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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Jan 23. 2018

런던의 예술

UNITED KINGDOM


그때 그 순간의 스쳐간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옮겨 적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전시회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어떠한 기록도 하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걸작의 향연 속에서 끝없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 작품에서 저 작품으로 발길을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동네 카페에 앉아 전시작품 사진을 살펴보며 당시를 회상하려 부단히 애쓸 뿐. 공교롭게도 노트북 너머 내 시선이 머무르는 자리에서 영어를 쓰는 외국인들이 수다를 떨고 있어, 런던에서 원 없이 느꼈던 기분이 다시금 전해지는 중이다. 저들이 당시의 감각을 깨우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것만 같아 내면에 작은 흥분이 감돈다. 런던에 가기 전부터 수첩 한편에 적어둔 장소 중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수의 갤러리들. 세계적인 수준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존재하는 런던에서 테이트 모던만큼은 반드시 가보고 싶었다.


Tate Modern


가장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이자 두 번도 갈만했던 Tate Modern. 서울에서도 MMCA(국립현대미술관)을 곧잘 보러 가던 나였기에 현대 미술관을 고른 건 무난한 선택이지 않았나 싶다. 역시나 옳았다. 이곳이 MMCA인지 테이트 모던인지 헷갈리게 만들 정도로 하얀 벽에 늘어선 회화, 조각, 비디오 아트, 설치미술 등은 새로운 인상을 주진 않았지만 보는 내내 재밌었다. 미술 지식이 거의 없는 나에게는 거기서 거기였던(예술계에 실례가 되는 발언이 아니었으면) 현대 미술관. 하지만 예술은 정의하기 나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찰나에 떠오르는 호기심에 이끌려 다녔다. 도중에 만난 피카소, 몬드리안, 앤디 워홀의 작품은 아는 사람을 마주친 것처럼 반가웠다. 관람객 중에는 나와 같은 여행자도 많았지만,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보러 온 영국의 직장인, 데이트를 나온 연인도 제법 많아 보였다. 보통 저녁 6시 전후로 닫는 갤러리가 대부분이지만 이날은 특별히 야간개장을 하는 금요일이었다. 괜히 들뜨는 금요일 저녁의 기분을 한껏 느끼며 돌아본 테이트 모던. 한 번에 다 보기에는 규모가 상당하므로 여유가 있다면 두 번에 나눠서 보는 것이 좋겠다. 나도 처음엔 천천히 보다가 나중엔 마음이 급해져서 대강 보았더니 두 번째 왔을 때 처음 보는 작품들이 꽤 많았다.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외관부터 매력적인 테이트 모던이지만 그 내부 역시 훌륭했다. 특히나 10층 전망대에서 바라본 야경은 런던의 야경 중 최고로 꼽을 수 있겠다. 넋을 놓게 만드는 야경을 바라보며 앉아 있을 때 옆에서 작은 플라스틱 잔에 와인을 나눠 마시며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서로의 눈에 빠져 나의 부러운 눈길은 전혀 느끼지 못했을 거다.



The National Gallery


런던의 중심부 한복판에 있는 National Gallery는 가려고 마음먹어서 간 곳이 아닌, 걸어 다니다가 우연히 가게 된 곳이다. 그 이름에서는 짐작 가는 바가 없어 위대한 화가들의 예술작품이 있는 갤러리 중 한 곳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입구에 들어섰다. 바글바글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데 오디오 가이드를 이용하는 관람객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레 오디오 가이드를 빌렸고, 이때 유일하게 한국에서 미리 발급받은 국제학생증이 빛을 발했다. 직원 언니가 어떤 언어를 고르겠냐길래 조심스레 한국어가 있는지 물었는데 웬걸! 빠른 손놀림으로 건네주신 기계에선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관람을 하려는데 이곳 역시 한두 시간 내로 보기에는 벅찬 규모로 보였다. 런던에 머무르는 내내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듯 매일 20KM 이상 걸어 다녔고, 이 날 역시 이미 체력의 반 이상을 소진했던 터라 조금은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전시회장으로 향했다. 이곳에선 13기 중세부터 17세기 이후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종교화를 비롯해 풍경화, 정물화 등 끝없는 예술의 향연이 펼쳐졌다. 정말이지 훌륭한 수준의 미술관을 보는 영광을 누리는 것도 잠시, 이내 밀려드는 피로감으로 인해 안내 책자에 나와있는 핵심 그림을 다 보기에도 무리였다. 무거운 다리를 겨우 옮기면서 가볍게 한 바퀴를 돌고 나왔다. 그래서 내 기억 속 내셔널 갤러리는 피곤함의 결정체가 되어 버렸다. 세상에!



Tate Britain


나를 Tate Britain으로 이끈 건 언더그라운드에서 읽은 메트로신문 기사였다. 수업에서 배운 영국의 현대 예술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전시회가 며칠 뒤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지면에 실린 호크니의 인터뷰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을 어서 하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결국 사전 계획에는 없던 테이트 브리튼에, 내셔널 갤러리의 안타까운 기억을 뒤엎고자 온전한 체력으로 가려고 마음먹었다. 테이트 브리튼은 비교적 한산한 곳인 템즈 강변에 위치해있었고, 테이트 모던과 내셔널 갤러리에 비하면 비교적 적당한(?) 규모였다. 아름다운 내부에 감탄할 새도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예술작품에 금세 빠져 들었다. 윌리엄 터너, 토마스 게인즈버러, 존 컨스터블, 리처드 윌슨 등 영국 화가들의 낭만적인 작품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때 가족들에게 영국 온 이래로 가장 행복하다고 카톡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마침 전시가 시작된 데이비드 호크니전의 입구 앞에 당도했을 때는 황홀경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무한한 영광을 느끼게 해 준 테이트 브리튼! 결과적으로 런던에서 가본 갤러리 중 제일 좋았다.



Saatchi Gallery


런던의 박물관, 성당, 도서관은 입구에서 꼭 가방 검사를 한다. 그다지 삼엄하지는 않지만 괜히 긴장되는 그 순간. Saatchi Gallery에 도착했을 때 역시 가방 검사를 하는 직원들이 먼저 보였다. 이 날 나의 행색은 아무런 짐이 없는 단벌 코트 차림이었다. 그래서 직원에게 약간은 멋쩍은 미소를 띠며 들어갔는데, 뭔가 이상했다. 갤러리 안은 아직 전시 준비 중인 것처럼 사람들이 무언갈 옮기며 분주히 움직였고, 공사가 덜 된 느낌의 장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심지어 엘리베이터도 새로 설치한 건지 가벽이 미처 떼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사태를 좀 파악해야겠다 싶어서 눈 앞에 보이는 직원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지금 어떤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건지. 그러자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어떤 브랜드를 담당하고 있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내가 벙쪄 있자 혹시 방문객이냐고 물어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직원은 정말 놀란 얼굴로 지금 이곳은 새로운 쇼를 준비하고 있어서 방문객은 출입이 금지됐다고 말했다. 비즈니스 쇼이기 때문에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 중이라며 미안하지만 나가 달라고 했다. 나도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괜스레 미안해서 Sorry를 연발하며 황급히 나왔다. 아마도 입구에 서있던 직원은 가방 검사를 하려던 게 아닌 방문객 통제를 위해 서있던 거였겠지? 다만 내가 가방도 없이 자연스럽게 들어가려고 하니 쇼를 준비하는 스탭 정도로 보았던 게 아닐까 싶다. 어쩐지 몇 초간이었지만 그 직원이 나에게 무슨 말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을 느꼈다. 그러다 바로 Okay라고 하며 들여보내 주었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인제 깨달았다. 진작 입장 불가라는 것을 알고 발길을 돌렸더라면 별다른 의미 없이 기억에서 잊혔겠지만, 뜻밖의 에피소드로 인해 내겐 특별하고 재밌는 장소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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