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What 두모공(Dumogong)
Where 제주시 한경면 두모11길 49
Detail https://booking.stayfolio.com/places/dumogong
Mood 제주의 한적함을 오롯이 담아낸 집
서울에서 제주로, 다시 제주 공항에서 서쪽으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를 이동했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눈앞에 야자수, 귤밭, 푸른 바다가 부드럽게 펼쳐졌다. 살아있는 풍경을 마주하니 잠들어 있던 감각이 열리는 듯했다. 이 남녘의 땅에 신묘한 힘이 있나 보다. 불과 두어 시간 전만 해도 회사에 있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순간 결심했다. 서울에서 풀어야 할 복잡한 일은 모두 던져두고, 지금 이때를 온전히 즐겨야겠다고.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제주에서는 그래야 마땅했다.
서쪽에 다다를수록 바다 위로 대형 풍차가 연이어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평화로우면서도 어딘가 이국적인 풍광이었다. 찾아보니 이 길은 '신창 풍차 해안도로'로, 바람을 통해 에너지를 얻기 위한 해상풍력단지라고 한다.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는 풍차를 눈으로 좇다 보니 금세 제주시 한경면에 도착했다. 한경면 두모리에 위치한 나의 숙소 '두모공'은 어촌 마을의 끝자락에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한눈에 두모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주위의 낮은 집들과는 다르게 홀로 우뚝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벽돌이 붉은 색인 점도 한몫했다. 두모리의 고요한 골목길을 걸으며, 숙소와 가까워지자 어서 가닿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현관에는 '제주집 두모空'이라는 글자와 함께 작년에 제주 건축문화대상을 수상했다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집 입구로 들어가기 전에, 마당으로 나아갔다. 마당에서는 층층이 쌓아 올린 돌벽과 그 너머로 보이는 바다 그리고 창연히 솟은 풍차들이 보였다. 이 모든 요소들이 두모공을 '제주를 오롯이 품고 있는 집'으로 만드는 듯했다.
두모공(空)은 두모리의 빈 공간이라는 뜻으로, 조용하고 자연과 가까운 원래의 제주 공간 안에서 휴식하고 충전하기 위한 집이라고 한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 차분히 누리는 휴식이라서 이 말이 곱절로 반갑게 다가왔다. 집은 마당을 포함해 총 3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주 전통집의 모거리/ 밖거리/ 안거리의 성격을 채용해 각 층을 위로 쌓았다고 한다. 기준 인원은 5명인데, 최대 7명까지 머물 수 있었다. 전반적인 집의 구조를 살펴보니 대가족이 머물기에 충분하고 효율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함께 공간을 나누면서도, 층마다 독립적으로 공간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1층은 주방, 큰 테이블, 화장실, 마당과 연결된 테라스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방문한 내게 마치 선물과 같은 트리와 루돌프 인형도 있었다. 내부를 제대로 둘러보기도 전에, 또 다른 선물(?)이 등장했다. 마당에서 뛰놀고 있던 고양이. 집에 들어오고 싶은지 계속 소리를 냈다. 문을 열어주자, 냉큼 들어와 우리의 몸과 짐을 샅샅이 훑었다. 고양이 녀석이 이 집의 진정한 주인인가 싶을 정도로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이름 모를 이 귀여운 생명체는 우리의 스테이 내내 함께했다. 밥 먹을 때 같이 먹고, 뒹굴 때 같이 뒹굴고!
두모공은 장기 숙박에 최적화된 집이었다. 세탁기, 전자레인지, 각종 요리 도구, 조미료, 라면 등 없는 게 없었다. 뿐만 아니라 비상약, 생활용품 등 우리의 일상에서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이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하루를 머물기엔 너무나 완벽하게 갖춰진 집이었다. 다음번에는 이곳에 최소 일주일 정도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러 명이서 비용을 분담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주변 환경도 장기 숙박에 매우 유용했다. 맛집이 근처에 즐비했고, 대부분 포장과 배달이 가능했다. 집 바로 옆에는 꽤 근사해 보이는 술집과 라멘집도 있었다. 나와 일행 또한 매 끼니를 주변 식당에서 포장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 편의점과 마트도 각각 도보로 10분, 20분 내에 위치해 있으니 언제라도 필요한 물품을 구할 수 있을 터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공간이 숨어 있었다. 성인 1명이 누우면 딱 맞을 크기의 작은 다락방이었다. 센스 있게도 매트와 담요가 준비되어 있어, 이곳에 놀거리만 들고 오르면 되겠다.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콘센트도 구비되어 있으니 나만의 작은 영화관을 만들 수도 있겠다.
2층에는 거실과 욕실이 있다. 거실의 전면을 둘러싼 통유리창으로는 바다와 풍차가 보였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뻥 뚫리는 시원한 풍경이었다. 건축가의 이상이 담긴 집답게 책장에는 인테리어 관련 도서가 주를 이뤘고, 인문분야와 제주를 주제로 다룬 여행 서적도 꽂혀 있었다. 전반적으로 담갈색의 목재와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한 인테리어 덕분에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사실 나와 일행이 두모공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한 공간은 다름 아닌 욕실이었다. 화사한 하얀 타일과 식물이 가득해 싱그러움을 안겨 주면서도, 히노끼 욕조가 있어 느긋한 목욕의 시간을 선사한다. 블라인드 창의 틈새로 보이는 어촌 마을의 풍경 또한 그 자체로 힐링이다. 욕실에는 일회용 어매니티뿐만 아니라 다회용 샴푸, 컨디셔너, 바디워시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3층에는 침실과 간이 주방이 있다. 마찬가지로 나무벽과 지붕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데다가 주홍빛 조명까지 더해져 우아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인장님의 섬세한 배려는 이곳까지 닿아, 미니 크리스마스트리가 창문가에 놓여 있었다. 성탄 분위기를 느낄 기회가 없던 요즘, 이렇게라도 경험하니 이 순간이 매우 소중하고 감사했다. 침실 한쪽 벽면에 놓인 수납장은 공간이 꽤 넓어 장기 숙박객에게 유용히 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3층의 간이 주방 겸 라운지. 저녁에 와인 한잔하기 좋은 곳이었다. 우리도 1층 거실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이곳으로 올라와 와인을 마셨다. 마셜 스피커로 캐럴을 틀고,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크리스마스의 풍요를 느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밤이 깊어 더욱 고요해진 두모리에서 비일상적인 순간을 맞이하자, 굳은 마음이 사르르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유난히 변화가 잦았던 2020년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한 번쯤 필요했던 순간이다. 내가 놓치고 있었던 나만의 작고 소중한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지치기 쉬운 일상에서 회복을 도울 존재들을 말이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늦잠을 잤다. 아침에 마주한 두모리의 풍경은 꿈결처럼 더욱 아름다웠다. 고양이 식구의 아침부터 챙기고, 네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내려 마당으로 나왔다. 한가롭게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제주에는 겨울이 더디게 찾아오는 듯하다. 야외에 있는 내내 가디건 하나만 입고 있어도 전혀 춥지 않았다.
완연한 가을 날씨를 감각하며, 산책에 나섰다. 코앞이 바다였기에 안 갈 수가 없었다. 바다에는 아침 물질을 끝낸 해녀분들이 뭍으로 들어오고 계셨다. 저 멀리 낚시꾼들도 더러 보였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어촌 마을의 풍경이었지만 우리에게는 매우 생경했다. 해녀 무리 중 마지막으로 지나가시던 한 할머님께서 내게 말을 건네셨다. 일순간 당혹감이 들었는데, 그 이유는 그분의 말씀 중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로만 듣던 제주방언을 바로 곁에서 듣게 되다니. 나의 반응을 보시고는 한번 더 말씀하셨지만(아마도 같은 말이었던 것 같다.) 역시나 대답이 불가했다. 대신 나는 두모공을 가리키며, 이 집에 놀러 왔어요!라고 말씀드렸다. 해녀 할머니께서는 그제야 밝게 웃으시며, 반겨 주셨다.
그렇게 두모공에서의 일박 이일은 마지막까지 '제주스러움'을 한껏 경험케 했다. 남녘의 땅, 제주에는 도시인에게는 너무나도 색다른 풍경, 언어 그리고 사람들이 있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제주를 오롯이 느끼고 돌아갈 수 있어서 매우 좋았다. 이런 점이 결국 여행을 지속하게 만든다. 삶에서 여행을 멈추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여행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곧 여행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