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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Sep 30. 2019

프랑크푸르트와 르누아르

GERMANY


내게 각인된 프랑크푸르트의 이미지는 르누아르의 그림같다. 이 도시에 머무는 동안 나의 집이 되어주었던 보현이 방의 ‘작은 미술관’ 때문이다. 그녀의 방에는 르누아르의 작품 몇 점이 벽에 매달려 있었다. 한껏 치장한 여인들이 돋보이는 <점심식사 뒤에>와 역시나 화려한 꽃 모자를 쓴 아이가 그려진 <책 읽는 소녀> 그리고 작품명을 알 수 없지만 나체로 추정되는 여인이 잠을 자는 한 폭의 유화. 보현이의 유별난 르누아르 사랑 덕에 나는 그 그림들을 매일같이 보았다. 문 바로 옆에 있었기에 방을 드나들 때마다 수시로 마주쳤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말랑해지는, 아름다운 이미지는 고스란히 프랑크푸르트가 남긴 잔상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하루에도 날씨가 수시로 오락가락했던 이 도시가 내게는 한없이 평온하고 정다웠다.


FRANKFURT


인천에서 베이징, 베이징에서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에서 프랑크푸르트. 최종 목적지인 독일에 도착하기까지 비행시간과 경유시간을 합해 30시간이 걸렸다. 베이징에서는 뜻밖의 우천으로 비행기가 지연되어 예상보다 몇 시간 더 늦었다. 심신이 피로할 만도 한데, 나는 되려 콧노래부터 나왔다. 이 머나먼 땅에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홀로 떠나온 여정에서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어찌나 마음에 힘이 되던지. 나의 오랜 친구 보현이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에 유독 힘이 들어갔다. 공항 화장실에서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보현이는 독일 생활 4년 차 유학생이다. 처음에는 마인츠에서 공부를 하다가, 괴테 대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나와는 고등학생 때 같은 동아리로 활동하면서 알게 되었고, 같은 반이었던 적은 없지만 꽤 가깝게 지내던 사이다. 당시 안경잡이에 교정을 하고 있던 나를 '미국 찐따(이 때는 그 말이 왜 이렇게 화나고 웃기던지)' 같다며 신명 나게 놀려대면, 나 역시도 맞불 농담을 두곤 했다. 학창 시절에 같이 장난치며 깔깔 웃는 게 최고로 재밌을 때가 아니던가.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고 어느 날 내가 독일로 여행을 갈 예정이라고 말했을 때, 성격이 워낙 쿨한 보현이는 단번에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사람 여행은 아무래도 그녀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보낸 일주일 동안 보현이의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녀 덕에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에 눈을 떴고, 함께 행복했다.


Restaurant Kanonesteppel


보현이의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젤너 다리, 뢰머 광장을 비롯한 몇몇 랜드마크를 찍으며 바지런히 돌아다녔다. 이상하게도 시차에 곧바로 적응해 종일 쌩쌩했다. 저녁에는 보현이가 마법 같은 요리 솜씨를 한껏 발휘한 삼겹살 만찬을 맛보았고, 이때 와인을 몇 잔 곁들였더니 결국 씻지도 못하고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보현이는 독일식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나 역시도 현지 음식을 먹어보고 싶었던 터라, 아침부터 열심히 찾아보았다. 여러 레스토랑 중에 우리의 선택은 구글 지도에서 평이 아주 후했던 카노네슈테펠(Kanonesteppel). 난쟁이 집에나 걸려있을 것 같은 독특한 간판을 보고 내부로 들어서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독일 전통 건축양식을 따른 길쭉한 집의 앞마당에 가든 형식의 테이블이 불규칙적으로 놓여 있었다. 분명 건물 안인데 바깥에서 식사를 하는 기분이라고 할까나. 더군다나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로 음악이 따로 필요 없었다. 불특정 다수의 독일어가 여느 음악보다 유쾌한 노랫소리 같았으니. 우리는 슈니첼과 소시지 그리고 사과를 발효시킨 술 '아펠바인' 시켰다. 잘 튀겨진 돈가스 같은 슈니첼과 짭조름한 소시지, 상큼한 사과와인의 조합은 가히 최고였다. 기본으로 나오는 샐러드도 훌륭했다. 무엇보다 양이 넉넉해서 맥주를 많이 마시고 싶다면 둘이서 하나를 시켜도 충분할 것 같다. 우리는 이미 배불렀지만 너무나 좋았던 분위기에 취해 맥주를 한잔씩 더 시켰고, 마감시간까지 수다를 떨었다.



CAFE Amelie's Wohmzimmer


나의 하루는 대부분 그날의 기분에 따라 정해지곤 했다. 앉아서 멍 때리고 싶으면 마트에서 간단히 요기할 음식을 사들고 그뤼네부르크(Grüneburgpark)에 가거나, 걷고 싶으면 마인 강가를 정처 없이 배회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을 곧장 실천했다. 그저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흘러가는 시간을 오롯이 느끼고자 했다. 카페 아멜리에도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갑자기 내리고 싶은 동네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장소다. 늘상 어떤 장소를 발견할 때면, 보통 첫인상이 두 갈래로 나뉜다. 주변 환경과 조화롭게 어우러졌다던가 혹은 혼자만 동떨어져 돋보인다던가. 아멜리에는 아무래도 전자에 가까웠다. 고급진 주택이 즐비한 골목길에 햇노란색의 예쁜 카페라니. 보자마자 탄성이 나왔고, 곧바로 들어가 보고 싶은 욕구가 일렁였다. 곳곳에 보이는 아기자기한 글씨와 그림체가 마치 이곳엔 꽃자수가 놓인 앞치마를 맨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케이크를 굽고 있을 것만 같았다. 소녀의 미소를 지닌 주인아주머니와 인사를 할 마음의 준비를 하며 안으로 들어서자, 웬걸. 아주 단정한 대머리 아저씨가 딱딱한 독일어로 인사를 건넨다. 웃지는 않았지만 꽤나 친절한 인상이었다.(고 믿고 싶다.) 시선을 빼앗는 디저트가 아주 많았지만, 왠지 다음번에 친구와 다시 와서 제대로 먹고 싶은 마음에 음료만 시켰다. 카페인이 들어가지 않은 차를 고르다 보니, 나의 선택은 모로칸 민트 티. 주문을 마치고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는데 말 그대로 'Cozy' 그 자체였다. 아멜리에라는 이름과 카페 분위기가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는지. 오후의 햇살을 한껏 머금은 듯한 밝은 톤의 벽지와 형형색색의 꽃이 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때 보현이에게 잔뜩 흥분한 채로 아주 괜찮은 카페를 발견했다며 실시간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혼자 있을 때는 궁상을 떠는 편이라 보현이랑 오면 디저트를 잔뜩 시켜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재방문을 하리라 다짐했으나, 새로운 시도를 즐겨하는 탐험자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VINTAGE SHOP B74 Selected Goods & Vintage Revivals


사실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났던 사람들에게 나는 이곳에서 일주일을 보낼 거라고 말했을 때, 모두의 반응은 똑같았다. '이 따분한 도시에서? 대체 왜? 이해할 수가 없어.'라는. 다들 하이델베르크나 뷔르츠부르크 같은 근교 도시를 다녀오라고 권하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이 도시의 진면모를 확인하고 싶어 새로운 장소를 탐색하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빈티지샵만큼은 꼭 찾고 싶었다. 처음에 두세 군데를 검색해서 직접 방문해보았지만, 운 나쁘게도 문을 닫았거나 보수 공사로 임시 휴업 중이었다. 좌절감에 포기할까도 싶었으나 이왕 찾기 시작한 거 들어는 가봐야 하지 않겠나!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웠던 두 개의 샵은 바로 B74(B74 Selected Goods)와 VR(Vintage Revivals)이다. 먼저 B74는 남성복 전문 프리미엄 구제샵이다. 대부분이 고가의 브랜드 의류라서 빈티지 느낌은 덜 났지만,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액세서리가 돋보였다. 도로명도 우연인지 운명인지 베를리너 st.인데 한마디로 힙스러운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VR은 빈티지샵이 갖춰야 할 덕목을 착실히 갖춘 곳이었다. 통통 튀는 무늬의 다채로운 옷가지들을 잘 정돈하여 진열해두었다. 곳곳에 커다란 거울과 드레스룸이 있어서 부담 없이 옷을 몸에 대보고, 입어볼 수 있었다. 둘러보면 볼수록 질 좋은 빈티지 의류가 보였고, 대부분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하마터면 이곳에 내 여행경비를 털털 쏟아부을 뻔!




MARKET Friedberger


독일도 영국처럼 마켓의 성지다. 평일과 주말의 구분 없이 지역마다 크고 작은 장이 서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프랑크푸르트에도 여러 마켓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프라이베르거(Friedberger)가 최고였다. 이곳에 가는 길엔 하필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어깨에 한 두 방울 쏟아지더니, 이내 힘찬 비가 내렸다. 아직 입구에 당도하기 전이라 혹시 철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안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켓 위치에 가까워지자, 거의 축제가 열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다들 나무 밑으로 피해 서서 맥주를 마시며 금요일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마침 기적처럼 비가 멎기 시작했고, 하늘색이 천천히 밝아왔다. 우중충한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저마다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 덕에 마켓 분위기는 한층 더 물이 올랐다. 나도 얼른 그들의 분위기에 합류하기 위해 푸드트럭에서 파는 커리부어스트와 맥주를 샀다. 주변을 둘러보니 치즈 마켓, 채소 마켓, 와인 마켓 등등 구경거리가 쏠쏠했다. 유럽의 마켓을 둘러볼 때마다 신기한 것이 사람들이 꼭 어딘가에 앉기보다는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먹는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사람들과 모일 때 주로 식당에서 만나는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문화다. 언제 해도 재밌는 마켓 구경은 이 도시에서 꼭 해봐야 할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밖에도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바로 맞은편에서 카이저 시장(Kaisermarkt)이, 하우프트박헤(Hauptwache) 바로 앞 광장에서는 쉴러 시장(Schillermarkt)이 열린다.




ART MUSEUM Städel Museum


보현이의 강력 추천으로 가게 된 슈테델 미술관(Städel Museum). 르네상스 시대부터 21세기 작품까지 보유한 프랑크푸르트 제일의 미술관이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 르누아르를 비롯한 인상주의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나 역시도 인상주의 그림에 열광하는 터라, 커다란 기대를 품고 슈테델로 향했다. 입장료는 14유로이고, 당시(2019년 6월 기준) 피카소 특별전도 함께 열리고 있었다. 나는 무료 오디오 가이드를 받아 전시관에 입장을 했고, 얼마 가지 않아 예상치도 못한 한 그림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바로 귀스타브 쿠르베의 <파도>라는 작품. 바다의 이미지는 언제나 나를 잡아끌지만, 이번에는 여느 때와 달랐다. 햇빛이 내리쬐는 청량한 파도가 아닌, 무겁고 어두운 물살의 이미지가 지배적인 파도였기 때문이다. 바라보고 있으면 우울감에 빠질 것만 같은 진한 회색빛의 포말이었다. 사실 나는 그림을 비롯해 책, 영화, 음악 등의 모든 문화 장르에서 조금이라도 어두운 느낌을 지니고 있으면 보거나 듣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그냥 내키지 않는 것이다. 내가 향유하는 텍스트나 음성 혹은 영상은 항상 '밝음'을 지니고 있다. 내가 제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슬플 때 슬픈 영화를 보며 더 슬픔을 극대화시키는 경우이다. 나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밝고 유쾌한 영화를 즐겨본다. 그런데 슈테델 미술관에서 뜬금없이 쿠르베의 작품에 빠지게 되다니. 사실 이 작품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전시장을 모두 둘러본 뒤, <파도>가 있는 전시관에 재입장을 했다.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불리는 귀스타브 쿠르베는 프랑스 2월 혁명에 개입하여 베르사유 감옥에서 투옥생활도 한 적이 있는 혁명가였다고 한다. 그의 시선이 담긴 바다는 눈부신 여름보다는 적막한 겨울에 가까웠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던 예술가의 어지러운 내면이 고스란히 표출된 것이 아닐까 싶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파도가 공포감을 조성하기보다는 되려 아름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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