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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Aug 23. 2019

기억의 시작

prologue


여름을 지독히 사랑한다.


누군가는 여름을 피하고 싶은 '죽음의 계절'로 꼽지만, 내게는 '낙원'과 같은 존재다. 여름이 왜 좋냐고? 그 이유를 들고자 하면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한 마디로 말해 여름은 '무엇이든 단순하고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어서 좋아한다. 복장이 가벼워지는 만큼 내 몸도 가벼워지고, 만물이 생동하니 내 정신도 맑아진다. 햇살이 부서지는 바다가 상시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마치 어떤 것이든 할 수 있게 만드는 계절이 바로 여름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동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의 여름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오죽하면 나는 인생의 한 번뿐인 대학 졸업도 굳이 한 학기를 미뤄 8월에 했다.


대학 졸업이란 대학생활의 끝을 의미함과 동시에 곧 사회생활의 시작을 의미한다. 나는 마지막 학기가 시작했을 무렵부터 사회로 나아가기 전 장기여행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경제적 여건이 허락해준다면야 당연히 아시아 대륙부터 아프리카 대륙까지 넘나드는 세계여행을 하고 싶었으나,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로 틈틈이 모은 돈으로는 택도 없었다. 겨울방학까지 꼬박 모아도 최장 3개월 정도 가능할 예산이었다. 대략적인 여행 일수를 정하니, 이제 떠날 시기를 정해야 하는데.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여름이었으면 했다. 아름다운 여름을 지닌 나라는 어디일까. 여름의 해변가에서 와인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면 무지무지 행복할 거야. 재작년에는 와인에 관해 공부하기 위해 남프랑스에 다녀왔었는데, 이번에도 그럴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바다가 있는 곳, 와인을 배울 수 있는 곳..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번 여행의 갈피를 조금씩 잡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심적으로 복잡하거나 답답할 때 찾아가는 곳은 동네 도서관이다. 이번에도 도서관에 가서 여행서적 코너를 차례로 훑기 시작했다. 그러다 발견한 3가지 사실. 독일의 와인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가려져 덜 유명하지만, '리슬링 와인'만큼은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는 것. 조지아는 기원전 8000년 전부터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와인의 발상지'라는 것. 마지막으로 그리스는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의 나라'답게 질 좋은 와인을 합리적인 가격에 맛볼 수 있다는 것. 마침 독일은 전부터 가고 싶었던 도시인 베를린을 품은 나라라서 마음에 들었고. 조지아는 미지의 세계라 탐험 욕구가 일렁였으며, 그리스 하면 떠오르는 지중해의 뜨겁고 푸른 이미지가 좋았다. 그렇게 이번 여행의 모습이 나의 취향과 닮아 구체화되었다.


결국 나는 올해 초여름에 훌쩍 떠나 여름의 끝자락에 돌아왔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리슬링 와인으로 유명한 몇몇 소도시를 돌고 베를린으로 넘어간 뒤, 조지아의 여러 도시를 찍고, 그리스 아테네에서 여정을 마무리 지었다. 오로지 '여름'과 '와인'만이 이번 여행의 동기가 되었기에, 총 75일의 나날 동안 와인을 바지런히 탐미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바다에서 보냈다. 취향을 좇아 떠나는 모험은 유독 느슨하고 부드럽게 흘러갔다.


그러나 시작은 그랬을지라도 끝은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다른 어떤 것들로 가득 찼다. 명징하게 표현하자면, 이번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바닷가에서. 그 어떤 장소에서든 새로운 만남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앞선 여행에선 장소를 옮겨 다니느라 바빴는데, 이번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유랑했다. 나중에 한국행 비행기에서 계산해보니 혼자 다닌 날이 누군가와 함께한 날의 1/8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대부분의 시간을 타지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보냈다는 뜻이다. 정말이지 여행길도 인생길과 마찬가지로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었다. 우연과 인연이 교차해 빚어낸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여정의 군데군데를 아름답게 물들였다.


나는 길 위에서 경이로운 자연과 다정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마주하면서 세상에 대한 경탄을, 존경을 그리고 감사함을 깊이 느꼈다. 그러면서 삶 자체를 긍정하게 되었다. 이 세상은 한번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나의 보금자리로 무사히 돌아온 나는, 여전히 삶을 고민하고 헤매고 부유할 것이지만서도, 두렵지는 않다. 다시 한번 삶을 살아갈 힘을 충전하고 잘 돌아왔으니 말이다.


이번 여행기의 제목을 '여름의 기억'이라고 지어 보았다. 내게 2019년의 여름은, 그 어떤 해의 여름보다도 사랑스럽게 기억되지 않을까. 나의 달콤했던 여름의 기억이 당신에게 닿기를.


p.s 조지아의 작은 해변 마을에서 만난 독일 청년들은 내게 '3G 여행'이라는 제목을 추천했다. 독일, 조지아, 그리스가 영어명 표기로 모두 G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생각지도 못한 우연의 일치에 순간 천잰데? 싶었으나, 5G 시대에 3G를 운운하는 것은 괜스레 뒤떨어진 기분이 든다. G로 시작하는 나라 2개만 더 여행하고 돌아올걸 그랬나.


그리스 아테네 근교 해변의 일몰 무렵 ⓒ 길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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