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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Feb 20. 2018

우프(WWOOF) 일기 1-2

FRANCE


지중해성 기후 아래 사는 사람들은 태양을 그리워해 본 적이 없을 것 같다. 이른 아침부터 작열하는 볕을 온몸으로 쬐고, 한낮에는 그 볕 아래서 시에스타를 즐기며 반짝이는 바다를 원 없이 바라볼 테니까. 태양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햇살은 땅과 바다를 어루만지고, 인간마저도 품어주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코끝으로 불어오니 햇살에 위로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연으로부터의 위안은 세상의 복잡함을 잠재우고 단순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구절처럼 행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이곳에서 느꼈다.


나는 또 한 번 행복이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닷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임을 깨달았다.


필요한 건 그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다.


Peille


 끊이지 않는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간단히 빵과 오렌지를 먹었다. Umi no ki의 규칙 중 하나는 아침은 각자 알아서 먹고, 점심과 저녁은 함께 만들어 먹는 거다. 아침을 먹으며 나는 Roddy에게 며칠 전 바르셀로나에서 경험한 카탈루냐 독립시위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유럽에서는 그런 일이 흔하다며 자신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도 매번 그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고 했다. 2014년에 한차례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를 실시했으나 무산됐었고, 브렉시트 이후로 다시 한번 분리독립 재추진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자신 또한 스코틀랜드가 독립하길 원하고, 잉글랜드와는 엄연히 다른 나라로 생각한다고 했다. 스페인과 영국의 내부 사정은 다르지만, 비슷한 정치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로웠다.



 오늘 나의 일과는 올리브 나무에서 올리브 열매를 따는 일이다. 말로만 들으면 매우 간단한 일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도 닿지 않는 올리브를 따기 위해선 주위에 그물망을 치고, 있는 힘껏 나무를 흔들어야 했다. Roddy가 말하길, 이탈리아 사람들은 올리브 나무 근처에 그물망을 넓게 깔아놓고 그저 열매가 스스로 떨어지길 기다렸다가 수확한다고 했다. 그는 미리 열매를 수확해서 겨울 내내 두고 먹을 수 있게 저장해둘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자신의 일을 하러 떠났다. 나도 바로 사다리와 바구니를 챙겨 들고 올리브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처음엔 손으로 하나하나 따다가 효율성이 없다고 느껴질 때쯤 그물망을 쳐서 나무를 흔들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올리브가 많이 떨어지지 않아서 다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따기를 반복, 또 반복했다. 지붕 가까이까지 뻗어나간 올리브 나무는 직접 지붕에 올라서 열매를 채취했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이지만 이게 바로 농업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일차원적인 삶의 방식이자 노력 대비 결과가 정비례 방향으로 정직하게 산출되는 것.



 올리브 열매 따기에 한창 열중하고 있었는데 Roddy가 다가오더니 자신은 낮잠을 잘 거라고 했다. 나도 원한다면 쉬거나 마을 구경을 하고 와도 좋다고 했다. 나는 이 첩첩산중에 마을이 존재하기는 한 걸까, 너무도 궁금하던 찰나였으므로 좀 걷고 오겠다고 말했다. 사실 이곳을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나 한 명쯤 죽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 깊은 산속에 집 한채만 덜렁 있는 시골이었다. 구글 지도에만 의존해 10분 이내에 도착한다는 '마을'을 찾아가 보았다. 가다가 길을 잃는 건 아닐까, 막상 가서 보니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 마을은 아닐까 하는 약간의 걱정을 안고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나는 동화에서나 볼법한 광경을 목도했다.


 우거진 수풀과 견고한 절벽 사이로 기다란 형태의 집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벽돌 계단을 따라 오를 때마다 새로운 골목길이 나왔다. 마치 탐험가가 된 기분으로 이 골목 저 골목을 배회하는데, 역시 지중해 마을답게 모든 집엔 폭이 좁고 높이가 긴 창문이 있었다. 그리고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듯 우체통에는 각기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중간엔 조그만 광장이 나오기도 했는데 전에 엽서에서 봤던 그림과 똑같이 생긴 동그란 분수대가 있었다! 그리고 한 가족처럼 보이는 네댓 명의 사람들이 계단에 걸터앉아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아 그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광장의 측면에는 빵집과 아뜰리에도 하나씩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올리브 나무가 없던 길은 하나도 없었다. 사방에서 올리브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가히 올리브 천국이라고 부를 만 하구나. 집에 도착하니 Roddy가 기다렸다는 듯 어땠냐고 물어본다. 나는 몇몇 개의 사진을 보여주며 내일 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오늘도 해가 저물 때까지 주어진 일을 하고, 어제처럼 나무와 밭에 물 주기도 잊지 않았다. 종일 바깥에서 생활하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자연스레 체감하게 된다. 노을이 저무는 것을 볼 때 오늘 하루도 잘 살아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저녁으로 어제 먹다 남은 정어리와 야채를 볶아서 먹고, 누워서 책을 읽었다. 영문학 교사였던 Roddy의 책장에는 눈에 띄는 책들이 많았는데, 그곳을 기웃대는 걸 본 그가 한 권 뽑더니 읽어보라고 건네줬다. 나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거라며 건네준 책의 제목은 'The man who planted trees'. 프랑스 작가 'Jean Giono'의 작품이었다. 책의 도입부는 다음에 시작될 이야기에 관한 궁금증을 유발하기에 더없이 훌륭했다.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나'는 말한다.


약 40여 년 전의 일이다. 나는 여행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고산지대로 먼 여행을 떠났다. 그곳은 알프스 산맥이 프로방스 지방으로 뻗어 내린 아주 오래된 산악지대였다. 이 지역은 동남쪽과 남쪽으로는 시스테롱과 미라보 사이에 있는 뒤랑스 강의 중류를 경계로 하고 있었다. (중략) 그러니까 그곳은 바스잘프 지방의 북부 전부와 드롬 강의 남쪽 및 보클뤼즈 지방의 일부 작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나는 익숙한 지명 몇몇 개를 발견해 곧바로 구글 지역에 검색해봤다. 그랬더니 역시나 남프랑스 지역의 일부였다! 이어지는 내용 또한 죽어가던 자연을 되살리기 위한 한 남자에 대한 것이었다. 이토록 시의적절할 수가 있나 싶었다. 책의 화자가 만난 엘제아르 부피에는 아내와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홀로 버려진 땅으로 와서 농사를 짓는 남자다. 매일 100개의 도토리를 정성스럽게 골라내 나무를 심은 결과, 황폐한 땅이 울창한 숲으로 변했다. 어쩌면 그가 농사를 짓는 것은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행위일 수도 있다. 그것은 본인을 위한 일이지만 세상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지구의 한 부분이 생명력을 얻고 새롭게 태어났다. 때로는 책이 백 마디 말보다 더 깊은 가르침을 주는 법이다. 내가 지금 이곳에서 하고 있는 작은 일이 자연의 생명력을 지속시켜 나가는 일이라면, 더없이 고귀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아무런 기술적 장비도 갖추지 못한 오직 한 사람의 영혼과 손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니, 인간이란 파괴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하느님처럼 유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가 홀로 철저한 고독 속에서 일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너무나도 외롭게 살았기 때문에 말년에는 말하는 습관을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아니, 어쩌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공기마저도 달라져 있었다. 옛날의 메마르고 거친 바람 대신 향긋한 냄새를 실은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중략) 그리고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그 샘 곁에 이미 네 살쯤 되어 보이는 보리스가 심어져 있는 것이었다. 벌써 잎이 무성하게 자란 이 나무는 분명히 부활의 한 상징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사람의 오직 정신적, 육체적 힘만으로 황무지에서 이런 가나안 땅을 이룩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힘이란 참으로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위대한 혼과 고결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이 없었던들 이러한 결과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엘제아르 부피에, 그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신에게나 어울릴 이런 일을 훌륭하게 해낸 배운 것 없는 늙은 농부에게 크나큰 존경심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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