늘의 게르도 아늑한 실내를 자랑했다. 어제 낯선 환경으로 인해 잠을 설쳐서 이번에도 같은 자리에 누우면 좀 더 적응력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문가에서 두 번째 침대를 내 자리로 삼았다. 게르 밖엔 탁 트인 풍경과 쉬기 딱 좋은 정자가 있었다.
오! 이곳에는 낙타가 살고 있었다. 처음으로 코앞에서 보는 낙타에 눈을 못 떼고 관찰했다. 그리고 화장실 상황부터 살폈는데 꽤나 괜찮은 시설이었다. 푸세식 화장실이 아닌 양변기가 있는 화장실이라니. 감사합니다!
몽골의 시골에서는 온 가족이 집안일을 함께한다. 어린아이들도 무거운 짐을 착착 옮기고 어른들을 따라다니면서 일손을 보탠다. 천진난만한 초록 꼬마는 우리랑 장난을 치다가도 기나긴 천을 빨기 위해 제자리로 간다. 여느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잘한다고 칭찬해주면 더욱 신나서 열심히 한다. 저 아이의 누나인 Orna는 중학생 정도의 나이지만 정말이지 의젓하게 엄마를 돕는다. 갓난아기의 이부자리를 살피고 여행객들의 게르를 점검해주는 업무를 도맡아 한다. 어찌나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맑던지. 잊을 수가 없다. 가끔은 아이들에게 배우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오늘은 익숙한 맛의 저녁이다. 미트볼과 감자, 양상추 샐러드와 밥으로 아주 맛있게 한 그릇 뚝딱! 했다. 디마와 에르카가 상의를 탈의한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요리를 하는 모습을 봐서 더 고마운 마음으로 먹었다. 식사 후엔 정자에 나와서 디마, 가나와 번갈아 가며 수다를 떨었다. 이때 디마 핸드폰에 담긴 홉스골 호수 사진을 봤는데 정말 예쁘길래 이거 보정한 거 아니에요?라고 물어봤는데 맞다고 해서 너무 웃겼다. 2G 폰인데 어떻게 한 걸까..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노래들 중 한국 노래가 꽤 많았다. 이루의 까만안경이나 김종국의 한 남자 같은 조금 오래된 발라드곡! 나는 평소에 발라드곡은 거의 듣지 않지만 이때만큼은 함께 열창했다.
세희가 가져온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Orna의 가족들 게르로 찾아갔다. 몽골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려면 폴라로이드 사진 만한 게 없다는 이야길 듣고 세희가 가져왔는데,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가는 곳마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서 드리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좋아하셨다. 이 가족 게르 안에는 갓난아기가 있어서 숨을 죽이고 누워있는 아기를 지켜봤다. 엄마가 젖먹이는 모습까지 보았다. 조금 민망했는데 에르카랑 디마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같이 보고 있었고, 심지어 그 집에 있는 과자도 먹어도 된다고 내주었다. 몽골에서는 손님용 과자를 항상 준비해둔다고. 아이 엄마께서는 우리에게 사탕도 주셨다. 정말 감사한 마음에 세희가 사진을 찍어 드렸다.
밤에는 우리 옆 게르에 온 한국인 가족과 함께 캠프파이어를 즐겼다! 초등학생인 병준이와 병준이 어머니는 둘이서 여행을 자주 간다고 했다. 세희와 서경이 그리고 난 입을 모아 병준이에게 훌륭한 부모님을 둔 것을 감사히 여기라고 말해줬다. 병준이 어머니께서는 중국 청도에서 사업을 하시며 병준이와 함께 사시고, 남편분은 한국에서 일하신다고 하셨다. 남편분께선 부인의 커리어를 존중해주신다고 하셨다. 신여성 같은 병준이 어머니의 라이프스타일이 정말 멋졌다. 우리에게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는 여자가 돼야 한다는 가르침도 주셨다. 여행 이야기도 재미나지만 이렇게 현실적인 조언을 몽골 땅에서 들으니까 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 이곳에서는 예측 불가한, 적응 안 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지만 그 속엔 마음의 고요와 평화가 깃들어 있다. 하루의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어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은 점도 정말이지 너무 좋다. 행복이 별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