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IA
무지로부터 비롯되는 감정은 크게 두 가지다. 공포 혹은 호기심. 다행히 나의 경우는 '여행지에 관한 무지함'이었으므로, 내겐 후자의 감정이 조금 더 넓은 폭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지아라는 나라를 여행하기 전에 얻을 수 있는 정보라곤 매우 한정적이었다. 서점에서 조지아를 단독으로 다룬 가이드북은 없었고, 인터넷에서조차 엇비슷한 정보만이 존재했다. 이러한 점이 오히려 조지아에 반드시 가봐야겠다고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이 나라를 오로지 내 육신으로 몸소 느끼고, 발견해야 했기에 호기심이 나날이 더해졌다. 그렇다고 이동을 자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제나 내 관심은 문화와 사람들이었기에. 한두 도시에 오래 머물며 사람 사는 모습을 관찰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 자연스레 녹아들고 싶었다. 과연 45일간의 조지아 체류가 나의 내면에 어떤 자국을 남길까?
트빌리시는 조지아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다. 그러나 트빌리시는 깨끗하게 정비된 대도시는 아니었다.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가 혼재된 모습이랄까? 때론 유럽 같고 때론 동남아시아 같고 때론 인도 같았다. 전반적인 모습이 낙후되었다고 해야 할지, 덜 발달되었다고 해야 할지. 이따금씩 예상을 벗어나는 곳에 위치한 전위(前衛)의 건축물은 또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헷갈리게 만드는 도시였다. 그중에서 트빌리시의 '파브리카 호스텔(Fabrika Tbilsi Hostel)'은 가히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혁신의 중심으로 거듭나고 있는 이 독특한 건물을 말이다. 호스텔 건물이 달라봐야 뭐 얼마나 다르겠냐고 물으신다면, 잠시 심호흡을 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보시길.
트빌리시, 아니 조지아 전체에 유일한 이 파브리카 호스텔은 존재 자체가 귀하다. 단순히 '숙소'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 문화공간'으로서 존재한다. 하나의 드넓은 공간 안에 호스텔, 아트 스튜디오, 코워킹 스페이스, 바이닐 상점 그리고 다수의 카페와 레스토랑 등이 모여있다. 이곳에서는 매주 각기 다른 장소에서 이벤트, 파티, 예술 워크숍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저마다의 특색을 지닌 공간을 구경하다 보면,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한 장소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파브리카 호스텔에는 무엇보다 각지에서 흘러오는 여행객과 더불어 현지인이 모여드는데,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새롭고 유일하다는 인상은 비단 이방인의 것만은 아닌 듯하다. 매일 저녁마다 한껏 멋을 부린 조지아 젊은이들을 마주할 수 있었으니. 트빌리시의 대표 관광 명소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이곳을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한 현지인의 입에서 답을 구할 수 있었다. 트빌리시 출신의 그녀는 조지아의 한 백만장자가 벌인 짓(?)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 사람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것이, 파브리카 호스텔 안에 들어서는 순간 밖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브리카에서는 완벽한 동행도 만났다. 아르헨티나의 두 청년 페데리코(Federico)와 후안(Juan). 내가 방을 못 찾고 헤매고 있을 때, 그들이 기적처럼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는 같은 방이었다. 내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남미인의 성격을 고스란히 지닌 페데리코와 후안은, 밝음의 에너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하고 있었다. 둘 다 성격이 굉장히 좋다는 것은 말 한두 마디만 섞어봐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나의 캐리어에 붙어있는 태극기를 보고, 내가 한국인인걸 눈치챘단다. 순간 태극기까지 알아볼 정도면 한국을 얼마나 잘 아는 거야? 싶었는데, 회사에 한국인 동료가 많다고 한다. 그러면서 알고 있던 한국어를 총동원해 내게 '한국어 폭격'을 한다. 조지아에 도착하자마자 외국인과 모국어를 나누다니.
더 놀라웠던 것은 그들도 오늘이 첫날이라고 한다. 조지아 첫 방문, 첫날, 첫 숙소. 페데리코는 이제 우리는 한 팀이라며 나가서 놀자고 했다. 나는 아직 짐도 못 풀었는데, 하며 캐리어를 열었다. 그런데 세상에. 내 캐리어는 온통 참기름 투성이었다. 화들짝 놀라 통을 꺼내드니 뚜껑이 살짝 뒤틀려있었다. 눅진하게 젖은 옷가지며 책은 그렇다 치는데, 다름 아닌 냄새가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호스텔 방안에 서서히 퍼지는 고소한 냄새. 유쾌한 두 친구는 장난스레 내 티셔츠를 집어 들며 코를 막는 시늉을 하며 웃는다. 나는 선물용 김이라도 주고 싶었는데, 그곳에도 이미 참기름 범벅이다. 나는 너희 먼저 나가 있으라고 등을 떠밀고, 우선 냄새가 더 퍼져 나가지 않게 세탁해야 할 옷가지를 모았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처리한 후, 그나마 참기름의 공격을 받지 않은 흰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페데리코와 후안은 참으로 장난기 넘치는 친구들이었다. 인생에서 '재미'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들처럼 끊임없이 농담을 하고, 장난을 친다. 분위기 메이커인 이들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지사. 덕분에 나도 다정한 사람들을 스쳐가듯 많이 만났다. 밤새도록 나눈 대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페데리코와 후안의 직업이 항공 승무원이라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경기 침체는 젊은이들을 해외로 떠나게 만들었고, 이들 역시 카타르 항공사에 취업해 세상을 돌고 있다. 이들에게 현재의 직업에 만족하냐고 물으니, 카타르의 라마단 기간에 소고기를 못 먹는다는 사실만 제외하면(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소고기 소비량은 전 세계 1위다) 매우 만족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전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들의 직업이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변화시켰다고 한다.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떠도는 삶을 사니, 오롯이 현재를 즐기는 것에 가치를 두게 됐다고. 그러면서 그가 나지막이 한마디 내뱉는다. 'Carpe diem(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 여행의 속성 중 하나가 현재를 충실하게 살도록 하는 것인데, 이 말은 곧 이들이 일을 여행하듯이 하고 있다는 것일까? 한국에 돌아가면 직업을 구해야 하는 나로서 '삶을 여행하듯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했다. 과연 어떤 일을 하든 마음가짐에 따라 삶을 여행처럼 영위할 수 있을까. 복잡해지려는 머릿속을 단번에 정리되는 분명한 사실은, 우선 지금 이 순간부터 즐기는 게 내 몫의 일이라는 거다.
*파브리카 트빌리시 공식 홈페이지 (https://fabrikatbilisi.com/)
아르헨티나에서 온 두 청년이 내게 남긴 메시지는 트빌리시의 한 변두리 카페에까지 닿게 했다. 원래 다른 루프탑 카페를 찾아가는 길이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외관에 발길을 멈췄다. 근방으로는 연갈색의 심심한 건물 밖에 없었는데 별안간 파스텔톤으로 가득한 카페가 나타나다니? 홀로 타들어가는 촛불처럼, 유난히 생생하게 빛나는 곳이었다. 좁은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노래와 나른한 향기에 곧장 매료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카페 이름이 카르페 디엠이다. 가게의 현판을 보자마자 이건 운명이다 싶어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메뉴판을 살펴보니 커피뿐 아니라, 각종 술과 간단한 음식도 팔고 있었다. 나의 선택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다행히 조지아 사람들도 아이스커피를 즐겨 먹나 보다. 가파른 언덕길에 위치해 있는 이 카페를 일몰 무렵에 찾아온다면, 교회의 십자가 뒤로 해가 내려앉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우연히 초저녁 시간에 머물렀던 나는 성 삼위일체 대성당(Holy trinity cathedral)의 꼭대기가 붉게 물드는 풍경을 보았다.
트빌리시는 특이한 지형 구조를 지녔다. 포르투갈의 리스본이나 포르투를 연상케 하는 돌길이 많았다. 경사도 비슷해서 자칫하면 미끄러지지 않을까 종종걸음으로 비탈진 언덕을 오르곤 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재미난 지형에 신이 나서 계획 없이 걸어 다녔다. 나리칼라 요새(Narikala Fortress)로 오르는 길이 보였고, 유황온천이 있는 공중목욕탕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 눈길을 사로잡는 네온사인을 발견했다. 편지지 모양 밑으로 'HOME'이라고 쓰여 있었다. 붉은색의 간판 밑으로 그림들이 불특정 하게 그려져 있었다. 수상한 건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입구로 들어서자 직원이 '가마르조바(안녕하세요라는 뜻의 조지아어)'하며 나를 반긴다. DJ 공연을 보러 왔냐며, 아직 준비 중이라 바에서 술을 마시면서 기다리라고 한다. 들어보니 이곳은 그림을 사고파는 전시장이자 공연장이었다. 아는 사람만 올 것 같은 장소라는 느낌이 들어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내 복장이 너무 단출하기도 했고, 홀로 공연을 즐기기엔 부담스러워 짧은 대화만 나누고 곧바로 나왔다. 'Fotografia'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사진 위주의 전시를 주로 하는 갤러리이다. 홈과는 달리 평지에 위치한 이곳은, 새하얀 벽과 검은 액자의 조화가 두드러진다. 평일 한낮에 방문하니, 전시장을 지키고 있는 한 사람 외엔 아무도 없었다. 적요함이 작품을 한층 더 고결하게 만들었다. 작은 종이에 작가, 작품명과 함께 가격이 쓰여 있는 것을 보니 전시보다는 판매에 초점을 둔 갤러리인 듯싶다.
트빌리시에는 크고 작은 공원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공원은 리케 파크(Rike park)이다. 평화의 다리(Bridge of Peace)를 건너편에 있기도 하고, 규모가 제일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트빌리시를 대표하는 공원이 9 에이프릴 가든(9 April garden)이었으면 좋겠다. '도심 속 공원'으로서 더없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머리 위로 높이 솟은 울창한 나무와 넉넉한 의자는 이곳을 찾아오는 모두가 은둔자가 되어 편히 쉴 수 있도록 돕는다. 나는 격일에 한 번씩은 이 공원에 가만히 앉아서 쉬어 가거나, 책을 읽었다. 한 번은 까르푸에서 추르첼라(Churchela)를 사서 먹기도 했다. 추르첼라는 조지아인의 국민 간식으로, 포도즙에 밀가루를 넣고 다려서 아주 끈적끈적하게 만든 다음에 견과류를 넣어 말린 것이다. 보기에 조금 흉측할진 몰라도 꽤 맛이 있다.
'4월 9일'이라는 유별난 이름엔 비극적인 이야기가 숨어있다. 1989년 4월 9일에 조지아의 민간인 평화 시위 도중 러시아의 무장세력에 의해 해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 후 1991년에 조지아는 러시아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러시아와 정치적인 문제는 여전하다. 내가 머물던 시기에도 마침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어, 광장에서 시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 남일 같지 않은 일에 괜히 시위대 사이를 헤매기도 했다. 부디 이 땅에도 평화가 찾아오기를.
트빌리시 시내를 조망하기 위해서 케이블카를 타고 나리칼라 요새(Narikala fortress)나 므타츠민다 공원(Mtatsminda park)으로 향해도 되지만, 루프탑 바 360에서도 도심의 경치를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쿠라 강으로 둘러싸인 올드 트빌리시와 교회, 다리 등과 더불어 머리 위로 오르내리는 케이블카도 하나의 풍경이 된다. 굴곡진 트빌리시의 모습을 보다 보면 시선을 거두기가 어렵다. 도시의 단면마다 각기 다른 모습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감히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는 색다름을 지녔다. 루프탑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훌륭하기 때문인지 음식값은 여타의 현지 식당과 비교했을 때 2배 이상이었다. 그래 봤자 유럽에서 한 끼를 먹는 수준과 동일했다. 나는 조지아의 관대한 물가 덕에 조금 사치를 부려보았다. 치킨 스테이크와 로제 와인. 늘 그랬듯 혼자 먹는 저녁은 함께하는 것에 비해 맛이 덜하지만, 식당의 분위기가 좋아 꽤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트빌리시에서 느낀 문화 충격 중 하나는 횡단보도가 없다는 것이다. 2주간 단 하나의 횡단보도도 목격할 수 없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길을 건너냐고? 그들에겐 지하보도가 있다. 하지만 너무 비경제적이었다. 길을 건너기 위해 저 멀리 지하보도를 향해 빙 돌아간 적이 여러 번이었다. 가끔 사람들과 눈치싸움을 하며 무단횡단을 하기도 했는데, 절대 시도하지 마시길. 대부분 4차선, 5차선 도로라 매우 위험하고, 조지아도 사람보다는 차가 우선인 나라처럼 보였다. 재밌는 사실은 오래된 독일차나 일본차가 뒤섞여 다니는데, 핸들의 위치가 정반대라서 운전하는 이도, 곁에서 지켜보는 이도 혼란을 느낀다. 이런 상황이니 도로의 무법자가 활개 하는 것은 당연하다. 미친 듯이 가속을 하는 운전자가 너무도 많았다.
대중교통이 매우 잘 발달해있는 우리나라에서 평생을 지내온 나로서는, 조지아의 대중교통에도 넌더리가 났다. 버스나 지하철의 시간은 불규칙하고, 노선도 복잡했다. 버스는 매번 설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버스비는 0.5라리, 우리나라 돈으로 250원 정도였다. 저렴한 가격 때문에 최대한 대중교통을 이용했지만, 택시를 한번 이용하고 나자 그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없었다. 택시비도 대중교통에 비해서는 훨씬 비쌌지만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20분 이상 타도 5000원 안이었다. 대부분 10분이면 목적지에 닿았기에, 혼자여도 택시를 타고 다니는 것이 시간과 에너지 절약 면에서 훨씬 경제적이었다. 결국 트빌리시에서는 대중교통보다는 택시를 주로 이용했다. 대표적인 택시 어플로는 얀덱스(Yandex)나 볼트(Bolt)가 있다. 현지인들은 주로 얀덱스를 사용했다. 우버처럼 카드를 등록해두면, 현금이 없어도 언제든지 편하게 택시를 부를 수 있다.
트빌리시의 물가는 정말 사랑이다. 무엇보다도 마트에서 식자재를 구입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과일을 양손 무겁게 사고, 우유와 치즈 그리고 약간의 생필품까지 샀는데 만원도 안 나왔다. 하긴, 식당에서 메인 요리에 와인 한잔 시켜도 7~8000원 정도 했으니 생활 물가는 더욱 저렴한 게 당연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과일은 너무나 저렴했다. 사실 한국에서는 과일이 워낙 비싸 내 돈 주고 사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과일 없이 못 사는 내게 이곳은 천국이었다. 만나는 조지아 사람들에게 조지아의 신선하고 다채로운 과일 예찬을 늘어놓으니, 네가 한국에서 왔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거란다.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니, 우크라이나는 이보다 과일이 더 싸다고!
조지아의 음식은 러시아와 터키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해있다. 지리적으로도 위로는 러시아, 아래로는 터키를 두고 있는 만큼 식문화에서도 꽤나 큰 영향을 주고받는 듯하다. 조지아 전통 음식 중에서 만두인 낀깔리(Khinkali)가 러시아의 만두와 똑같이 생겼고, 길거리 음식 중에서는 샤우르마(Shaurma)라는 음식이 터키의 케밥이랑 비슷하게 생겼다. 입맛에 가장 잘 맞았던 건 조지아 피자인 하차푸리(Khachapuri)와 버섯을 치즈에 넣고 오븐에 구워낸 소코 켓제(Soko ketse)였다. 조지아의 우유맛이 정말 기가 막혔는데, 그래서인지 치즈 요리는 다 맛있었다. 참, 아이스크림도. 조지아 아이스크림과 젤라토는 지금껏 먹어본 아이스크림 중에서 맛으로는 단연 일등이다. 구멍가게에서 사 먹는 것이든, 젤라토 가게에서 사 먹는 것이든 다 최고였다. 깊은 풍미와 신선함은 이탈리아를 잊게 만들 정도다.
트빌리시와 서울의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도시에 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트빌리시에는 쿠라 강이 흐른다. 녹조가 가득해 색이 탁하지만, 멀리서 볼 때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다. 강변의 산책로는 따로 없으니, 가까이에서 강을 보고 싶다면 보트를 타면 된다. 평화의 다리 근처에서 보트 호객꾼들이 장사를 하는데, 조지아산 와인을 한잔 마시며 강가를 둘러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속는 셈 치고 한번 타보았는데, 야경을 보기에 더없이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이 모일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한 20분 정도 강가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유리로 만들어진 평화의 다리가 가까이서 투명하게 반짝이다가도 이내 점차 아득해졌다. 명멸하는 다리를 눈으로 좇으며 쿠라 강의 한복판을 내달릴 때의 감정은 복잡미묘했다. 조지아에서의 나날이 향후 내게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하니 아찔했다. 이 여행이 끝까지 안전하기를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