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IA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 대학을 다니는 4년 내내 계절에 상관없이 학교부터 집까지 걸어 다녔다. 2.8킬로미터 정도라 가볍지 않은 거리지만, 그렇다고 지칠 만큼의 거리도 아니었다. 감사하게도 학교에서 집까지 걷는 길은 재미가 쏠쏠했다. 홍대에서 연남동 그리고 연희동까지. 지독하게 화려한 상권을 지나 한적하기 짝이 없는 동네로 들어서는 그 과정이란. 드라마틱한 길의 서사가 참 마음에 들었다. 매번 지나치는 골목길에 조금씩 변화를 주면서, 새롭게 생겨난 카페나 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노포를 구경하곤 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들에 정신이 빼앗긴 채로 두 다리를 휘적거리고 나면 어느새 집이 보이는 언덕에 올라있다. 숨을 고르고 나면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힘이 샘솟았다. 이 습관이 쌓였기 때문인지 나는 늘 일정량을 걸어야 직성이 풀린다. 아무 일정이 없는 날에도 반드시 밖으로 나가서 산책을 해야 한다. 매일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처럼 걷는 행위는 내게 평생의 과업이다. 여행지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더 많이 걷는다. 어쩌면 나는 끊임없이 걸을 수 있어서 여행을 떠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도 없이, 목적지 없이 걸어 다닐 때가 가장 즐겁다. 그런 점에서 바투미는 내게 최적의 도시였다. 바투미 내에서 웬만한 곳은 모두 지척에 있었다. 십 분 만에 바다에 닿을 수 있고, 바닷가를 거닐다 보면 공원이 나오고, 공원을 따라가면 번화가가 나타난다. 이 사실은 곧 아침에 수영을 하고 나서, 공원의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점심거리를 사러 시장으로 향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바투미(Batumi)는 아드자라(Adjara) 지역 최대의 항구도시이자 휴양지이다. 흑해를 품은 이 도시는 터키의 국경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조지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데, 트빌리시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도시의 설계도를 펼친다면 한 나라가 맞나 싶을 것이다. 풍경은 물론이요 거리의 분위기마저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바다의 유무겠지만, 놀라운 점은 바투미가 트빌리시보다 더 도시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고층 건물이 즐비한 신도시의 모습. 트빌리시가 역사를 품은 문화수도라면 바투미는 한창 개발 중인 경제수도 같았달까?
바투미의 흑해도 별나기 그지없다. 물살이 어찌나 거센지, 파도가 밀려오기 전에 들어가지 않으면 자빠지고 만다. 물살에 자꾸만 뒤로 밀려나는 나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잽싸게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나는 파도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한 탓에 주먹만 한 돌들에게 공격을 당했다. 돌로 이뤄진 바닷가는 모래가 없어서 쾌적하지만 자칫하면 다칠 수도 있다. 아까 한 해변의 상인이 젤리슈즈 같은 투명한 신발을 팔던데, 괜히 파는 것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흑해의 강력한 물살에 허우적대던 나도 차츰 몸으로서 적응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피부도 점점 갈색빛이 되어갔다.
트빌리시의 9 에이프릴 가든(9 April garden)만큼이나, 바투미에도 훌륭한 공원이 있다. 이름도 비슷한 6 메이 파크(6 May park)다. 공원의 중심에는 너른 호수가 있다. 이 타원형 모양의 호수를 둘러싸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원과 아쿠아리움도 있다. 6 메이 파크에서 내가 가장 애정했던 자리는 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진 호숫가였다. 바다와는 또 다른 물빛을 보며 한낮의 평온함을 느끼곤 했다. 이곳의 호수는 맑은 날이면 구름을 담았다가, 이내 석양을 품고, 별까지 받아주는 넉넉한 마음씨를 지녔다. 완벽한 운치를 즐기기에도, 여름의 무더위를 식히기에도 더없이 좋은 장소다.
유럽 광장(Europe Square)은 바투미 시내를 걷다 보면 반드시 지나치게 되어있다. 중심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위치 놓여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현지인과 관광객이 모여들지만, 그에 비해 앉을 공간이 충분하지는 않다. 그렇기에 이곳을 늘 스쳐가듯 지나갔는데, 주변의 건축물이 매우 특이하게 생겼었다. 어떤 건축양식이라곤 규정지을 수 없게, 건물마다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특히나 파스텔톤의 타일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건물은 감탄이 흘러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외벽의 일부만이 색채를 지녔기에 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다. 유럽 광장을 선명하게 기억하도록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근방으로 있었던 멋진 공간들이다. 소위 바투미의 젊은이들이 가장 주목하는 공간이 한 골목길에 다 모여있었다. 레코드판이 간판을 대신하던 바이닐 바(vinyl bar)라던지, 하늘에 뜬금없이 진분홍색 올드카가 매달려있는 케이투(K2), 지하공간이 숨어있던 캑투스 바(Cactus bar), 간판도 없고 의자도 없이 술을 마시는 휘게 바(Hygge bar)까지. 어쩌면 이렇게 유일하고도 기발한 곳들이 사이좋게 줄지어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투미에서 최고로 뽑을 수 있는 멋진 공간은 바로 카페 콘테(Cafe Conte)다. 매주 새로운 현대미술 전시가 열릴 뿐만 아니라, 주말이면 DJ를 초대해 작은 야외공연을 연다. 나는 이곳에 삼일에 한 번꼴로 방문해 낮에는 식사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저녁에는 와인을 마셨다. 숙소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길목에 위치해있어 접근성이 좋았고, 브런치 메뉴가 내 입맛에 꼭 맞았다. 이밖에도 어떤 음료를 시키든 실패란 없었다. 콘테의 주스나 디저트는 맛은 물론이고 시각적 즐거움도 충족시켜주었다. 무엇보다 콘테는 바투미에서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반 회화부터 사진, 일러스트 등 다채로운 분야의 기획 전시를 맛볼 수 있다. 언제나 활기 가득한 이 공간이 영원히 바투미 사람들의 사교장으로 남아있었으면.
바투미에서 라이브 공연을 보고 싶다면, 소로 바(Soro Bar)를 찾으면 된다. 소로 바는 분명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는 표현에 부합하는 곳이다. 실로 갈 때마다 황홀경에 빠지고 말았으니. 첫 순간부터 느낌이 좋았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나는 당시 영국의 전설적인 락밴드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노래 가삿말이 적힌 천가방을 매고 있었는데, 소로 바 내부는 온통 핑크 플로이드의 사진과 앨범이 가득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행운의 전조 현상이었나? 나는 술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공연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협소한 크기 덕에 음악가의 숨소리와 미세한 움직임마저 생생히 전달되었다.
이윽고 밴드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음악 소리에 맞춰 색소폰을 불기 시작하더니, 맞은편에 앉은 이가 잼배를 치고, 또 다른 누군가가 마이크를 뺏어서 노래를 하기 시작한다. 누가 아티스트고 누가 관객인지 구분할 수 없는 출중한 실력이었다. 영화 같은 상황에 설마 이게 연출된 쇼인가 싶어, 조지안 친구에게 물어보니 원래 이곳은 이렇게 즉흥 공연이 자주 일어난다고 했다. 아마 저 사람들은 다음 공연을 할 사람들일 확률이 크다는 말과 함께. 인류에게 음악이 없었으면 대체 무슨 낙으로 살았을까 싶게, 사람들의 표정에는 행복이 넘쳐흘렀다.
돌이켜보면 바투미는 한마디로 '종합선물세트' 같은 도시다. 휴양지답게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가 한데 모여있다. 특히나 구시가지(Old Boulevard)에서 신시가지(New Boulevard)로 이어지는 해안가에 말이다. 그중에서도 나의 관심을 사로잡은 곳은 아담한 크기의 오두막이었다. 연속적으로 놓여있던 이 오두막의 정체는 일회용 헤나 가게였다. 화려한 문양이 가득한 시안을 둘러보다가, 혹시나 내가 하고 싶은 모양대로 할 수 있는지 물었더니 가능하단다. 나는 타투가 아니더라도 의미 있는 그림을 몸에 새기고 싶어 잠시 고민을 했다. 결국 진주조개와 라일락을 팔에 새기기로 했고, 결과적으로 매우 흡족스러웠다. 다행히 아무런 부작용 없이 2주 동안 유지가 되었다. 일회용 헤나는 바투미에서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 영화관: Cinema Apollo
- 서점: Books in Batumi
- 식당: 조지아 음식 Ajarian House, Heart of Batumi, Acharuli Khachapuri Center/ 아시아 음식 Sushi Go, New asia/ 간편식 MCshawarma , Ramini's shaurma/ 커피 Rhino Coffee/ 아이스크림 Lucas Polar Gelato
- 대형마트: Carrefour Batumi
- 쇼핑몰: Metrocity Mall
나는 바투미에서 한 달을 넘게 머무르며, 이 도시에 맞는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 나갔다. 우선 도시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발품을 부지런히 팔았다. 궁금한 점이 생기면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았고, 현지인들에게 직접 묻기도 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적응해 나갔다. 일평생 혼자서 살아본 적이 없는데, 조지아 서쪽 끝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스스로도 좀 어이없었다. 집을 구하는 일부터 매일의 끼니를 해결하는 일까지. 한순간도 쉽다고 느껴지진 않았지만, 삶의 터전을 잡는 일은 아니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시도할 수 있었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조지아어도 차츰 익숙해졌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네/아니오' 같은 기본적인 언어는 꼭 조지아어로 하려고 노력했다. 그중에서도 '감사합니다'라는 뜻을 지닌 마들로바(Madloba)는 입에 달고 살았다.
나는 35일이라는 한정적인 시간 동안 여행자와 생활자의 경계를 오갔다. 사실 대부분의 나날은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창밖의 하늘이 맑으면 바다로 수영하러 가고, 흐리다면 근처 카페로 향하는 식이었다. 딱히 꼭 이루고자 했던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한 날도 허다했다. 그저 여름을 만끽하며, 무념무상의 상태로 푹 쉬었다. 바투미로 오게 된 계기는 하나의 사건 때문이었지만(이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자세히 서술할 예정이다.), 이 결정을 평생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바투미는 내게 각별한 경험을 선사했고, 안정적인 생활을 가능케했다. 바다를 품은 도시에서 일상을 가꾸어 가는 일은 언제 또 해볼 수 있을지 모를 '달콤한 도전'이었다. 바투미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면, 나는 꼭 고마웠다고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