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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Aug 22. 2018

포르투, 오포르투

PORTUGAL


포르투는 예측 불가한 곳이었다. 나와는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었고, 오래 머물지 않을 터라 일종의 정보수집은 하지 않았다. 제3세계 언어로 느껴진 포르투갈어처럼 포르투는 내게 백지장 같이 하얗고 낯설었다. 로마에서 포르투까지 비행기로 두 시간을 날아왔지만, 공항의 생김새나 분위기는 별반 다를 바 없어서 새로운 나라에 내린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이 도시는 과연 내게 어떤 인상을 남길 것인가? 비릿한 냄새의 항구도시? 달디 단 포트와인의 원산지? 포르투를 '어떤 곳이다'라고 규정하기 위해 온 감각으로 느껴보려 했다. 하지만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포르투는 있는 그대로 멋진, 대단한 도시였다. 걷다 보면 어마 무시한 경사의 언덕이나 수십 개의 계단이 나왔고, 한걸음이라도 헛디딘다면 아찔하겠다 싶은 내리막길이 놓여 있기도 했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지형 때문일까, 거리마다 위치한 공간도 상당히 창의적이고 색달랐다. 어떻게 '이런' 장소에, '이런' 공간이, '이렇게' 존재할 수가 있어?라고 외치게 만들었으니까. 그간 보았던 유럽의 모습들과는 조금 동떨어져서 현실감각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했다. 마치 무한한 영감을 줄 것만 같이 온통 새롭고 실험적이었다!


Porto


 십 일간 이탈리아 일주를 하면서 낯설기만 하던 이탈리아어에 조금은 익숙해지나 했는데, 포르투갈로 비행기를 타고 넘어오면서 다시 한번 새로운 언어를 맞이해야 했다. 포르투갈어까지. 이제는 Ciao가 아닌 Ola, Grazie가 아닌 Obrigada로. 사실 프랑스를 시작으로 서유럽 일대를 여행하면서, 언어의 장벽에 수없이 부딪혔었다. 아무래도 언어를 모르니 역사와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없고, 현지인과의 소통에도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어 많이 아쉬웠다. 다음 나라인 스페인도 포르투갈어랑 비슷한 점이 많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내겐 또 한 번 새로울 텐데, 참 걱정이다. 그래도 이곳에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해 포르투갈을 느껴보련다. 에어비앤비 숙소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가면 됐는데, 포르투의 메트로는 우리나라만큼이나 깔끔하고 체계적이었다. 어렵지 않게 노선을 구분하고, 갈아탈 수 있었다. 숙소는 우리의 기대 이상이었다. Cool In Porto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멋진 집이었다. 전체적으로 모던한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었고, 포르투의 명물인 도우루 강의 야경사진 밑으로 푹신한 침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을 기대하게 만드는 우아한 테라스까지! 더없이 완벽했다. 한껏 들뜬 우리는 후줄근한 공항용 복장에서 각자 챙겨 온 꽃무늬 원피스를 꺼내 들고나갈 준비를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짐까지 내려놓았다면 이제 주린 배를 채울 시간이다. 포르투는 이름처럼 곧 항구도시라서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했다. 이렇게 이름에 정체성을 명확히 나타내는 도시가 또 있을까? 우리는 첫 식사로 문어밥을 먹기로 했다. 통통하고 부드러운 문어가 들어 있는 시큼한 맛의 스튜였다. 한술 뜨자마자 어디선가 먹어본 익숙한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고파서 허겁지겁 먹긴 했지만, 또 먹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았다. 소화시킬 겸 주위를 돌아보는데, 편집숍과 카페 그리고 레스토랑이 즐비한 거리가 있었다. 걷기 좋은 아기자기한 골목길이 많아서 정말 좋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앞에 빈티지 가게가 있길래 들어가 보았다. 계단을 오르던 중에 레트로풍의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와 더욱 기대가 되었다. Tricirculo라는 이름의 빈티지 옷가게 안에는 영롱한 원색의 옷과 액세서리가 가득했다.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옷가지들이 이뤄내는 조화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거기에다 음악을 들려주는 콧수염 난 DJ까지 있었다. 아담한 옷가게에서 디제잉을 하는 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매력적인 공간을 보고 한껏 들뜬 채로 렐루 서점(Livraria Lello)에 갔다가 Base라는 노천 바에 가서 포트와인을 마셨다. 풀밭에 자유분방하게 놓여 있는 나무 의자와 테이블만큼이나 사람들도 자유로웠다.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다 춤추는 사람들도 있었고, 웃음이 넘치도록 사랑을 나누는 게이 커플도 있었다. 바로 앞에는 클레리구스 타워(Clerigos Tower)가 있어 그야말로 자리 좋고, 분위기 좋은 바였다. 첫날의 마무리는 역시 도우루 강의 동 루이스 다리(Dom Luis I Bridge)에서였다. 에펠탑을 설계한 구스타브 에펠의 제자인 '테오필레 세리그'라는 건축가가 지어서 유명해진 다리이다. 강이 있는 도시의 야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도우루 강의 동 루이스 다리를 바라보며 레몬맛 맥주도 한 병 마셨다. 가장 유쾌하고, 자유롭고, 가벼워지는 순간이었다.

 


 새 아침을 맞이해 기지개를 켜며 오늘은 어떻게 보낼까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아직 가보지 못한 볼량 시장(Mercado Bolhao)을 구경하고 해안가에 가서 수영을 하기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는데 굳이 내리막길을 찾지 않아도 걷다 보면 하염없이 내려간다. 그러다 또 비탈진 언덕길이 나오기 일쑤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지형이 만들어진 건지, 지구의 신비다. 지나가다 무심코 눈이 마주친 이발소 안의 아저씨와 눈인사를 주고받으니, 오늘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루를 보낼 것만 같다. 지금껏 다른 나라에서 납작 복숭아를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연중 내내 온난한 기후의 포르투갈엔 있었다. 볼량 시장에 가자마자 과일 가게를 찾았는데 역시나 싱싱한 납작 복숭아가 있다. 봉지 가득 사들고 화장실에서 씻은 다음 바로 먹어 보았다. 듣던 대로 달고 아삭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푸른빛의 아줄레주 문양으로 만들어진 여러 잡동사니를 구경하는 내내 내 손에는 납작 복숭아가 들려 있었다. 결국 구경을 끝마치기 전에 다 먹어버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식사를 하기 위해 La Ricotta라는 맛집에 갔다. 점심에 가면 15유로 안팎의 가격으로 풀 코스를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이다. 애피타이저부터 메인 메뉴, 와인, 디저트, 커피까지. 완벽한 구성에 훌륭한 맛, 저렴한 가격이라 인기가 좋은 곳이라고 들었다. 듣던 대로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예술작품 같은 요리가 연달아 나왔다. 어제도 문어를 먹었지만 오늘 먹은 문어는 스테이크처럼 감자, 시금치와 함께 구워낸 거라 상당히 부드럽고 쫄깃했다. 양도 상당해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흠잡을 데 없는 식당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는데, 은희와 지언이는 포르투 시내를 좀 더 둘러보겠다고 했다. 가보고 싶은 에그타르트 맛집과 카페가 있다면서. 나와 재은이는 아침에 정한 대로 트램을 타고 해안가에 갈 생각이었다. 


 우리는 저녁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해안길에 있는 O Mensageiro 조각상을 좌표로 찍어 보았다. 그리곤 트램을 기다리는데 배차 간격이 긴 데다 대기줄도 있어서, 그냥 자전거를 빌려서 타고 가기로 했다. 트램 정류장 근처에 있는 자전거 렌털 샵에 갔는데, 직원이 내 이름을 보고 농담을 던졌다. Kil이라는 내 성을 보고, 누구를 Kill 했냐며 킬러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동안 생각보다 이름 공격은 안 당했었는데. 내 이름이 이곳에서 유머로 통한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하며 나도 같이 웃었다. 한바탕 농담 대잔치를 한 후, 자전거를 타고 바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재은이와는 전에도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달렸던 적이 있는터라 잘 오겠지-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신나게도 달렸다. 더없이 쾌청한 날씨와 시원한 바람이 행복감을 최고조로 느끼게 만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 헸고,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바에 가서 휴식을 취했다.

 

 어느덧 일몰 시간에 가까워져서 수영을 하기엔 무리인 상황이 되었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재은이와는 계속 좋다, 너무 좋다는 말을 주고받았고 순간순간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했다. 꼭 이럴 때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과 별것 아닌 일에 전전긍긍하고 힘들어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항상 멀어져 봐야 아는 것 같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내가 무리한 일을 꿈꾸는 게 아닐까, 주변 사람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채 떠나는 건 아닐까. 두고 온 것들에 대한 미련과 불안이 이따금씩 떠올라 괴롭고,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눈앞에 놓인 무수한 아름다운 풍경을 목도하니 번잡한 생각은 순식간에 날아갔다. 때로 여행은 '도피'로 시작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안식'이다. 지구의 한 부분에서 좋은 경험을 하고, 함께 나눌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 여행은 삶을 또 한 번 거룩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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