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IA
대한민국의 보물이 김치라면, 조지아의 보물은 바로 와인이다. 그저 와인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사실만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지아 와인이 한국의 김치처럼 조지아 사람들에게 각별한 존재라는 것은, 조지아에 도착한 지 며칠 만에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집집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만든 와인이 있고(집에서 직접 술을 담그는 것도, 지역마다 양조 방식에 차이가 있는 것도 김치와 비슷하지 않은가!) 도처에 와인 가게가 널려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지아에서 마주한 동상이나 건축물 등에는 포도나 와인잔이 꼭 들어가 있다. 조지아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마치 포도 줄기의 형상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 조지아인에게 와인이란 어떤 존재인지 느낌이 올 것이다. 나는 조지아인의 '삶'과도 같은 와인을 매일 보고 느끼며, 자연스레 조지아 와인 예찬론자가 되었다. 조지아 와인에 대한 호기심은 나를 포도밭으로, 양조장으로, 와인 가게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조지아 사람들은 내게 극진한 환대를 베풀어주었다. 어찌나 정이 넘치던지, 그들의 선량한 마음씨는 여행의 박자를 한결 느슨하게 만들었다. 와인잔을 부딪히며 보내던 무수한 밤이 심연처럼 느껴질 때면, 이렇게 기록을 해서라도 붙잡아 두고 싶다.
나는 말로만 듣던 조지아의 와인을 양조장 투어에서 처음으로 맛보았다. 파브리카 호스텔에서 만난 현지인이 조지아에서 와인의 본고장은 카헤티(Kakheti) 지방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마침 아르헨티나 친구 후안이 그 지역의 와이너리 투어를 예약했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른 아침, 기사 아저씨와 가이드가 함께 동승한 8인용 봉고차를 타고 카헤티로 향했다.
카헤티 주에서 ‘사랑의 도시’라는 낭만적인 별명을 지닌 시그나기(Sighnaghi)에 도착했다. 첫 번째 양조장이 이곳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양조장 주인은 우리를 시그나기의 전경이 펼쳐진 테라스의 식탁으로 안내했다. 이내 그녀는 말간 색깔의 와인병을 품에 소중히 안고 와, 조지아의 와인의 기원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 와인병에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이미 나의 손은 와인잔의 기둥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배운 몇 가지를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조지아 와인은 8000년의 역사를 지녔고, 2013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크베브리(Qvevri)'라는 항아리를 땅에 묻어서 와인을 숙성시킨다.
3. 조지아어로 와인은 그비노(Ghvino)인데, 이것이 이탈리아로 가서 비노(Vino)로 변화했다.
4. 조지아 와인은 재배 포도 품종만 500여 종이 넘는다. 가장 유명한 품종으로는 사페라비(Saperavi), 킨즈마라울리(Kindzmarauli), 무쿠자니(Mukuzani) 등이 있다.
5. 와인 양조 후 남은 찌꺼기를 발효시켜 차차(Chacha)라는 높은 도수(약 70도)의 술을 만든다. 조지아 사람들은 와인만큼이나 차차를 사랑한다.
조지아 와인은 실로 남달랐다. 시그나기의 풍광이 아름다워서 혀가 착각을 한 것은 분명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우선 처음으로 마셔본 치난달리(Tsinandali)는 카헤티 지역에서 생산되는 르카치텔리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드라이 와인이었다. 신선한 모과향이 지배적이었고, 바닐라향이 옅게 느껴졌다. 두 번째로는 사페라비(Saperavi)라는 조지아 대표 레드 드라이 와인을 맛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조지아 와인의 정수(精髓)인가 싶었다. 포도와 오디 그 중간 어딘가의 맛이 났으며, 드라이 와인치곤 달달했다. 아마 숙성기간이 2년 가까이 되어 탄닌이 부드러워진 게 아닌가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차차를 건네받았는데, 살짝 혀를 데보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한 모금 정도 마셨고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경험했다. 매우 독한 알코올 향과 맛이 아찔했다. 나는 조지아에서만큼은 기절하고 싶지 않으니(과거의 파란만장한 전적이 몇 번 있다), 적당히 마시겠다고 말하며 차차잔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조지아인에게 와인은 국가적 유산이자 삶 그 자체다. 모든 이가 와인 이야기를 할 때면 한껏 상기된 얼굴이 되어서는 잔부터 건넨다. 우리 가족의 특별한 양조법으로 만든 와인이라며, 일단 맛보라고 한 뒤에 잔이 비면 곧장 채워준다. 조지아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와인을 만드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고 자라서 그런지, 대부분 와인 지식이 해박하고 주량이 상당하다. 와인 종주국답게 술을 잘 마시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또한 술이 있는 곳에 음악이 빠질 수 없듯이, 이곳 사람들 또한 한껏 흥이 오른 상태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즐긴다. 이런 점은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에 타마다(Tamada)라는 재미난 음주 문화도 있다. 타마다는 건배 제의자라는 뜻으로, 자리에 함께 사람들의 인사말과 건배자의 순서를 정한다. 사람들은 번갈아가며 타마다가 되는데, 깐지(Kantsi)라는 소뿔 모양 잔에 와인을 따르고 건배사를 읊는다. 건배사의 길이엔 제한이 없어서 때론 지겨울 정도로 길게 말하는 진상 타마다(?)가 있기도 하단다. 하이라이트는 바로 건배!라는 조지아어를 외치는 순간이다. 가오마르조스(Gaumarjos). 술자리의 분위기가 고조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크게, 자주 외친다. 가오마르조스, 가오마르조스!
와인과 함께 주로 곁들이는 음식은 므츠바디(Mtsvadi)라고 불리는 바비큐다. 러시아의 샤슬릭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는데, 돼지나 닭고기를 포도나무 장작으로 구워낸다. 여기에 조지아 사람들이 즐겨먹는 특제 소스를 함께 먹는다. 바비큐와 와인의 조합은 맛이 없을 수가 없지. 삼겹살에 밥을 꼭 같이 먹는 나는, 아쉬우려던 찰나에 이 마음을 금방 달래줄 빵을 발견했다. 쇼티(Shoti)라는 빵인데 조지아인들의 식탁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다. 화덕에서 구워 향이 아주 고소하고, 쫄깃하니 맛이 좋다. 사람들은 아침마다 작은 빵집에서 갓 구운 쇼티를 사 가곤 했다. 프랑스에 바케트가 있다면, 조지아에는 쇼티가 있다.
조지아에서 마셔본 와인 중 단연 최고는 드래프트 와인이다. 커다란 은색의 원형 통에서 페트병에 따라주는 생(生) 와인은 우리나라의 담금주와 맛이 비슷하다. 복분자나 오디주처럼 매우 깊고 진한 맛이 특징이다. 마실 때마다 입안 가득히 퍼지는 포도향이 매우 청량하고 달콤했다. 내가 갔던 와인 가게에서는 대부분 킨즈마라울리나 사페라비를 드래프트 와인 형태로 팔곤 했다. 특히나 킨즈마라울리 통에서 갓 내린 와인이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식사와 곁들이든, 단독으로 마시든 상관없을 정도로 훌륭한 맛이었다. 1리터 용량에 단돈 12라리, 우리나라 돈으로 따지면 6000원의 행복이다. 어깨에 담이 오더라도 한국에 대여섯 통은 들고 오고 싶었는데, 다른 유리병 와인까지 합치니 고작 한 병밖에 못 챙겼다. 소중한 조지아 생 와인을 아버지께 선물로 드렸더니 나직이 한마디 하신다. 이거 마시러 조지아 가야지, 안 되겠다!
조지아 와인은 내게도 보물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와인이 말 그대로 사람을 만나고 문화를 배우는데 완벽한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와인을 매개로 스쳐간 수많은 사람 중 가장 기이하고 아름다웠던 인연이 떠오른다. 바로 '지노(Jino)'와의 비현실적인 만남 그리고 재회. 생각만 해도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진다. 나는 어느 날 조지아인 친구 오토(Otto)의 차를 얻어 타고 함께 계곡에 놀러 갔다. 그런데 차바퀴에 자갈이 끼는 바람에 길 한복판에 멈추고 말았다. 주위에 도움을 요청해야 되는 상황이라 나와 오토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친절한 조지아 사람들은 즉각 도와주었지만, 아무리 해도 자갈길에 전복된 바퀴가 빠져나올 생각을 안 했다. 바퀴 밑에 깔린 자갈을 손으로 빼내기도 하고, 다른 차에 줄을 달아 견인하듯 끌기까지 했는데 도통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땀범벅이 된 우리는 경찰에 전화할 겸 잠시 쉴 곳을 찾기로 했다.
근처에는 슈퍼와 와인 가게가 있었다. 오토는 내게 연신 미안하다며, 이제 따라오지 말고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그때 지노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우리를 보고 호기심 어린 얼굴로 다가왔다. 오토와 조지아어로 상황을 주고받더니, 그가 통화를 하러 자리를 뜨자 내게 말을 걸었다. 날도 더운데 자신이 일하는 와인 가게 안에서 쉬라며. 나는 와인 가게에 그냥 앉아 있으면 뻘쭘한 분위기가 될 거 같아서 와인을 구경해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의 취향을 묻더니 몇몇 와인을 골라 테이스팅을 권하고,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소믈리에처럼 맛이 어떤지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중 괜찮았던 와인을 한병 사고 싶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돌아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나의 속마음을 읽은 건지,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선물로 주겠다고 했다.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괜찮다고 거절했는데, 이걸 받으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고 했다.
그 후 대화를 조금 더 주고받았는데, 알고 보니 그는 나와 같은 도시인 바투미(Batumi)에 살고 있었다.(당시 나는 바닷가 근처에 한 달간 아파트를 빌려 거주하고 있었다.) 바투미에서 차로 50분 정도 걸리는 이곳에 주말마다 일을 하러 온다고 했다. 나는 바투미에서 자주 가던 카페 이름을 대며, 혹시 거기 아냐고 물으니 지노도 친구들과 모일 때면 그곳에서 만난다고 했다. 안 그래도 오늘 밤에도 갈 거라며 언젠가 거기서 다시 보자고 했다. 나는 흔쾌히 좋다고 말했지만, 서로 연락할 수 있는 그 어떤 수단도 주고받지 않았기에 다음번 만남은 기약이 없었다.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또 만나겠지. 지노 덕분에 오토와 그 와인을 나누어 마시며 함께 기분전환을 했고, 말도 안 되는 평생의 추억이 생겼다며 깔깔댔다. 그리고 정말로 조지아를 떠날 시기가 다가왔다.
그리스로 가기 전날, 기념품으로 살 만한 게 있을까 싶어 한 서점에 찾아갔다. 구글 지도가 알려준 길을 따라 휴대폰에 코를 박고 걸어가는데, 거의 다 와서 고개를 들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지노가 벽에 기대어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나만큼이나 놀란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너무도 반가웠던 나머지 격한 포옹도 나눴다. 어떻게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냐며. 나는 그에게 언제 카페에 갔었냐고 물었는데, 하루 차이로 엇갈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의 대화 후 다시 갈 길을 가려는데, 그가 인스타그램 계정을 물었다. 이제는 연락책이 생겼구나. 나는 그에게 내일이 나의 마지막 날이지만 혹시 기회가 된다면 잠깐이라도 보자고 말한 후, 서점으로 향했다.
작고 귀여운 열쇠고리를 고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재회에 웃음이 났다. 때마침 지노에게 메시지가 왔고, 앞으로 두 시간 정도 시간이 있는데 자신의 집에 초대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가는 길에 와인 한 병을 사서 선물로 줄 요량이었다. 곧이어 그가 차로 나를 데리러 왔고, 집 근처 슈퍼에 함께 들렀다. 그러더니 그가 와인 두병과 초콜릿을 고른다. 나는 계산대에서 재빠르게 돈을 내밀었는데, 그가 대차게 거절한다. 그러면서 주인아주머니께 자신의 카드로 해달라고 말하는 듯싶었다. 이번엔 내가 내고 싶다고 해도 그는 완강했다. 심지어 한 병은 오늘 같이 나누어 마시는 용이고 나머지 한 병은 내 기념품이란다. 내가 얼빠진 표정으로 움직이지 않자, 그는 이게 바로 조지아인의 환대라며 넉살 좋게 웃었다.
나는 아테네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인연을 맺은 조지아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이국의 여행자에게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들의 얼굴을. 이들에게 받은 환대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환대는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하고 말했다. 앞으로 내게 주어진 몫은 환대가 지속되도록 동참하는 일일 것이다. 나도 누군가의 여정에 포근함을 더하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트빌리시 뉴 와인 페스티벌 The New Wine Festival
https://www.winesgeorgia.com/site/event-detail/97
-9월에서 10월, 즉 포도 수확 시기에 조지아를 방문한다면 와인 양조 체험도 가능하다.
-포도 품종: 르카치텔리(Rkatsiteli), 사페라비(Saperavi), 므츠바니(Mtsvane), 초리코우리(Tsolikouri)
-레드 와인: 킨즈마라울리(Kinzmarauli), 무쿠자니(Mukuzani), 사페라비(Saperavi)
-화이트 와인: 마나비(Manavi), 트비시(Tvishi), 치난달리(Tsinandali), 알라자니 밸리(Alazani Valley), 피로스마니(Pirosma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