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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Nov 17. 2019

수니온의 달빛

GREECE


하얗고 환한 밤이다. 아주 맑고 명랑한 달빛 때문이었다. 포세이돈의 신전이 있는 수니온(Sounion)곶으로 향하는 내내 선명한 보름달이 차의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날짜를 확인하니, 8월 14일이었다. 대보름날을 앞두고 달은 차오를 대로 차올랐다. 그리스 아티카 반도의 최남단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생각했다. 한국에 있는 나의 가족들도 이 만월(滿月)을 올려다보았을까? 나를 보고싶어하지는 않았을까? 하필 신의 성전을 목적지로 두어 눈앞의 크고 둥근달이 더욱 신묘스럽게 느껴질 따름이다. 아니,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이 실체 없는 환상 같다. 숙소 호스트인 Giannis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Giannis에게 넉살 좋은 사촌 Vasilhs가 집에 놀러 와 있지 않았더라면, 우리 셋의 짧은 로드트립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테고. 나는 절대 수니온 곶에, 그것도 여행의 마지막 날, 닿지 못했을 거고. 달빛만으로도 세상이 이렇게 환할 수 있다는 것을 목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행의 이유는 그런 점에서 탄생한다. 예기치 못한 순간의 연속과 인연의 교차. 여행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삶처럼 뜻밖이고, 찬란하다. 나는 길 위에서 경이로운 자연과 다정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마주하면서 세상에 대한 경탄을, 존경을 그리고 감사함을 깊이 느꼈다. 그러면서 삶 자체를 긍정하게 되었다. 이 세상은 한번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나의 보금자리로 돌아간들 여전히 삶을 고민하고 헤매고 부유할 것이지만서도, 두렵지 않다. 여행의 순간을 기억한다면 다시금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기에.


아테네에서 차로 1시간 남짓 달려 수니온에 도착했다. Vasilhs가 가져온 CD로 노래를 틀고, 수다를 떨면서 오니 금방이었다. 영어를 매우 잘하는 Giannis와 달리 기본적인 의사소통만 가능한 Vasilhs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열심히 이야기하고 끊임없이 웃는다. 그의 유쾌한 성격이 모두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웃음소리는 어찌나 독특하고 호탕한지, 흉내 내고 싶어도 절대 흉내 낼 수 없었다. 그가 말을 더듬거나, 비문을 구사해도 Giannis는 그런 Vasilhs를 너그럽게 봐주자는 듯 내게 눈짓을 보낸다. 뒷자리에 앉은 나는 그들의 뒤통수에 대고 함께 웃었다.   


수니온 곶 입구에 있는 식당을 지나 멀리서 포세이돈 신전을 바라보았다. 달의 흰빛은 바다의 그림자를 밀어내더니, 포세이돈 신전까지 가닿았다. 절벽 위에 우뚝 솟은 신전이 에게 해(the Aegean Sea)를 당당히 지키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배경이 눈앞에 실재하고 있다니. 나조차도 이렇게 아찔한 경이감이 드는데, 그리스인들에는 얼마나 깊은 문화적 자부심을 느끼게 할까?


Giannis는 아크로폴리스를 못 보았어도, 여기에는 왔으니 이제 좀 나를 용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아테네에 일주일을 있는 내가 아크로폴리스에 올라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고, Giannis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내게 화까지 냈다. 어떻게 아테네의 상징이자, 그리스를 방문하는 모든 이들의 목적이 되기도 하는 그곳에 가보고 싶어 하지 않냐며. 나는 아테네의 골목길 그리고 근교의 바다를 자유롭게 돌아다닌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답했다. 정말 그랬기 때문이다.


사실 아크로폴리스 근처까지는 몇 번 가보았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입장 줄과 높다란 경사를 보고, 마음을 접었다. 가뜩이나 더워 죽겠는데 돌기둥을 보겠다고 몇 시간을 기다리며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 Giannis는 내 말을 듣고 실소를 터뜨리더니, 그러면 우리의 마지막 밤을 수니온 곶에서 보내자고 제안했다. 그곳이 아크로폴리스의 미니 버전이라며.


우리는 수니온 곶 근방의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작은 돌산을 넘고, 넘어 에게 해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에 다다랐다. 탁 트인 광경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역시나 달빛이었다. 만물을 환하게 비추는 그 달빛. 바다에 햇빛이 반짝이는 광경은 수도 없이 봤다. 하지만 수면 위로 달빛이 부서지는 장면은 처음 보았다. 각자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오로지 파도만이 세상의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불빛 하나 없는 곳이었지만 달빛이 있어 친구들의 옆얼굴이 보였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요를 깨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나의 내일을 떠올렸다. 나는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 며칠 전만 해도 오늘이 되면 아쉽거나 서운한 마음이 들 줄 알았는데, 이쯤 하면 됐다는 생각이 우선했다. 지금 이 순간이 완벽하게 느껴져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충분히 아름답고, 감사한 마지막 마무리. 나는 수니온의 달빛 아래서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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