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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Feb 19. 2018

우프(WWOOF) 일기 1

FRANCE


타인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 있다. 더군다나 나와는 전혀 다른 환경의 세계라면, 세상살이의 다양성을 깨우치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까. 어느 곳을 여행하든 나는 그 나라의 사람들의 삶을 배우고 싶었다. 잠시 머물다가는 여행자와 현지인의 만남이 아니라 자연스레 그들의 일상에 녹아드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의 세상을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으로 떠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나의 버킷리스트 상위권에 존재하던 목록 또한 '현지인 집에 머무르며 지중해식 삶 배우기'였다. 이왕이면 지중해가 맞닿아 있는 나라 그리고 관광지에서 한참을 벗어난 시골,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의 노동이 가능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이를 위해 선택한 것은 우프(WWOOF: World 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라는 제도였다. 주로 농가에 머물며 숙식을 제공받는 대가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가치 교환의 장이라고 볼 수 있다. 총 63일의 여정 중에서 앞선 한 달을 여행자로서 충실하게 살고, 나머지 한 달은 우퍼(WWOOFER)로서 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남프랑스로 떠나 두 번의 우프를 했다. 첫 우프 목적지는 프로방스 알프 코트다쥐르 지역의 뻬이(Peille)라는 마을이었다.


Peille


 비탈진 언덕을 넘고, 구부러진 길을 오른다. 또 오른다. 계속 오른다. 낮은 하늘과 맞닿을 것만 같이, 내가 탄 차는 벌써 한 여덟 번은 활처럼 굽은 길을 돌고 돈다. 창밖으론 고도를 증명하듯 바위산의 꼭대기가 가깝게 보였고, 산과 산이 모여 만들어내는 능선이 파도치는 바닷물결처럼 보였다. 나는 경이로운 풍경에 넋을 놓고 말았는데, Roddy는 권태로운 눈빛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운전을 할 뿐이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니스에서 은희, 재은이, 지언이와 해변가를 거닐고, 광장 주변부를 떠돌며 신나게 웃고 떠들던 게 꿈처럼 느껴진다. 정말로 우리의 여행은 끝이 났고 나의 여행, 제2막이 시작된 건가?   


 나의 첫 우프 호스트 Roddy는 프랑스의 시골 마을로 온 지 2년이 채 안 되는 영국인, 정확히는 스코틀랜드 사람이다. 사실 호스트를 구하는 일이 여간 쉽지 않아서, 나는 닥치는 대로 메시지를 보냈었다. 우선 답장이 오지 않는 것은 부지기수요, 왔더라도 이미 우퍼를 구했다거나 추수 기간이 끝나서 사람이 필요 없다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호스트가 써놓은 정보를 꼼꼼히 읽다가 나중에는 위치만 괜찮으면 일단 대충 읽고 메시지를 보냈다. 미리 불어와 영어를 섞어서 준비해둔 멘트를 일괄적으로 여러 호스트에게 보냈고, 답장을 기다렸다. 그러다 Roddy의 답장을 받았다. "Nice to hear from you.  Do you speak English? I am a Scottish man."

 

 나는 그제야 그의 정보를 자세히 읽어 보았고, 그는 모나코 국제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현재는 12년간의 교직생활을 그만두고 이곳, 남프랑스로 와서 지낸다고 했다. 또한 그의 목표는 생산물을 팔기 위한 농사가 아닌 자신의 자급자족, 즉 먹고살기 위한 농사였다. Umi no ki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의 집 또한 스스로 지은 것이었다. 그의 텃밭엔 자두나무, 살구나무, 감나무, 아몬드 나무, 포도나무 등이 있고, 로즈메리와 민트 같은 허브식물 또한 자라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덧붙인 설명에는 "I wanted to live this life at a gentler place. More connected to and more responsive to nature, and here I am. "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좋은 예감이 들었고 어서 그를 만나고 싶었다. 다행히 Roddy의 집은 니스와 멀지 않아서 그가 숙소 근처로 데리러 왔고, 우리는 지금 함께 Umi no ki로 가고 있다.



 그의 집을 실제로 보니 곱절은 더 반가웠다. 기둥에 매달려 있던 스노보드도 사진 속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집안 곳곳에는 그가 지닌 삶의 철학이 잘 녹아들어 있었다. 직접 만든 것처럼 보이는 가구가 대부분이었고, 다소 정리되지 않은 실내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방 안에 있던 Umi와 Mango라는 두 마리의 고양이가 전혀 낯을 안 가리고 내 몸을 파고들었다. 가방을 채 풀기도 전에 고양이들에게 둘러싸여 환영을 받았다. Roddy는 가볍게 집 구경을 시켜준 후, 쉬라고 했다. 나는 너무 한낮이라 바로 쉬기 미안했지만 고양이들과 놀 수 있어서 냉큼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잠깐 소파에 눕는다는 게, 잠이 들어버렸다. 


 나는 Roddy가 일을 끝내고 들어오는 소리에 깼고 스스로 어이없어서 웃음이 났다. 그에게 바로 내가 할 일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밖에 있는 여러 종류의 나무와 허브 밭에 물을 주면 된다고 했다. 이건 매일 하루에 한 번씩 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잘 해보라며 다시 하던 일을 마저 하러 갔다. 예상치 못한 그의 짧고 쿨한 설명에 나는 물을 무엇으로 주어야 하는지, 얼마큼 주어야 하는지 조차도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처음 우프를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부모님께선 시골에서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애가 무슨 농장 생활이냐며 만류하셨다. 주위 사람들은 왜 사서 고생을 하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간 그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르며, 내가 큰일을 내긴 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물가 옆에 보이는 양동이를 집어 들고 눈에 보이는 나무와 밭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양동이에 물을 담고 왔다 갔다 해야 하다 보니 고작 두세 번 왔다 갔다 했는데도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중해의 태양빛은 몹시도 강렬한지 물을 부어도 말라있던 흙이 바로 흥건해지지는 않았다. 나는 한 20분 정도 물 주기를 마치고 이쯤 되면 됐겠다 싶어 Roddy에게 갔더니 그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리고 같이 확인을 했는데, 그는 갑자기 선생님 말투로 물 주기는 이렇게 쉽게 끝나는 일이 아니고 보통 1시간 혹은 1시간 반이 걸린다고 말했다. 또한 흙이 완전히 젖을 때까지, 반경 1m까지 적어도 3번씩은 물을 부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가진 나무는 5그루 이상이었고 밭은 크게 나누면 4구역 정도 되니까, 1시간은 족히 걸릴만했다. 나는 '밭에 물 주기'라는 기본적인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고, 나의 농업적 지식은 거의 0에 수렴한다는 것을 또 한 번 자각했다. 아, 쉽지 않겠구나.    

 

 아무래도 Roddy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물 주기를 해야겠다 싶었는데 해가 질 무렵이 되자 그가 내게 다가와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오늘은 특별히 생선구이를 해 먹자고! 나는 노동 후 먹는 식사의 맛있음 정도는 잘 알기에, 무척 기대가 됐다. 식사 또한 자연스레 함께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생선과 같이 구울 야채를 내가 씻으면 그가 썰고, 다시 내가 접시에 담아서 옮기는 식이었다. 그가 직접 팬 장작에 불을 붙이니 제법 그럴싸한 모닥불이 피어올랐고, 생선을 굽기 시작했다. 무슨 생선인지 물어보니 지중해 바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Sardine, 정어리였다. 석쇠에 구운 정어리는 통째로 먹어도 전혀 비리지 않고 부드러웠다. 바깥에서 먹는 식사는 언제나 몇 배로 맛있는 법인가. 나는 Roddy에게 아까 시킨 일을 잘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아까와 다르게 그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했다. 어떠한 경험을 하더라도 그 끝엔 배움이 있구나.



 모닥불이 다 타들어 갈 때쯤, Roddy는 자기가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간 여행을 하면서 만나온 수많은 외국인들에 비해 그가 너무나 말이 적고 조용하다고 느꼈다. 대화를 주도하는 것도 대부분 나였고, 그 대화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서 혹시나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내향적이라고, 성격이 그렇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더 이상의 걱정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속도에 내가 맞춰가면 되는 거니까. 어색함을 깨기 위해 굳이 말을 걸 필요는 없는 거였다. 적당히, 그저 자연스레 떠오르는 말을 하면 됐다. 우리 의 침묵은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지 않고, 점점 사이사이에 잘 스며들기 시작했다.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자 우리는 와인 한잔을 앞에 두고 앞으로 남은 3일도 잘 지내보자는 훈훈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내가 우프를 하려고 마음먹었던 이유와 배워보고 싶은 것에 대해서도 말하고, 그는 어떤 삶을 살다가 현재에 이르렀는지 말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스위스에서도 살았던 그는 이른 나이에 독립을 했다. 홀로 서기.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기에 이미 큰 용기를 냈던 사람이라 지금 이렇게 더 큰 용기를 내서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현재까지 가족이라는 울타리 밖을 벗어난 적도 딱히 없고, 학교도 집 근처로 다니고 있어서 아직 '독립'이라는 단어가 멀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여행만 잠깐 와도 가족들이 금세 그리워지는데, 여기서 어떻게 혼자 살아가는 건지!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삶을 단순하고 아름답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모든 것을 스스로 일궈왔기에 현재의 삶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있어 보였다. 인생을 사는 방법은 그야말로 너무도 다양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인생을 이끄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점을, 그를 보면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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