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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Nov 17. 2019

나의 아테네

GREECE


'나의 아테네'를 떠올려 볼 때, 황홀한 지중해의 물빛과 영겁의 세월이 내린 고대 유적지가 머릿속을 맴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테네 사람들의 면면이 선명하게 기억된다. 나는 일주일 동안 거리에서, 화랑에서, 카페에서 다수의 시민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모두 각기 다른 삶의 터전에서 저마다의 철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로부터 그리스의 문화와 정체성을 읽었고, 아테네라는 도시를 매만져 보았다. 가난하고 어려운 국가는 결코 사람들마저 남루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고난을 여유로 헤쳐 나가고 있었다. 환경에 연연하지 않는 풍요로운 정신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들이 가진 힘을 또렷이 자각하자, 내 안에서도 무언가 꿈틀거렸다. 나만의 삶의 철학을 발견하고, 견고히 쌓아 나가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인간된 도리를 하면서 사는 인생이란 무엇인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다. 아테네는 내게 영원한 생(生)의 가르침을 남겼다.


Athens


그러니까 첫 인연의 시작은, 나의 숙소 호스트 Haris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스쿠터로 출퇴근을 하는 직장인인데, 매일 야근을 하면서도 밤이 깊을 때까지 내게 아테네 곳곳을 보여주려 부단히 애써주었다. 그의 비밀장소인 동네 젤라토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과연 끝내주게 신선하고 달달했다), 함께 스쿠터를 타고 리카비토스 언덕을 향해 내달렸다. 우리는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평평한 돌을 의자 삼아 앉았다. 리카비토스는 아테네의 야경을 보기에 더없이 훌륭한 장소이므로, 나 또한 눈앞의 절경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와 아테네 시가지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피레우스 항까지. 포근한 여름밤의 기온과 캄캄한 도시에 수 놓인 금색 불빛들이 내 마음을 환히 밝혀 주었다.


Haris는 대뜸 내게 물었다. '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니?, 너는 '사랑받는' 사람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너의 인간관계는 어떠하니?'와 같은 범상치 않은 질문을 말이다. 보통 물어보기도, 대답하기도 쉽지 않은 질문들이었다. 전날 그와 한 루프탑에서 술잔을 기울일 때에 이미 서로의 이야기를 숱하게 나눈 터라 크게 당황스럽지는 않았지만, 곧바로 답을 말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평소 나의 신념과 인생관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족이 정말 중요한데, 그들로부터 받은 크고 깊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내 인간관계는 넓은 편이야. 서울에서 나고 자라서, 어린 시절 친구들과 대학 이후 만난 친구들이 모두 근처에 살기 때문이야. 그래서 지속적으로, 다양하게 친구들을 만나는 게 가능하지.'


대답을 마치고 내가 역으로 질문을 하자, Haris가 살아온 인생과 가치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본인의 인생을 잘 챙겨나가고 있었지만, 더 나아가 국가의 미래를 위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나갔다.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그리스를 떠나고 있지만, 자신은 이곳에 남아 묵묵히 할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경제 위기나 난민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냉정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음이 분명했다. 똑똑하고 책임감 있는 젊은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자신의 나라에 단단하고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한 번은 그와 대화를 하다가 울컥했던 적도 있다. 그는 곧 떠나려는 나를 붙들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Hope you have a wonderful life. You deserve it.(네가 위대한 삶을 살기를 바랄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 그의 축복의 언사에 나는 순간 아찔했다. 이국의 땅에서 3일간 같이 지낸 사람에게 이런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말을 듣다니. 우리의 만남과 이별, 숱하게 흩어지는 모든 순간은 과연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Haris가 내게 남긴 말은 메모장에 써두고 언제든 용기를 얻고 싶을 때 꺼내 읽고 싶었다. 과연 그가 빌어준 행운 덕택이었을까. 이곳에서의 일주일은 기적처럼 온갖 행운이 넘쳐났다.



아크로폴리스에 오르려다, 무섭게 타오르는 더위에 플라카 지구로 방향을 튼 날이었다. 나는 초입에 있는 한 화랑에 더위를 피할 겸 들어갔다. 언뜻 보아도 수준 높은 그림과 조각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찬찬히 둘러보는 내게 화랑의 주인이 말을 건다. 내게 아테네에 며칠간 머무는지, 계획이 있는지 묻더니 자신이 꼭 봐야 할 박물관을 몇 군데 추천해주겠다고 한다. 다 둘러보기엔 일주일도 부족할 정도로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다고 덧붙이시면서. 그러더니 키클라데스 박물관, 비잔티움과 그리스도교 박물관 등을 빼곡히 적어서 건네주신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섬인 '스키아토스 섬'에 *표시까지 해두셨다. 이때 나는 생각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영어를 매우 잘하고, 외국인에게 놀랍도록 친절하다고. 그런데 이것은 '친절한 아테네인 에피소드'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리스인들은 손님에게 대접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자신들의 나라를 보러 와준 손님들에게 매우 호의적이라고! 이것은 실로 사실이었다. 지하철에서 만난 한 아테네인 아저씨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고라 광장 방향의 지하철역 출구로 가던 중, 뒤에서 누가 나를 부르기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 아저씨께서는 자신은 여행자들에게 무료로 '도시 가이드'를 해주는 사람이라며, 관심이 있으면 자신이 잠시 워킹 투어를 해줘도 괜찮겠냐고 하셨다. 내 눈빛에 경계심이 가득했는지, 원치 않는다면 내가 향하고 있는 곳의 길만 알려주고 가겠다고 하셨다. 아무리 보아도 영 이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사람이 많은 장소이기 때문에 설령 무슨 일이 일어나도 곧장 도움을 청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동행하기 시작했다.


아고라 광장으로 향하는 동안 아저씨는 아테네의 주요 유적지를 중심으로 역사와 문화를 열정적으로 설파하셨다. 오랜만에 교양 수업을 듣는 기분이었다. 제목은 <그리스의 문화와 예술> 영어 버전 정도. 그의 또박또박한 발음과 까랑한 목소리가 절로 집중하게 만들었고, 잠시라도 내가 한눈을 팔 수 없게 이따금씩 질문을 던지셨다. 우리는 성사도 성당, 필로파포스 언덕까지 둘러보고 잠시 헤로도토스 극장 앞에 앉았다. 그의 흥미로운 강연은 끝내 본인의 철학관으로 나아갔다. 자신은 '스토아학파'에 가깝다며, 개인적으로는 '자기 신뢰'를, 사회적으로는 '적극적인 참여의 실천'을 강조하셨다. '그리스 사람들은 다 이렇게 내면의 철학이 견고한 사람들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몰래 속으로 웃었다.


그리스인 아저씨는 참으로 선량한 '철학자'였다. 그는 섬에 갈 계획이 없다는 내 이야기를 기억했는지, 아테네에서도 섬의 분위기를 잠시 느껴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했다. 바로 아나피오티카였다. 이곳은 가는 길부터 무척 요상하고 재미났다.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래로 아주 좁다란 골목길을 지나고 또 지났다. 마치 이 길의 끝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을 것만 같았다. 끊임없이 구부러진 길을 오르고, 내리면서 몸을 자주 접었다 폈다. 그러다 한 주택 앞에서 멈춰 섰는데, 고양이 때문이었다. 회색, 갈색, 검은색 등 각기 다른 생김새의 고양이들이 이 골목길을 점령하고 있었다. 고양이의 시선을 따라 나도 주변을 빙- 둘러보는데, 순간 천진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상상 속에 존재하던 그리스 섬의 일부가 마법처럼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얀 담벼락의 집집마다 꽃이 피어 있었고, 오래된 벽화가 그려져 있기도 했다. 숨 죽이고 있으면 이 마을 사람들이 일상을 보내는 소리가 들려온다. 설거지하는 소리, 물을 끓이는 소리, 빗자루질을 하는 소리 등. 아나피오티카에는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일몰을 보는 것으로 여정을 마무리했다.


이 밖에도 내가 만났던 관대하고 여유로운 아테네 사람들이 여럿 있다. 그리스 식당의 주인 부부, 요구르트 카페의 웨이터, 플라카 지구의 소품 가게 상인들, 거리에서 도움을 주고받았던 몇몇의 시민 등. 나는 여행자의 신분으로 한정된 시간 동안 수많은 현지인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들의 환대가 나의 여행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정의 곳곳엔 그들의 얼굴이 남아 있다. 나는 이 경이롭고 감사한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그리스에 오기 전까지 이곳은 내게 아무런 연고가 없는 머나먼 타국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난 이후로, 그들의 안녕을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고단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제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그들을 관찰하고 느낀 전부다. 한국에 돌아와 유시민 작가의 신간을 읽는데,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은 <유럽 도시 기행 1>에 실린 내용의 일부다.  



마지막 밤, 불 밝힌 파르테논과 리카비토스 언덕 꼭대기가 보이는 식당에서 아테네를 생각했다. 철학과 과학과 민주주의가 탄생한 고대도시. 일천오백 년 만각의 세월을 건너 국민국가 그리스의 수도로 부활한 아테네는 비록 기운이 떨어지고 색은 바랬지만 내면의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었던 어제의 미소년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은 끝에 주름진 얼굴을 가진 철학자가 되었다고 할까. 그 철학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큰 소리로 말하지 않고, 오래된 양복에 가려진 기품을 알아볼 책임을 온전히 여행자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 <유럽 도시 기행1>, 아크로폴리스 야경을 즐기는 만찬 中



'순간으로 영원을 산다'. 그리스 아테네를 여행한 후, 나는 이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실감했다. 아테네에서의 모든 순간이 나의 내면에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언제나 촛불처럼 마음의 불을 밝혀주고, 때로는 연료가 되어 다시금 나를 타오르게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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