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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Oct 03. 2019

기차로 떠나는 독일 와인여행, 리슬링과 프랑켄 와인

GERMANY


내가 와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스스로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있다. 누구나 하루에 한 번은 먹고 싶은 무언가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가? 아무런 자극 없이 문득 어떤 대상이 간절히 떠오를 때, 나는 그것이 열에 여섯 번은 와인이다. 와인은 상상만 해도 마음이 밝아진다. 우아하고 무궁무진한 색, 맛, 향기! 오감을 충족시켜주는 와인의 세계는 끊임없이 탐험의 욕구를 일렁이게 한다. 무엇보다도 와인이 가져다주는 나른함을 좋아한다. 와인을 마실 때마다 마음이 한층 더 너그러워지는 것 같고, 그러다 보면 내 앞의 상대와의 대화가 한없이 편안하고 느긋해진다. 나는 주로 식사와 가벼운 한잔을 선호하는데, 아무래도 유럽에서 생활하며 그 빈도수가 더욱 늘어난 게 아닌가 싶다. 이번에는 독일에서 유명한 리슬링 와인을 탐미하기 위해 일정을 꾸렸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로 두세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리슬링의 요람인 라인강, 모젤강 지역이 있다고 해서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원래는 프랑크푸르트에 10일가량 머물 계획이었지만 그중 3일을 와인 기차여행에 할애하기로 결정했다.


Trier


와인 여행도 신이 나는데, 기차까지 탄다니. 나는 여러 교통수단 중에서도 기차를 가장 선호한다. 좌석이 널널해 장시간 타도 피로감이 덜하고, 창밖을 구경하면 시시각각 변하는 바깥 풍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독일에서의 첫 기차 여정에 신난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탑승을 마쳤다. 어서 창가 쪽 좌석에 자리를 잡고,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노래(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를 들으며 기분 좀 내야지. 그러나 내 여행의 서사에는 왜 기차를 놓치는 일이 빠지지 않는 걸까? 이번에도 간발의 차로 트리어행(Trier)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아침에 기차에서 먹을 샌드위치만 만들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싶어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었다. 위기도 반복되면 의연해지는지, 잠깐 벙 쪘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우선은 나의 정신적 지주 보현이에게 상황을 알리니 그녀가 신속하게 플랜비를 짜주었다. 기차표를 다시 구매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플릭스 버스를 타고 가라는 것. 다행히 두 시간 뒤에 중앙역 근처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있어서 냉큼 예매했다. 그리고 카우치 서핑 호스트 Gawa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I'm so sorry but shitty thing happened!' 그렇게 Gawa와의 약속시간도 3시간 정도 미루고, 버스 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 근처 공원을 거닐었다. 한낮의 이른 오후의 공원은 참으로 한적했다. 이럴 때 배가 눈치도 없이 고파왔고, 기차에서 먹을 요량이었던 샌드위치를 꺼내 들었다. 사실 트리어로 가게 된 이유는 브런치에서 발견한 하나의 글 때문이었다. 다른 서유럽 국가의 와인 정보에 비해 독일은 턱없이 부족했는데, 한 작가님께서 독일 리슬링 와인에 관해 아주 유용하고 재밌는 글을 쓰셨다. 알고 보니 트리어에 120종 모젤 와인 테이스팅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와인바가 있다는 것! 심지어 고작 19.5유로에 맛볼 수 있다는 것. 작가님께서는 웹사이트 주소까지 친절히 첨부해주셨다. 나도 이 좋은 정보를 공유해 세상을 좀 더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기꺼이 써두겠다.


*왹슬레 와인 운트 피쉬하우스 : https://www.oechsle-weinhaus.de/ 



Gawa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어머니가 직접 구우신 딸기 케이크를 먹으며, 가족들과 인사를 나눴다. 모두 단정하고 예의가 바른 사람들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선 조금은 딱딱한 인상을 받기도 했지만, 절제된 표정 사이로 나에게 질문을 할 때면 이따금씩 반짝이는 눈동자와 옅은 미소를 띠곤 했다. Gawa의 형과 여동생은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또래라서 나눌 이야기가 많았고, 그 속에서 공감되는 것이 많아 금세 가까워질 수 있었다. Gawa의 여동생은 영화에서나 보던 시골 소녀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웃을 때마다 쏙 들어가는 보조개가 레이첼 맥아담스를 연상케 했다. 가족들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뿐이라 서둘러 나갈 준비를 마쳤다. 친절한 Gawa는 트리어 시내로 걸어가는 길에 보이는 유적지와 성당, 정원이 나올 때마다 내게 설명을 해주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트리어에는 로마제국의 흔적이 방대하다. 포르타 니그라부터 로만 바스까지. 작은 도시가 품고 있는 유구한 역사의 규모에 놀라기도 잠시, 골목길에 들어서자 와인바 'Oechsle-wein und fischhaus'가 보였다. 와인 애호가인 Gawa의 아버지는 우리가 이곳에 간다고 말하자, 아주 좋은 장소를 제대로 찾아갔다고 하셨었다. 기대감에 휩싸인 채로 '120종(무한) 시음'을 주문하고 싶었지만, 저녁에 다시 Gawa 아버지의 와인을 마시기로 했기 때문에 '4종 시음'을 골랐다. 가격은 인당 9.5유로였다.

 시작은 샤르도네(Chardonnay brut)였다. 모젤강 지역에서 재배된 포도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으로, 시트러스 향의 풍미가 지배적이었다. 보통 샤르도네는 오크 풍미가 거의 없이 깔끔한 맛이거나, 오크 향과 더불어 크림과 버터의 풍미가 느껴진다. 우리가 맛본 독일산 샤르도네는 전자에 속했다. 다음은 쇼비뇽 그리(Sauvignon Gris)다. 역시 모젤강의 화이트 와인으로 샤르도네보다는 당도가 높았다. 라벨에 'Schloss Thorn'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예전에 성이었으나 현재는 와이너리로 운영된다고 한다.  세 번째는 드디어 모젤의 자랑 리슬링!(Riesling Kabinett Feinherb) 'Bernkasteler Graben'의 리슬링 까비넷은 가볍고 달콤했다. 은은한 꽃내음과 톡 쏘는 산미가 느껴졌다. 마지막으로도 모젤의 리슬링 슈페트레제(Riesling spatlese)를 맛보았는데, 가장 달았다. 입에 머금자마자 혀에 감도는 부드러운 달콤함이 매우 강렬했다. 이곳의 소믈리에가 권했던 와인은 대부분 2016~2018년 산 와인으로, 병당 가격은 15유로 안팎이었다. 아무래도 120종 와인 테이스팅을 해야 좀 더 폭넓은 종류의 와인을 두루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초반에 내가 이 지역에서 생산하는 리슬링 와인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더욱 화이트 와인 위주로 보여주신 것 같았다.


Rudesheim


또 다른 와인의 본가, 라인강 지역에 위치한 소도시 뤼데스하임으로 향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다. 기차로 이동하는 것이 유독 좋았던 이유는 너른 강가와 포도밭을 동시에 구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눈앞엔 동화 속 마을이 펼쳐졌다. 진분홍색의 여름꽃이 피어 더욱 아름다웠던 뤼데스하임(Rudesheim). 적당한 햇살 아래 미로 같은 길목을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와이너리가 보이고, 오래된 서점이 나타나고, 이내 작은 광장이 있었다. 물이 나오지 않는 분수대에 앉아 어느 식당에서 리슬링을 마셔볼까 정해보았다. 하지만 마땅한 곳을 고를 수 없었고, 지나가던 사람에게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관광객을 꽤나 마주쳤기에 이곳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을 잘 찾아야 했다. 어딘가 급히 걸어가는 사람이 현지인이 아닐까? 단발머리를 한 여성분이 내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나는 할로-라는 인사를 건넨 후, 맛있는 식당 좀 추천해줄 수 있냐고 여쭤 보았다. 그녀는 너무 쿨하게도 단번에 식당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식당은 문을 열지 않아서 근처에 있는 식당 중 야외 자리가 아늑해 보였던 곳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자리가 많아 넓은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카레 부어스트와 리슬링 할프 트로켄(Riesling Halb troken)을 주문했다. 트로켄(troken)은 드라이. 할프 트로켄(halb troken)은 드라이와 스위트의 중간. 리블리히(lieblich)는 스위트를 뜻한다. 리슬링은 보통 이 세 가지로 구분하는 듯하다. 리슬링에 관한 가장 큰 오해는 바로 리슬링이 달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급 리슬링은 주로 석유 풍미를 지닌, 매우 드라이한 경우가 많다.   



Wiesbaden


어느 날 보현이는 내게 친구들을 만나러 비스바덴에 같이 가자고 했다. 자신과 가장 친한 독일 친구들을 보여주고 싶다는 말과 함께. 나 역시도 그녀의 베스트 프렌즈가 궁금했기에 따라나섰다. 마인츠에서 함께 공부했다는 보현이의 절친 Lin과 Lia는 또 다른 보현이 같았다. 하나같이 유쾌하고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끊임없이 재잘대며 비스바덴 시내를 거닐었다. 부호가 모여 사는 숲 속의 온천 도시답게 분위기 자체가 매우 우아했다. 비스바덴에서 나고 자란 Lia의 말에 따르면, 비스바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다른 도시에 비해 공격을 덜 받았기 때문에 예전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단다. 깊은 탄성을 내지르게 한 건물은 바로 성 보니파티우스 대성당(St. Bonifatius). 뾰족하게 솟아오른 첨탑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세월이 느껴졌다. 단순히 거대한 규모가 뽐내는 위용이 아니었다. 비스바덴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난 후에, 카페 델 솔(Cafe del sol)이라는 식당 겸 바에 갔다. 공원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피크닉을 즐기는 기분으로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도 역시나 리슬링을 주문했는데, 석유 향과 산미가 짙은 드라이 리슬링이었다. 리슬링 특유의 노란 색감이 산뜻한 풍미를 극대화시켜주는 게 아닐까. 식후에 마시는 한잔이었기에 조금은 달콤했으면 좋았겠지만, 와인은 어찌 됐든 언제나 옳다.



Wurzburg


로맨틱가도의 초입에 위치한 뷔르츠부르크는 프랑켄 와인의 대표 도시이다. 프랑켄 와인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복스보이텔(Bocksbeutel)이라고 칭하는 병의 모양이다. 일반적인 와인병과는 다르게 옆으로 둥근 병의 형태가 낯설고 독특하다. 맛도 외형만큼이나 특이한데, 흙내음이 그윽하다. 독일 전체 와인 중 가장 남성적이고, 신맛이 강하지 않으며, 부드럽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나는 한 번은 레스토랑에서, 한 번은 와이너리에서 구입해 총 두 번을 맛보았는데 굳이 식사와 페어링하지 않아도 단독으로 즐기기 좋았다.

 사실 뷔르츠부르크는 가보았던 독일 소도시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곳이다. 하루로는 이 도시가 가진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치 않았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레지덴츠부터 알테마인교, 마리엔베르크 요새 등 오래 머물러야 할 아름다운 장소가 너무나 많았다. 특히 밤늦게 만난 카우치서핑 호스트 Ruya와 만나서 갔던 시샤바는 잊을 수가 없다. 마치 해변에 온 듯 착각하게 만드는 콘셉트의 인테리어에 레게풍의 음악. 이곳에 반드시 다시 와야 할 명분이 되었다. Ruya에 관한 언급도 조금 하자면, 내 나이 또래의 대학생 Ruya는 나랑 개그 취향이 100% 일치했다. 말과 행동이 거침없는 그녀 덕에 같이 있는 내내 끊임없이 웃었다. 낮에 열심히 돌아다녀 지쳤을 만도 한데, 그녀의 에너지를 받아서 그런지 밤늦게까지 기운찼달까. 한국에 관해 그 무엇도 접해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K pop(정확히는 K hiphop)을 들려주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나의 사랑 재재팩트(Jazzyfact)의 노래들. 다행히 Ruya는 새롭고 쿨하다며 좋아했다. 그녀의 스피커로 Vibra와 ?.!을 들으며 프랑켄 와인을 마시던 순간, 나는 또 한 번 느꼈다. 이번 여행은 내 삶에서 최고로 다정하게 기억될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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