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
What Poetic Humans Club(PHC)
Where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127 2층
Detail 화~금 17:00-21:00/ 토, 일 14:00-21:00
Mood 어지러운 세상으로부터 멀어진, 어떤 평온함
삶이 뜻대로 흘러가든 말든 상관없이, 내게는 일상을 굴리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는 것이다. 오래도록 지속하니 습관이 된 지 만 육 년째다. 회사를 나가는 날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걷고, 주말엔 눈을 뜨자마자 문밖으로 나선다. 사실 산책의 효용 가치를 말하자면, 좋은 점만 쓰다 이 글이 끝날지도 모른다.
산책은 나의 일상을 유지하는 가장 쉽고 단순한 방법이다. 언제나 산책의 끝에는 새로운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새에 정신이 맑아지고 몸과 마음의 힘이 샘솟는다. 오늘도 무사히 살아낼 수 있겠다는 용기와 함께. 어떤 일이나 감정이 나를 범람할지라도, 씩씩하게 걷는 다리와 앞을 또렷이 보는 눈이 있다면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여느 주말과 같이 늦잠을 자고, 산책에 나섰다. 눈이 한바탕 내린 후의 포근한 정오였다. 오늘은 연남동까지 다녀오는 것이 목표였다. 숲길 공원을 따라 걷다 보니,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이 동네에는 좋은 카페가 너무 많아서 되려 고르기가 어렵다. 머리를 굴리던 중,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가보려고 생각했던 공간이 떠올랐다. 바로 Poetic Humans Club(이하 PHC)이다.
PHC는 화가와 시인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문화살롱이다. 기본적으로 북카페 겸 와인바로 기능하지만, 때때로 클래스나 모임이 열리기도 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직원분께서 공간의 운영 방침과 이용 방법을 간단히 설명해주셨다. 여기서 놀라웠던 것은 음료 주문은 선택 사항일 뿐, 자유로이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시대에 구원과도 같은 안식처가 아닌가.
"시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정답 없는 질문에 대해 함께 답하기 위해 모두를 위한 공간을 꾸렸습니다. 이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서로 연결되며, 나아가 세계의 확장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곳은 시적 인간, 바로 당신을 위한 공간입니다."
PHC가 전하는 메시지처럼 이 공간에서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그저 쉬었다 가기를 권한다. 공간의 구조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한 쪽은 도서관처럼 다른 한쪽은 작업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이곳에는 종이, 연필 등의 문구용품과 족히 100가지가 넘는 색연필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사이사이에 놓인 가구와 물건의 배치만 보아도 사용자의 편의를 생각한 섬세한 배려가 녹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매료시킨 공간은 주인장의 서가와 와인 서랍장이 있던 Library 구역이었다. 책장에 꽂힌 책은 대부분 주인장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이현승의 <친애하는 사물들>이라는 시집을 읽어 보았는데, 거기엔 행간에 써놓은 말들이나 밑줄이 가득했다. 가령, <암전>이라는 시에서 "전기가 나가자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라는 행의 옆에 -> '함께 눈을 감아 보는 경험'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추측해보건대, 주인분께서 시 모임을 진행하시며 사용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지점에서 나도 누군가와 함께 시를 읽는 것만 같았고, 보다 풍부하게 시어를 감각할 수 있었다.
PHC의 커피는 해방촌에 오래 자리하고 있는 오랑오랑(Orangorang)의 원두를 사용한다. 소설의 등장인물을 따서 만든 3종의 원두로, 각각 조르바/ 사비나/ 고빈다라는 이름을 지녔다. 오랑오랑 커피를 대표하는 조르바는 미디엄 로스팅으로 캐러멜을 입에 문 듯한 은은한 단맛과 깔끔하게 떨어지는, 균형감이 좋은 커피이다. 사비나는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인물처럼 진취적이며 화사한 맛이 특징으로, 과일의 단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고빈다는 오랑오랑에서 가장 고소하고 대중적인 커피로, 절제된 산미와 초콜릿의 풍미가 빼어나다.
오로지 드립 커피만을 판매하는 곳이니 만큼, 커피의 오롯한 향미를 느끼기 위해 '사빈다'를 주문했다. 메뉴를 살펴보니, 티의 종류도 6종 정도 취급하고 있었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카모마일/ 루이보스처럼 보편적인 종류부터, 녹차에 망고와 시트러스향을 더한 차나 대추, 레몬, 시나몬, 라벤더를 섞은 차도 있었다. 바리스타분께서 커피를 내리시는 동안, 복도로 연결된 포스터샵의 쇼룸을 구경했다. 통유리로 된 창문의 너머로는 청명한 오후의 햇살이 넘실댔다. 자연광이 환히 비친 쇼룸에는 포스터가 가득 붙어 있었다. 예술작품과도 같은 아름다운 사진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시간을 잘 보내고 있다는 생각 들었다.
나는 이곳에 머무는 내내 잠시 어지러운 세상으로부터 멀어진, 어떤 평온함을 느꼈다. 커피를 받아 들고, 밖에 나와서 한 모금 마셨을 때 그 행복감이란! 아무리 세계가 비틀어진들 내 삶에 산책과 커피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매일의 삶을 이루는 작은 행복이 없다면, 마음의 평형을 유지하기 어렵지 않을까. 일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권하는 곳. @poetic.humans.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