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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Jan 24. 2018

영국 기차여행

UNITED KINGDOM


영국 남부의 한적하고 느긋한 해안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나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에 지대한 변화가 생겼다. 특히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게 큰 틀이 아닌 작고 소박한 틀에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역시나 사람, 사람이었다. 눈 앞의 빼어난 경관은 부수적인 가치에 불과했다. 사람이 사람에게서 배우고 느끼는 순간이 가장 값지다. Gigi는 에어비앤비 메시지로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따뜻한 말을 남겼다. 평생 읽고 또 읽고 싶은! 또 한국에 돌아와 영국 여행의 감회가 식어갈 때 Andrew로부터 날아온 엽서는 기쁨 그 자체였다. 앞으로 살면서 BexhillEastbourne을 언제 다시 가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언젠가 꼭 다시 한번 그곳에 닿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볼 거라는 것.


BEXHILL


런던의 빅토리아역에는 저마다의 목적지를 품은 수많은 사람들이 교차했다. 다행히 나는 적당한 시간에 도착했기에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있었다. LUSH에 가서 향긋한 입욕제 냄새를 맡아보고 물건을 들었다 놨다 하며 시간을 살폈다. 기차표에는 목적지와 시간만 나와 있을 뿐 자리나 승강장 위치가 별도로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역 직원분께 여쭤보니 화면에 뜨는 번호를 확인하고 가면 된다고 했다. 나의 표정이 영 불안해 보였는지 기차가 올 때 다시 한번 알려주겠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데 열차 시간에 당도하자 갑자기 사람들이 몰렸고 역 직원들은 손님들의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도 아까 그 직원분께 다시 한번 확인하고 들어가려 했는데 물 밀듯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그냥 혼자서 찾아가기로 했다. 화면을 보니 Hastings행 기차가 'delayed'라고 표시돼 있었고, 난 좀 더 기다려야겠다 싶어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바로 앞에 또 다른 직원분이 계시길래 내 표를 보여주며 기차가 곧 오는 건지 묻자, 그 직원분께서는 내 왼쪽을 가리키며 저 기차가 내가 타야 하는 기차이니 당장 뛰어가서 타라고 외치셨다. 화들짝 놀란 나는 커다란 캐리어를 요란하게 끌고 전속력으로 달려 보았지만, 이미 기차가 나와 함께 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나는 눈 앞에서 기차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닫자 왈칵 눈물이 났다. 정말 바보 같았지만 에어비앤비 호스트와 만나기로 약속을 한 상태이기도 했고, 이 불안한 시작이 온전히 나의 불찰이라서 화가 났나 보다. 누가 볼까 저 멀리 가서 한바탕 울고 다시 정신을 차려 보았다. 때마침 연락하고 있던 후배 형준이에게 나의 상황을 말하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기차를 타면 된다고 했다. 아, 그렇게 간단한 거였어? 그 말에 나는 마음을 좀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근처에 청소를 하고 계시던 직원분께 다시 한번 여쭤보니, 행선지는 다르지만 방향이 같은 다음 기차를 타라고 했다. 겨우 기차에 올라 수첩과 비상식량을 꺼내 두고 창밖을 바라보니 한시름이 놓였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은 이내 한적한 시골길로 변했다.

 

 고작 한 시간 달렸을 뿐인데 밖에는 들판을 뛰노는 양도 보였다.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장면이었다. 이러한 평화도 잠시, 구글 지도를 켜서 어디쯤인가 확인해보는데 아무래도 행선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처는 직접 물어보는 거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나와 같은 칸에 앉아 계신 아주머니분께 여쭤보니, 역시나 갈아타야 하는 거였다. 그래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한 번만 갈아타면 됐다. 상냥한 영국인 아주머니 덕분에 곧바로 멈춰 선 기차에서 내렸고, 또 다른 기차를 기다리게 되었다. Worthing역에 내렸을 때의 그 낯선 느낌은 잊을 수가 없다. 누가 봐도 나는 이방인이었는지 나를 바라보는 많은 시선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목적지에 얼른 가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기에 한적한 역 휴게실에서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나의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도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현재 위치를 전하자, 전혀 문제없으니 조심히 오라는 답을 주셨다. 영국의 달리는 기차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차창 밖의 풍경 바라보기 그리고 일간 신문 읽기였다. 핸드폰이 잘 터지지 않을뿐더러 배터리를 아껴야 했기에 내겐 아날로그적 행위가 적합했다. 그러던 중 오늘의 별자리 운세가 눈에 띄었고, 읽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you may find your focus drawn to subjects of interest or places that challenge and inspire you. If so, the idea of wanting to explore can become more intense. it could almost feel like an urge to step into and experience something much larger.


내 상황에 너무도 딱 들어맞아서 하마터면 밑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할 뻔했다. 재미로 보는 운세라는 걸 알지만 참으로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새롭고 커다란 경험을 위해 홀로 먼 땅을 여행하고 있는 나에게 걸맞은 해석이었다.


 나의 첫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Gigi 아주머니를 드디어 만났다. 그녀는 나를 픽업하기 위해 Bexhill역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이 자체만으로도 감사한데, 늦게 온 나를 환한 미소로 맞이해주셨다. 나 역시 기쁜 마음에 그녀에게 왈칵 안겨버렸다. 해안가를 따라 달려 도착한 Gigi의 집은 안락함 그 자체. 그녀는 방 소개가 끝나자 오느라 고생했다며, 웰컴티와 간식을 내어주셨다. 영국인이 만들어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를 마셔보다니! 샌드위치와 샐러드도 너무 맛있어서 남김없이 다 먹었다. Gigi아주머니와의 대화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혼자 살고 있는 그녀의 삶은 소박하고 고왔다. 집이 그런 그녀의 삶을 닮아있었다. 


 Gigi 아주머니의 취미는 정원 가꾸기, 요가, 수영, 그리고 컬러감이 가득한 그릇과 컵을 모으는 일이라고 한다. 집안에 놓인 잡동사니 하나하나가 그녀의 취향을 한눈에 알아보게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준비해온 작은 선물(서울 가이드북과 김)을 드리며 간단히 소개 하자 정말 좋아하시며, 한국이라는 나라에 무한한 호기심을 보이셨다. 한국에 와본 적이 없는 그녀는 우리나라의 풍경과 문화를 특히 궁금해하셨다. 우리는 티타임에 걸맞은 따뜻하고 포근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주고받았다. 그녀는 나에게 오늘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으셨고, 나는 마을 구경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 벡스힐이라는 마을은 헤이스팅스 바로 옆 동네로, 바닷가 마을이다. 원래는 헤이스팅스를 가고 싶었는데 에어비앤비 집을 구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Gigi 아주머니는 내게 정중한 어투로 함께 산책하겠냐고 말씀하셨다. 나는 더없이 좋고 감사했기에 yes를 외쳤다. 


 벡스힐은 참 예쁘고 조용한 동네였다. 알고 보니 영국의 밴드 Keane의 'Sovereign Light Cafe'라는 곡의 뮤직비디오의 배경이 된 마을이었다. Gigi 아주머니는 Keane의 팬인 한국인 소녀가 얼마 전에 이곳에 놀러 왔었다고 했다. 신기해라! 파도소리와 갈매기 우는 소리를 음악 삼아 해안 언덕을 따라 쭉 걸으면서 우리의 대화는 계속됐다. 정말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건 요즘 영국의 젊은이들도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창업을 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하셨다. 청년들의 삶이 팍팍하고 힘든 건 영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처음엔 산책으로 시작했으나 마지막엔 거의 고행길에 가까웠다. 밤이 깊자 바닷바람은 더욱 거세졌고 얼굴이 찢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차가웠다. Gigi 아주머니가 괜히 걱정하실까 봐 힘든 티 안 내려고 노력했지만, 뭔가 서로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던 거 같다. 잠깐이라도 따듯한 곳을 들렀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돌아가는 길에 Marks&Spencer를 들리자고 하셨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옷 브랜드로 친숙하지만 영국의 M&S는 '국민마트' 같은 존재로, 의류부터 온갖 먹거리, 잡동사니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녀는 내게 저녁을 함께 먹자고 제안하시며 디저트로 먹을 케이크를 사자고 하셨다. 보통의 에어비앤비라면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선뜻 답하기 어려웠다. 방의 가격도 무척 저렴한 편이었는데 괜히 나 때문에 무리하시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감동받은 표정을 애써 누르며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케이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그녀는 내 마음까지 읽으신 듯 고맙다고 하셨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꽤 길었던 산책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담요를 덮고 누우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물론 방 안의 공기는 시렸지만, 라디에이터를 최대로 켜 뒀으니 이내 따뜻해질 거라 믿었다. 한숨 돌리고 나니 방안의 꽃과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나를 위해 사다 두었다는 꽃이 저건가보다. 집주인을 닮은 아기자기한 소품을 보니 마음에 고요한 평안이 깃든다. 내가 쉬는 동안, Gigi 아주머니께선 라디오를 틀어 놓고 요리를 하셨다. 중간중간 동네 고양이 Oufy가 집 안 복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조용한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이내 맛있는 냄새가 방안에까지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밥을 찾는 멍멍이 마냥 쪼르르 나가봤다. 때마침 라디오에서는 트럼프 이야기가 나왔는데 Gigi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 한국인들도 트럼프를 싫어하냐며 영국에선 정말 요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나도 트럼프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니 반가운 소리라며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채식주의자인 그녀의 식탁은 건강한 요리로 가득했다. 간장 소스에 졸인 채소 덮밥은 정말 맛있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그런 맛이었다. 화이트 와인까지 한잔 곁들인 저녁 식사는 너무나도 완벽했고, 그야말로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마치 시골에 사시는 고모집에 놀러 간 기분이었다. 하룻밤만 자고 이곳을 떠나야 한다니, 좀 더 여유 있게 일정을 잡을걸 하고 후회했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Gigi 아주머니께선 요가 수업에 가셨고, 나를 위한 아침 식사가 준비돼 있었다. 어젯밤 잘 먹고 자서 그런가 그다지 먹고 싶지 않았지만 열심히 돌아다니려면 조금이라도 먹는 게 낫겠다 싶었다. 시리얼을 따르고 우유를 부어서 먹는데, 'Marmite'가 눈에 들어왔다. 마마이트는 이스트 추출물로 만든 영국 특유의 잼이다. 발효식품 특유의 강하고 짠맛이 나는 이 잼은 영국인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라고 한다. 슬로건이 'You love it or hate it'이라고 하니. 참 재밌다. 나도 들어만 봤지 먹어본 적이 없어서 궁금했으나 입맛이 별로 없어서 사진만 찍고 다시 내려놓았다. 지금까지도 무척 궁금한 마마이트의 맛. 


 간단히 요기를 끝낸 후 서둘러 짐을 싸고 다시 기차역으로 향했다. 어제는 차를 타고 왔지만 오늘은 걸어가야 했는데 20분이면 가는 거리였다. 밝을 때 보니 해안마을 특유의 아름다움이 더욱이 돋보였다. Keane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았던 벡스힐의 풍경을 직접 보면서 걸으니 참 즐거웠다. 고요한 동네의 적막을 깨는 건 갈매기의 울음소리와 나의 캐리어 바퀴소리뿐. 가는 도중엔 친구들과 영상통화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전했다. 나는 잘 생존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이제 또 다른 남부 해안도시인 Eastbourne을 향해 간다.

 


EASTBOURNE


 어제 그렇게 헤매고 나니 이내 적응을 했나 보다. Eastbourne까지 가는 길은 식은 죽 먹기였다! 거리가 가까워서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머무를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도착했다는 연락을 하고 잠시 구경을 하다 두시쯤 찾아가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스트본에는 뭐가 있을까 찾아보니 역 근처에 공공 도서관이 있었다. 영국의 도서관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가보기로 했다. 여느 도서관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언제 가도 가슴 설레는 공간임이 분명하다. 언어가 달라 이해하기 힘들지라도 동네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는 순간은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마음을 열고 찾는 장소, 매력적이다.


 마침 오늘이 금요일이라 'FISH FRIDAY'를 즐길 수 있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들어가니 사람들로 북적였던 The London&County라는 레스토랑에서 피시 앤 칩스를 주문했다. 나름 영국의 대표 메뉴인데, 해안도시에 와서 먹으면 더 맛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더욱 기대되었다. 와,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는 말이 있는데 생선을 갓 튀기면 얼마나 더 맛있을까. 정말 너무나도 맛있었다. 바삭바삭한 생선 튀김에 레몬즙을 뿌리고 타르타르 소소를 찍어 입안에 넣었더니, 곧바로 녹아내린다. 뜨거워서 입천장을 데일 뻔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15분도 안되어서 다 먹은 듯하다. 함께 나온 감자튀김과 으깬 콩도 잘 어우러지는 맛이었다. 이스트본에 와서 먹길 잘했다고 속으로 외치며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다.


 Sergio 부부의 집은 휘게 라이프(Hygge life)를 연상시키는 집이었다. 매우 아담한 규모의 오래된 집이었지만 없을 건 없는 그런 집! 내 방을 본 순간 환호성이 나왔다. 휴식을 취하기에 더없이 좋은 가구들과 머리맡 한편에 놓인 책, 그리고 숲이 그려진 그림. 오늘 아무것도 안 하고 방에서 낮잠만 늘어지게 자도 좋겠다 싶었다. Sergio는 바로 어젯밤 만났던 Gigi와 달리 게스트에게 자유를 주는 호스트였다. 간단히 집안 설명을 한 후,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며 필요하면 언제든 자신을 부르고 잘 쉬라고 했다. 그와의 짧은 대화 후 알게 된 것은 그는 스페인 사람이고 이스트본에 온 지 일 년이 조금 넘었다고 한다. 부인은 의상 디자이너인데 일이 밤늦게 끝나서 이따 돌아오면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저녁 여섯 시가 넘었다. 기지개를 켜고 개운한 정신으로 다시 나갈 채비를 했다. 근처에 Eastbourne Pier라는 부두 전망대가 있길래 걸어서 가보기로 했다. 깜깜한 밤길에도 나의 일등 가이드 구글 맵스가 있었기에 두려울 게 없었다! 벡스힐만큼이나 한적한 동네였기에 혼자 콧노래를 부르며 거닐었다. 가는 길에 보이는 레스토랑과 카페를 눈으로 훑으며 이따 어디에 가볼까 고민하면서.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는 바다에 다다르자 나도 모르게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닷소리가 반갑기도 했고, 문득 이 순간의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암흑으로 둘러싸인 바다엔 청명한 달만이 빛을 내고 있었다.


 바다도 보았겠다 동네 사람들이 주로 모인다는 The nut house라는 펍으로 갔다.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지금, 이런 게 내겐 여행의 묘미이자 특권이다. 무수한 인종이 모여사는 런던과 달리, 그들과는 엄연히 다른 내가 동네 술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역시나 시선 집중이다. 순간 심장이 쪼그라들었지만 갈 길 잃은 어린양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당당하게 '맥주 한 잔 주세요!'하고 말했다. 100% 확신할 순 없지만 어떤 아주머니가 주인에게 날 가리키며 어린 여자애가 이곳에 와도 되냐고 수군댄 거 같은데, 저 성인입니다. 하지만 술을 시키고 난 다음이 문제다. 내게 혼술은 한없이 지루하고 외로웠다. 급기야 지갑에 있던 동전을 꺼내 세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할 게 없었으면. 넉넉한 양의 맥주 한잔을 비우고 나자 화장실에 가고 싶어 졌다. 여느 술집과 마찬가지로 안쪽에 화장실이 있겠지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무리를 가로지르며 안으로 향했다. 내가 화장실을 찾고 있는 걸 발견한 한 손님이 방향을 알려줬다. 덕분에 볼일을 보고 나왔는데 그 손님이 다트를 치고 있었다. 나는 뒤에 서서 쭈뼛쭈뼛 구경하다가 용기를 내서 같이 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는 흔쾌히 함께 하자고 하셨고, 점수 세는 법까지 알려주셨다. Andrew는 그렇게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의 직업은 이스트본의 영어 강사이자 파이프 연주가라고 한다. 이날 스코틀랜드 전통 복장을 입고 계셔서 그 누구보다 눈에 띄는 그였다. 처음에 치마를 입고 계셔서 잠시 오해했다.(이스트본은 성소수자가 많기로 유명하단다) 


 우리의 다트게임은 막상막하를 오가다 결국은 그의 승리로 끝이 났다. 게임 중간중간 나에 대한 질문을 하셔서 답했더니, 이곳까지 혼자 여행 온 내가 정말 용감하다고 하셨다. 또 이렇게 만난 것도 큰 인연이라며, 집과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자고 하셨다. 이땐 이것이 어떤 일을 불러올지는 상상도 못 하였다. 저녁도 거른 채 술을 마시니 더욱 출출했다. Andrew와 짧지만 알찬 시간을 보낸 후 근처의 Shimla라는 인도 레스토랑에 왔다. 영국에 와서 한식 빼고 온 나라의 요리를 다 먹어 보는 듯하다. 무난한 치킨 카레를 시켰는데 대성공이었다. 워낙 밥순이 체질이라 일단 밥이 나오면 행복하다. 인도음식 특유의 향신료 맛도 너무 좋았다. 적당한 간과 풍성한 양 또한 만족스러웠다. 가격대도 합리적인데 꽤 고급 레스토랑처럼 꾸며져 있어 정찬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와 씻고 누워서 머리맡에 있던 'Winnie the Pooh'를 읽었다. 그림체부터가 사랑스러워서 읽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배도 부르고 몸도 따듯하고 이곳이 천국이 아니면 뭐겠어? 다음날 Sergio가 준비해준 아침도 간단했지만 맛있었다. 참, 영국인 가정집에 와보니 그들의 삶 속에 '차(Tea)' 문화가 얼마나 깊이 자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인사처럼 자연스레 건네는 '티 한잔 마실래?'의 문화. 고소하면서도 씁쓸한 잉글리시티는 언제나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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