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고 싶은 몽골8, Bayanzag

2주간의 몽골 여행기(2016)

by gil




모든 것이 자유로운 몽골 특유의 분위기와 이를 둘러싼 태초의 자연은 여행자의 기분을 한시라도 잃지 않게 만든다. 맨 처음 몽골여행의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은 누군가의 여행기가 아니라, 단 한 줄의 글이었다. '여름에 떠나기 좋은 나라'라는. 하지만 사전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고, 상상이 불가능한 미지의 나라였기에, 직접 부딪혀야겠다는 생각으로 떠났다. 그래서 매 순간이 새롭고 특별했다. 나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표현하고, 행동하고, 온 감각으로 느끼려 한다. 일상으로 이 마음가짐을 옮겨 간다면 삶에 어떤 변화가 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사색에 잠길 때면 진실한 행복의 아우라가 나를 감싸 안는다. 2016년 7월 9일.




어제 마신 보드카가 아직 혈관 속에서 흘러 다니는 듯 몽롱한 아침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빵과 약간의 과일, 채소가 담긴 아침이 게르로 배달되었지만 입맛이 돌아올 생각은 전혀 없다. 그저께 보드카를 마셨을 때 다음날 속이 괜찮았던 건 안주를 먹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어젠 우리가 마트에서 산 간식들을 같이 먹어서 그런가, 약간의 숙취가 있었다. 다음 여정을 떠나려면 짐을 싸야 했기에 정신을 차렸다. 오늘도 씻는 건 거의 건너뛰기 수준.



점심은 마을에 위치한 식당에서 양고기를 넣어 삶은 만두인 '보즈'를 먹었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육즙이 튀어나와 입 안 가득 양고기 특유의 향이 퍼졌다. 조금 깜짝 놀랄 정도로 비릿한 맛을 겨우 목구멍으로 넘겼다. 몽골인의 주식인 양고기를 사랑해주고 싶었지만 도무지 내 입맛엔 맞지 않았다. 한국에서 이국적인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난데, 몽골음식은 가장 고난도의 코스가 아닌가 싶다. 비단 이는 나에 국한되는 얘긴 아니었고, 서경이와 세희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는 컵라면을 주섬주섬 꺼내 햇반과 함께 먹었다. 동생들도 우리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하나 둘 쟁여둔 컵라면을 꺼낸다. 데이비드와 카린에게도 권했지만 그들은 보즈 한 접시만으로 충분히 배부르다며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숙취로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너는 아주 건강하고 젊은 아이니까 금방 회복할 거야'라며 '옛말에 오히려 술을 매일매일 마시면 몸이 적응을 해서 아무렇지 않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영국이나 한국이나 어느 나라나. 술에 관한 낭설은 모두 똑같은 듯하다.



불타는 절벽이라 불리는 'Bayanzag(바양작)'에 도착했다. 불그스름한 흙으로 이뤄진 절벽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미국의 그랜드캐니언도 이런 모습일까? 세계 최초로 공룡 화석이 발견된 곳이라고 전해지는 이곳은 왠지 모를 신비감이 맴돌았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은 돌멩이도 허투루 보지 않았다. 미끌미끌한 흙의 질감은 이곳이 절벽임을 실감 나게 했다.



뜨거운 태양빛을 질투하듯 더욱 강렬한 바람이 분다. 바람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절벽에 걸터앉아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몽골인들이 눈이 좋은 이유는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살아서가 아닐까. 가까이 보아야 하는 것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적어도 이곳엔.



이제 오늘 묵을 게르로 이동한다! 하루에 한 곳만 둘러보는 '1일 1투어'는 정말 편안하고 여유롭다. 계획에 딱딱 들어맞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기에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 처음에 자유로운 배낭여행의 낭만을 품고 있는 나로서는 투어 프로그램을 신청하는 것 자체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내가 짜는 계획이 아닌 남이 짜둔 여정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몽골의 지리적 특성상 초보 여행자가 이곳저곳 다니기엔 상당한 제약이 따른다.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제대로 된 이정표가 없는데, 어떻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겠는가. 오히려 몽골 현지인의 관점에서 준비한 투어 프로그램을 선택해 맞추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결과적으로는 교통과 숙식에 대한 걱정 없이 나의 상태만 신경 쓰면 되는, 아주 호사스러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여행자로서 느낄 수 있는 해방감과 여유를 맘껏 느끼는 데 커다란 일조를 한 셈이다.



오늘의 게르에 도착하자마자 에르카와 디마는 저녁 준비를 했다. 더운 날씨 탓에 게르 안에 있기 싫었던 우리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푸르공 안에 있었다. 그랬더니 디마가 이곳으로 식사와 차를 가져다준다. 나와 친구들은 여기서 우리가 공주 대접을 받는다며, 디마에게 공주님으로 불러달라는 농담까지 했다. 사소한 것으로도 우리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푸르공 안에서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보니 일몰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구름이 햇살 커튼을 치는 듯 빛줄기가 아름답게 흐드러진다. 구름의 속살 사이로 퍼지는 빛의 조각들이 예술 그 자체였다. 우리는 나무로 만들어진 평상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이 경치를 감상했다. 평상 옆에 꽂혀있는 깃발이 마치 항해를 떠나는 나무배 안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실제로 거센 바람이 불어 우리는 선원이 된 양 행동하고 장난을 쳤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나무판자 아래로 쉽사리 내려올 수 없었다. 누군가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마치 무인도에 떨어진 소년들의 모습 같은 건가. 고등학교 윤리 수업 때 영화로 다 같이 본 기억도 스쳐 지나갔다. 훗날 이 순간도 우리에게 진한 추억으로 남겠지.


오늘 밤은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러시아 카드 게임인 '모쉬크'를 하기로 했다. 처음 배우는 게임이어서 매우 흥미가 돋았지만 에르카가 몇 번이고 설명을 해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15점부터 시작해 0점이 되는 사람이 이기는 이 게임. 원카드를 이용해 같은 모양으로 남의 카드를 따는 게임인데, 시작부터 각자 받은 카드를 확인하고 게임에 참여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 건지 옆에서 지켜봐도 파악이 되지 않는다. 자세한 설명은 더 이상 못하겠다. 우리 중에 제일 잘했던 사람은 세희(서동고). 세희야 우리 좀 다시 알려주라! 꼴찌를 두고 다투던 나(차차)와 서경이(토야)의 승부에서 결국 나의 승리로 끝이 났고. 토야는 벌칙으로 춤을 췄다. 부끄러워하면서 봉을 쓸어내린 너.. 에르카의 광대가 잔뜩 올라간 게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늘의 색이 흑색으로 짙어질 때쯤 우리는 게르로 돌아와 씻을 준비를 했다. 양치를 하다가 한국인들을 보고 반가워서 말을 걸었는데 알고 보니 욜 링암에 다녀온 날 게르에서 뵌 분들이었다. 우리는 그분들이 묻지 않았지만 우리의 안녕과 에피소드를 전했다. 그랬더니 저 아이들이 얼마나 외로웠으면 다른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말을 걸고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저희는 사람들이 정말 좋을 따름인데... 이야기가 오갈수록 빗방울이 게르 지붕에 튕겨나가는 소리가 더욱 경쾌하게 들렸다. 오늘도 서로를 도와가며 물병에 든 물을 손에 부어서 씻고 침낭에서 이른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