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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Apr 26. 2020

눈 내리는 시작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삶


하필 그날, 늦겨울의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회사로 첫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집을 나서자마자 신발끈 위로 자잘한 비누거품 같은 눈송이가 달라붙는다. 온 정신이 '무사한 출근'에 쏠려 있었으므로, 눈이 와서 든 생각이라고는 '부디 이 눈 때문에 길이 막히지 않았으면'하는 바람뿐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전 일곱 시 삼십 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이렇게 이른 시간에는 나와본 게 얼마만인지. 새로운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는 동네의 작은 출판사에서 알바를 했었던 터라, 여덟 시 반이 넘어서야 집 밖을 나설 준비를 했었다. 이제는 그보다 한 시간 반 정도 일찍 일어나도 간신히 도착할까 말까 하겠구나. 아, 호시절은 다 갔다.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차디찬 바람인지, 이제 나도 직장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엄중함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밀려오는 긴장감에 한숨을 쉬고,  쉬었다. 직장인이라는 단어가  삶과 포개지는 것이  이리 비현실적으로 느껴질까. 가슴께에 내려앉은 눈송이만이 내게  모든 것이 현실임을 일깨워주었다. 회사로부터 합격 소식을 전해 들었을 , 사실 희열과 동시에 절망을 경험했다. 희망했던 부서가 아닌,  부서로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막중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이제  삶의 대부분을 맡길 새로운 보금자리.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중요한 전환점. 아직 내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꿈꾸던 직장생활을 맞이하게 될까? 하지만 결국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했던가. 무엇이든 경험해보아야  안에서 배움과 깨달음을 얻을  있다. 그렇기에 뛰어든 새로운 세계였다.


본사에 도착해 경영지원팀과 만나 연봉 계약서와 복지 제도 등의 행정 사항을 처리하고, 사장님을 만나 뵈었다. 면접 때도 뵜었는데, 은은한 너그러움과 선량함을 지닌 사람 같다는 인상을 또 한 번 받았다. 사장님은 내게 짧은 인사말과 함께 책 한 권을 건네셨다. 회사의 경영 원칙과 마음 자세 등을 담은 일종의 지침서였다. 이게 바로 출판사다운 직원 교육 방식이구나, 싶어 속으로 몰래 웃었다. 사장님께서는 행복, 그중에서도 '나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당부하셨다. 직장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도, 결국은 스스로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며. 회사가 '행복'이라는 두 단어를 경영 원칙의 일 순위로 두었다는 것이 내가 이 회사에 지원하게 된 동기이기도 했다.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서만 살아간다면, 삶의 의미는 별로 중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기에, 매 순간 의미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은 행복을 느끼고, 삶의 목적을 향해 다가간다고 믿는다.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창밖을 보고 나도 모르게 탄복을 하였다. 싸라기 같던 눈이 어느새 소복이 쌓여, 한 폭의 풍경화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북촌 한옥마을의 지붕을 덮은 눈을 보며, 훗날 나의 첫 출근길을 회상할 때 절대로 '눈'을 빼놓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한 하루를 다소 포근하게 만들어 주겠구나 하는 생각도. 새로이 둥지를 틀 공간을 둘러보고, 몇몇의 선배님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눈은 계속해서 흩날렸다. 앞으로의 생활이 결코 만만하지 않겠지만, 새로운 시작에 차근차근 적응해 보려고 한다. 부디 겨울이 봄이 되고, 봄이 언젠가 다시 겨울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계절이 지나가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절이 되기를 바라며.  


*앞으로 종종 출판사 신입사원의 생활담을 모아서 올리려고 합니다. 아마 다음 글은, 징징대다가 끝날지도 모르겠어요.


ⓒ David Hock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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