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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Jan 22. 2018

런던의 공원

UNITED KINGDOM


여행 둘째 날 시차 부적응으로 인해 아직 해가 떠오르지도 않았는데 눈을 떠버렸다. 말도 안 되는 새벽시간에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나서자 차디찬 새벽 공기에 코가 시렸고, 여명이 스며들기 전 하늘은 짙은 쪽빛이었다. 거리에는 하루를 시작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하필 숙소에서 가까운 지하철이 폐쇄돼서 먼 길을 돌아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공사장 직원분이 알려주신 곳은 어딘지 몰라서 결국 눈 앞에 보이는 정류장에 오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 버스가 향하는 곳을 살펴보니 이 시간에 그나마 갈 만한 데가 한 군데 있었다. 바로 Hyde Park다. 그렇게 나의 본격적인 여행 첫날은 공원에서 시작되었다. 해가 쨍쨍하든, 먹구름이 가득하든, 심지어 소나기가 쏟아지든 런던의 공원에는 항상 조깅을 하거나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자신만의 방식대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런던 곳곳에 위치한 공원은 도시의 삭막함을 잠시 잠재워주는 존재이자, 도시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안식처의 기능을 하는구나 싶었다.


Hyde Park


떠오르는 아침해를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이미 해가 떴다. 처음으로 빨간 이층버스를 타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도 버스 안의 곳곳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관찰했다. 하차벨의 맑고 경쾌한 울림이 이 버스와 잘 어울렸다. 아! 그런데 목적지에 당도하자마자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 비는 런던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듯싶었으나 나는 가방에 챙겨둔 우비를 꺼내 들었다. 하이드 파크 안으로 걸어 들어 갈수록 빗줄기가 굵어졌다. 아침에 샤워한 것이 소용없게 머리가 다 젖었다. 그래도 비 덕분에 흙의 비릿하면서도 상쾌한 냄새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언제 맡아도 향긋한 흙냄새와 한데 엉긴 풀냄새를 맡으며 공원을 거닐었다. 런던의 중심에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공원이었다. 강가에는 백조와 오리 군대가 이미 활동을 시작했고,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은 모두 조깅을 하고 있었다. 계절을 잊게 만드는 가벼운 차림부터 완벽한 운동복 차림을 한 런더너들이 공원을 가로지른다. 이때가 시작이었나 보다. 시공간을 불문하고 뛰는 사람들을 목격한 게. 런던에는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Green Park & St. Jame's Park


엘리자베스 여왕이 살고 있는 버킹엄 궁전 옆에 있는 Green ParkSt. Jame's Park. 하이드 파크와 함께 런던의 3대 공원으로 불린다.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위치상 한적한 공원의 느낌보다는 모두에게 열린, 만남의 광장 같은 느낌이었다. 푸른 잔디로 가득한 이곳에 그냥 가만히 앉아 멍 때리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2월의 공원은 겨울이라는 계절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영상의 온도였지만 야외활동을 하기엔 차가웠고 황량한 잔디밭은 오래 머물기 힘들었다. 그래서 가볍게 거니는 데 의의를 둬야 했다. 햇살이 부서지는 계절에 다시 방문할 언젠가를 꿈꾸며.  



Regent's Park


날이 좋은 날의 공원은 또 다른 싱그러움을 안겨 주었다. 비 오는 공원도 좋지만 아무래도 다니기 편한 날의 공원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존재만으로도 도심의 번잡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드는 Regent's Park. 사랑하는 사람과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나눠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았다. 이곳에서 Primrose Hill까지 걸어가는 길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고, 어느덧 산책을 즐기게 된 나는 이 순간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리젠트파크를 일상적으로 오갈 수 있다니 참 좋겠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개구쟁이 삼총사 친구들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며 오른 프림로즈힐의 경치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광활한 런던의 풍경을 액자에 담아낸 것처럼 대도시가 한눈에 모두 담겼다. 넋을 잃게 만드는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보려 언덕 위에 걸터앉았다. 혼자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건 좋은 순간마다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르며 함께 나누고 싶다는 거다. 사실은 누군가와 행복의 감정을 공유하기에 그것이 배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나는 여행 내내 누군가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홀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스치는 단상들 가운데 지금껏 아무 일 없이 잘 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혼자 떠난 첫 여행 치고 썩 괜찮게 해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루에 최소 20km는 걷는 나날들. 내 다리야, 발아 수고가 많다. 건강해줘서, 꽉 찬 여행을 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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