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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Aug 23. 2019

아버지를 닮은 나의 식탁: 세계로 한식을 전파하다

집밥에 대한 기억과 확장


아빠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을 물었을 때, 나는 대답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역시나 아빠는, '우리 식구들이 내가 만들어준 요리를 맛있게 먹을 때'라고 답했다. 실로 아빠가 활짝 웃는 모습을 빈번히 목격할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식탁 앞이었다. 아빠에게는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시간이 곧 삶이었다. 


'식구가 왜 식구(食口)겠니. 밥을 함께 먹는 사람이 식구이고 곧 가족이라는 거야. 너희들 하루에 한 끼 정도는 꼭 집에서 먹도록 해. 집밥이 제일 건강하고 좋은 거야. 어디서 이런 정성이 담긴 음식을 먹을 수 있겠어?''

 

아빠의 요리와 함께 밥상머리 교육은 덤이었다. 아빠가 원하는 건 자신의 요리를 먹고 엄지를 치켜드는 나의 기쁜 얼굴이기도 했지만, 다정한 조언과 쓰디쓴 훈계가 오가는 '대화의 장' 그 자체였다. 밥을 먹는 동안 나누는 우리의 대화는 보통의 일상이 주제가 되었고, 때론 잠이 들기 직전까지 끝나지 않는 무거운 고민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세월의 관록이 묻어나는 아빠의 조언과 함께 갓 만든 뜨끈한 국물을 들이켜면, 그만한 하루의 위로가 없었다. 아빠의 식탁에는 늘 사랑이 있구나-하고 깨닫게 되는 그 시간이 정말 좋았다. 


나는 아빠의 밥을 먹으며 성장했고, 그 시간들 덕분이었을까. 나도 아버지처럼 요리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행위를 좋아하게 됐다. 어떤 칭찬보다도 '요리 잘한다, 네 음식 맛있다.'라는 칭찬이 나를 춤추게 했다. 내 마음을, 정성을 알아주는 거 같아서 기뻤다. 아빠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아빠의 주특기인 삼계탕과 각종 찌개 요리는 아직 도전할 깜냥이 못되지만, 불고기나 볶음밥 정도는 뚝딱 해낼 수 있는 정도다. 


그러다 내가 여행에 빠져들면서, 자연스레 외국인 친구들에게도 한식을 선보일 기회가 생겼다. 다른 대륙에서 나고 자라온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를 알아가기에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각자 나라의 식문화를 경험해보는 게 아닐까. 나는 이국의 거리에서, 카페에서, 호스텔에서 그리고 카우치서핑으로 인연이 되어 알게 된 친구들에게 한식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낯선 타지에서 늘 먹던 음식을 마주하는 건 내게도 반가운 일이었지만,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내 요리를 탐미하는 친구들을 보는 일이 참 즐거웠다. 


처음으로 만들었던 한식은 바로 불고기 전골이었다. 핵심 재료인 얇게 저민 소고기와 간장, 양파, 버섯, 파 등은 유럽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다. 더군다나 간장과 설탕으로 맛을 낸 달달함은 외국인에게 그다지 어렵지 않은 맛일 터였다. 그래도 어쨌든 처음은 늘 긴장되고, 걱정이 앞서기 마련이다. 아빠에게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하니, 바로 불고기 레시피를 보내 주신다. 불조심하라는 당부와 더불어. 요리 초보도 쉽게 만들 수 있도록 최대한 간단하게 정리된 아빠의 조리서를 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나의 불고기를 맛본 영국인 친구는, 이런 맛은 처음이라며 자신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깨끗이 비워낸 그릇을 보며 나는 또 한 번 아빠에게 감사했다. 그렇게 얻은 자신감으로 남프랑스에서는 10명이 넘는 프랑스인들에게도 불고기 전골을 대접했다. 


외국인 친구들에게 한식을 만들어 주는 경험이 쌓이고 쌓이자, 그 이후의 여행부터는 한국에서부터 철저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언제든 한식을 대접할 수 있도록 김치, 고추장, 쌈장, 참기름, 김, 깻잎장아찌와 같은 재료를 캐리어의 반이나 채워 갔다. 베를린에서 만난 한 친구는 나의 캐리어를 보더니 곧바로 사진을 찍으며 이 놀라운 광경(!)을 주변 동료들에게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조지아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언니와 오빠도 참기름을 가지고 다니는 애는 처음 봤다며, 혹시 세계여행 중이냐고 했다. 사실 조금 민망할 정도로 길지 않은 여행 기간이었지만, 결론적으로 돌아오기 직전까지 알차게 쓰고 다 먹었다!  

그런데 베를린에서는 만나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이 채식주의자였다. 그럴 때 가장 완벽한 한식은 바로 비빔밥이다. 구운 채소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맛을 낼 수 있고, 무엇보다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채소를 골라서 넣으면 된다. 간단히 먹고 싶을 때는 비빔면을 만들기도 했다. 시중에 판매하는 비빔면에 상추를 넣고, 삶은 계란을 함께 곁들이면 꽤나 그럴싸한 요리가 된다. 비빔밥이나 비빔면을 본 외국인 친구들은 하나같이 형형색색의 비주얼에 감탄했다. 예쁘게 쌓아둔 재료를 젓가락으로 슥슥 비비기에는 아깝다며 망설이기도 했다.


한 번은 요리를 하다가 울컥한 적도 있었다. 조지아에서 만난 친구인 나니네 집에 며칠간 묶는 동안, 나니는 자신과 가족들의 한국 사랑을 끊임없이 보여줬다. 방탄소년단 정국의 얼굴 사진으로 도배된 벽과, 늘 한국 드라마를 틀어놓는 TV, 그리고 한국 음식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본다면, 그 누구라도 그녀에게 한식을 대접하고 싶었을 거다. 심지어 나니의 여동생들과 친구들도 한국의 모든 것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그녀들은 떡볶이 맛이 너무너무 궁금한데, 쿠타이시에는 한식당도 없고 재료도 구할 수 없다는 거다. 내 생각에도 문제는 떡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자 도저히 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마트에서 떡 모양과 가장 비슷한 파스타면으로 떡볶이와, 이제는 나의 주특기 불고기를 만들었다. 주방이 좁아서 시간이 꽤 오래 걸렸는데, 저녁 시간을 훌쩍 넘겨버린 터라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나니의 가족들은 되려 내가 신경 쓰지 않도록 각자 할 일을 하면서도, 중간중간 부엌에 와서 도와줄 것이 없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완성된 요리 앞에서 정말 고맙다며 모두가 내게 따듯한 포옹을 해주었다. 


내가 외국인 친구들에게 한국식 집밥을 선보일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아빠가 물려준 용기 덕분이다. 아빠의 정성이 담긴 요리를 먹고 큰 나는, 세상에도 한국의 식문화에 담긴 정(情)을 알리고 싶었다. 그게 바로 아빠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늘 사랑 안에서 머물 수 있도록 해 준 아빠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독일 베를린에서 테레지아와, 비빔밥 그리고 두부김치 ⓒ 길보경
독일 베를린에서 크리스토퍼와, 비빔국수 ⓒ 길보경
독일 베를린에서 카타리나와, 비빔면 ⓒ 길보경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보현이와, 닭볶음탕 ⓒ 길보경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보현이와, 삼겹살 파티 ⓒ 길보경
남프랑스에서 발레리 식구들과, 삼겹살 ⓒ 길보경
남프랑스에서 발레리 식구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비빔밥 ⓒ 길보경
남프랑스에서 발레리 식구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불고기 ⓒ 길보경
조지아 쿠타이시에서 나니 식구들과, 불고기 ⓒ 길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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