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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Aug 10. 2018

로마의 트라스테베레

ITALY


나는 로마의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내내 긴장감을 놓지 못했다. 도착한 날부터 트레비 분수에서 구급차를 보았고, 떼르미니 역에서는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르는 사내와 그를 둘러싼 경찰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소매치기의 악명 때문에 두려웠는데 하루에만 두 번의 사건을 연달아 겪으니 기가 빠지고 말았다. 숙소도 역대급 최악이라고 꼽을 정도로 침대는 비좁은 데다가 푹 꺼져서 불편했고, 이상한 냄새가 났다. 심지어 문 바로 앞에 앉아서 자리를 지키는 삼촌뻘의 직원 아저씨가 느끼한 말을 던지기까지! 그렇게 로마의 첫인상은 잔인할 정도로 나빴다. 그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길 바랐고, 보고 싶은 곳도 딱히 없었다. 로마에서의 마지막 날을 앞두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은희가 트라스테베레와 성 천사 성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별 기대 없이 내일 가보자고 말하며 구글 지도에 표시를 해뒀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보르게세 공원과 스페인 광장 그리고 안젤리카 도서관까지 묶어서 대강 코스를 짜 봤다.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 없었고, 그저 아무 일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로마 중심부를 흐르는 테베레강을 거닐며 그동안 불안감에 휩싸여 제대로 보지 못했던 로마의 진면모를 보게 되었고, 트라스테베레 지구에 들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의 평온이 찾아왔다.


Trastevere


 바로 전날 당일치기로 남부 투어를 다녀와서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내 다리가 삐져나갈 정도로 작은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눈을 떴다. 전날 포지타노와 폼페이에서 보낸 시간들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래, 다시 애증의 로마로 돌아왔구나. 재은이와 지언이는 카스텔 로마노 아웃렛으로 쇼핑을 가겠다고 해서, 오늘은 은희와 둘이 다니기로 했다. 우리는 트라스테베레 일대를 돌아다니기로 결정하고, 떼르미니 역 근처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사실 이날 아침까지도 나의 불안병은 줄어들 생각을 안 했기에 걷는 내내 은희의 곁에 꼭 붙어있었다.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서민 지구인 트라스테베레는 '트라스 강 건너'라는 뜻이었다. 말 그대로 강 건너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최근 들어 현지인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라서 누군가 로마의 연남동이라는 별명을 붙였던데, 과연 사실일지 궁금했다. 몇 정거장 가지 않아서 내리자 테베레 강이 보였다. 녹조가 가득했지만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과 조화를 이뤄 아름답게 느껴졌다. 완벽한 날씨 덕분에 이곳을 지나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가득했다. 평화롭게 흐르는 강가를 바라보고 있으니 기분이 산뜻해졌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침 옆에 있던 이탈리아인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여서 인사도 나눴다. Ciao,  Che bella giornata!


 트라스테레베는 소문답게 힙한 느낌의 동네였다. 오래된 벽면에 위트 넘치는 그라피티가 압도적으로 눈에 띄었다. 낮 시간이라서 그런지 사람도 별로 없고, 조용했다. 우리는 이 ‘거리 미술관’의 골목골목을 돌아보게 되었다. 역시나 국제적으로 통하는 유머 코드인 'Kim'의 얼굴도 있었다. 몸은 발사된 로켓이었다. 깨알 같은 웃음을 선사한 그림들을 보며 거니는데, 어디선가 청아한 종소리가 들렸다. 자동반사적으로 소리를 따라 걸으니 족히 5m는 되어 보이는 높은 담벼락이 양옆으로 그늘을 만들어주었고,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산타마리아 성당(Basilica of Our Lady's in Tratevere)이 나왔다. 바로 앞 분수대가 있는 광장에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한낮을 보내고 있었다. 은희와 나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입을 모아 말했다. 여기, 저녁에 다시 오자.

 

 다시 테베레 강을 지나 성 천사의 성(Castel Sant'Angelo)을 둘러보고, 안젤리카 도서관(Biblioteca Angelica)으로 향했다. 유럽 최초의 도서관이라는 타이틀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해서다. 로마에 있는 유적지나 건축물은 뭐만 하면 최고이고, 최초이고! 도시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은 정말 인정하는 바다. 안젤리카 도서관은 원래는 수도원의 것이었지만, 16세기 말 안젤로 로카라는 주교가 공공에 개방하겠다는 혁신적인 제안을 해 현재까지도 무료로 운영되고 있다. 만져도 될까 싶을 정도로 오래된 양서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근사한 아치 형태의 천장이 고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슬슬 배가 고파져서 판테온으로 이동해 산 에우스타키오 일 카페(Sant' Eustachio Il Caffe)에서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시고, 근처의 안티카 살루메리아(Antica Salumeria)에서 샌드위치를 사들고 보르게세 공원(Villa Borghese)으로 갔다. 공원에서 먹는 샌드위치는 상상만으로도 꿀맛이었으므로! 로마의 장점 중 하나는 곳곳에 수도가 있어 빈병만 있다면 물을 담아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침 이때 걷다가 발견한 수도에서 물을 따라 마셨는데, 도보 여행 중 시원한 물은 빛과 같은 존재다. 사실 로마는 이 지하수 덕분에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고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역시 이날도 늦은 오후까지 무더웠지만 계단과 언덕을 수차례 반복해 오르자 공원의 전망대에 닿을 수 있었다. 기타 연주 소리가 들려왔고, 역시 아름다운 곳에 음악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는 명제가 또 한 번 증명됐다. 이국적인 나무가 무성하게 박힌 보르게세 공원은 온통 푸르렀다. 이곳에서 숨바꼭질을 하면 찾는데 반나절은 꼬박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녁의 분위기를 경험하고 싶어 다시 찾아간 트라스테베레는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고 레스토랑 앞에서 음악 공연을 한다던가, 점원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아페르티보(Apertivo) 와인'을 나눠주며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도심의 활기찬 분위기에 신난 나와 은희는 사람들이 적당히 모여 있는 바에 가서 닭고기 요리와 미트볼을 주문하고, 와인 두 잔도 시켰다. 다양한 언어가 뒤섞인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우리도 로마에서의 나날을 추억하고, 또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생처음 치안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케 한 로마.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지만 그것을 상쇄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매력을 지닌 보물 같은 도시다. 어떤 이는 로마의 유구한 문화유산에 입을 다물지 못했을 테고, 또 다른 이는 미식가로 만들어주는 로마의 맛에 감탄을 했을 거다. 무엇보다도 내게 로마는 트라스테베레로 인해 도시의 인상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이날의 여정이 기가 막히게 완벽했기 때문일까? 트라스테베레, 성 천사의 성, 안젤리카 도서관, 그리고 보르게세 공원. 하루를 가득 채우기에 뭐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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