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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Dec 08. 2017

서문

 


대학 입시에 한창 찌들어 가던 열아홉 살의 나는 문득 허기짐을 느꼈다. 배 언저리에서 밀려오는 공복감이 아니라, 내면에서 비롯된 '영혼의 허기짐'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천천히 쌓여온 것인지도 모른다. 매일 반복되는 일과, 복장, 풍경, 피로. 대학에 붙지 않으면 그 이후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한없이 여린 영혼의 시절이었다. 그해 여름, 나는 답답한 마음을 안고 공항 철도에 몸을 실었다. 가방에는 펜 한 자루와 수첩 한 권을 담고서. 아무런 목적지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는데 공항에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공항에 가면 나는 떠날 수 없어도, 떠나는 사람을 보며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었다. 나를 짓누르던 압박에서 벗어나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싶었던 것이다.

 

공항은 떠남과 만남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떠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고, 돌아온 사람들의 얼굴은 환희로 빛이 났다. 사실 나는 하늘로 떠오르는 비행기를 보고 싶었는데, 그건 불가한 일이었다. 입국 심사장에 들어가서 면세점의 기다란 통로를 거치고 나야, 비로소 대기 중인 비행기를 볼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넓디넓은 인천공항에 나는 철저한 이방인처럼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앉았다. 학교 앞에도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인데, 그곳에 가면 늘 먹던 민트초코칩 맛을 주문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가족들에게 알렸다. 잠시 공항으로 바람 쐬러 왔다고. 그냥 멀리, 최대한 낯선 곳에 가고 싶었다고. 나는 하고 싶었던 대로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을 지켜보고, 사색에 잠겼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공항 내 영화관으로 갔다. 공항에 혼자 간 것도 처음이지만, 영화를 혼자 보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나는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보며 이날의 여정을 마무리지었다. 

 

이제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당시의 일화를 떠올리니 만감이 교차한다. 몇 년 후의 내가 틈만 나면 여행에 가려고 애쓰며 사는 어른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때 갔던 곳이 하필 공항이었던 건, 나의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나는 '행복의 충격'으로 가득했던 몽골 여행 이후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아무래도 수면욕, 식욕, 성욕과 더불어 내재되어 있던 여행욕이라는 제4의 욕구를 찾은 게 분명하다. 어디로 떠날 것인가에 대한 사유는 언제나 내 머릿속에 있다. 여행길에 오른다는 것은 세상을 헤매는 것이지만 결국 내 속을 헤매는 것이기도 하다. 지상의 한 부분을 탐험하면서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끝없는 의문을 형성하다 보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살겠다'는 나의 신념에도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나는 현재 취업이라는 또 하나의 변곡점에 다가가고 있다. 매일 새로운 형태의 잡념과 고민이 켜켜이 쌓여 간다. 그러다 내면이 불안으로 휩싸일 때면 글을 쓴다. 무언가를 적는 행위는 내게 안식처이자 낙원이다. 고등학생 때는 기껏해야 수첩에 소원을 적는 정도였는데, 어느새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을 붙잡아 묵묵히 적고 있다. 주로 여행을 쓰고, 때로 영화평론을 한다. 나는 앞으로 내가 무엇이 되든 여행을 하고, 글을 쓰는 행위는 멈추지 않으려 한다. '여행'과 '글쓰기'를 하나의 소명으로 여기고, 언제나 여행자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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