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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Jan 23. 2018

런던의 극장

UNITED KINGDOM


무릇 계획에 없던 일을 행할 때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일은 없다. 내겐 Electric Cinema가 그런 존재였고, 내가 사랑한 런던의 집합과 같은 의미로 기억된다. 영국에 관한 여러 책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곳이었고, 영국인에게 런던에 있는 영화관을 물어봤을 때도 듣지 못한 곳이었다. 그런데 내 유일한 나침반이자 정보력의 근원인 구글 맵스가 또 한 건 했다!


Electric Cinema


 원래의 일정대로라면 영국 남부 마을을 여행한 후,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옥스퍼드와 코츠월드에 삼일간 머무를 거였다. 그런데 기차표를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미 런던을 8일 정도 돌아본 후였지만 턱없이 모자라다고 느꼈고, 알 수 없는 충동이 계속 날 놓아주지 않았다. 순간이라고 하기엔 꽤 오래 지속된 충동적 결정으로 결국 런던행을 택했다. 그렇게 새로이 찾아온 시간들은 무언가를 보기 위해 바삐 움직이기보다는, 좋았던 곳에 또 가보거나 마음에 드는 길을 따라 정처 없이 떠돌게 했다. 아무래도 계획된 여행을 소화해내는 데 지친 게 분명했다. 수첩에 적어둔 것들을 해치워내야 한다는 압박과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급급함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더군다나 혼자였던 내겐 한 공간에 오래 머물게 해줄 힘이 모자랐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일상의 나'를 끌어오는 게 필요했다. 만일 내게 자유시간이 생긴다면 어떻게 보낼까. 다른 누군가와약속을 잡을 가능성이 가장 크지만, 혼자서라면. 평소 좋아하던 영화나 예능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겠지. 곧장 구글 맵스에 영화관을 검색해보았고 포토벨로에 있는 Electric Cinema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일렉트릭 시네마는 외관만으로도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고, '영화관'보다는 '극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채도 낮은 파란 벽과 붉은색의 네온사인이 이렇게 조화로울 수가. 상영작과 시간대가 쓰인 현판의 글씨체도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다만 Fifty shades까지만 읽고 설마설마했는데 예상한 그 영화가 맞았다. 안 그래도 전편을 영화관에서 봤었는데 그다음 편도 이렇게 보게 되는구나. 당일에 즉흥적으로 표를 샀지만 다행히 한 자리는 남아 있었다. 이때까지도 극장의 외관에 감탄한 상태라 내부의 모습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포토벨로 로드의 한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영화 시작 10분 전쯤 입장을 했다. 안에 들어가자마자 스낵바에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음식을 주문하고 있었고, 눈 앞에 펼쳐진 내부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같이 호들갑을 떨어줄 이가 없어 감격한 표정을 애써 숨겼지만 속으로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곳은 연극이나 뮤지컬을 한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공간감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고른 Armchair 좌석에 앉아보니 다리를 쭉 뻗고 볼 수 있어 더없이 편안했다. 맨 앞은 누워서 볼 수 있는 Front low bed 좌석이 차지하고 있었다. 원래 '먹고 마시면서' 보는 게 특징인 일렉트릭 시네마의 관객 대부분은 햄버거, 핫도그, 나쵸 같은 Savory와 맥주, 와인 등을 함께 즐기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 시즌답게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의 분위기를 한층 더 사랑스럽게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몇 편의 광고 끝에 영화가 시작되었고 순간 자막이 없는 현실에 낯섦을 느끼다가도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50가지 그림자:심연’은 첫 번째 편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봤을 때와 똑같은 느낌을 주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어떤 메시지가 남는 게 보통인데, 이 영화는 아무런 것도 전달되지 못했달까. 시각적으로 즐거운(?) 자극만 줄 뿐, 이야기의 흐름은 유치하다 못해 저급하기까지 하다. 개연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개. 엔딩 크레디트가 나오자 사람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모두가 같은 마음일 테지. 하필 유일한 상영작이라 선택권 없이 보게 됐지만 나의 경우엔 자막 없이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화이기에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왠지 다음 편이 나오면 또 봐야 할 거 같다.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궁금한 느낌? 또 한가지 눈에 띈 사실은 내부가 너무 어두워 중간에 화장실을 다녀온 손님들이 자꾸 다른 줄로 들어가 'Sorry'를 연발하며 다시 제자리는 찾아가는 모습이었다. 그게 정말 어두웠기 때문인지, 한잔을 한 상태라 분별력이 조금 떨어져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는 게 귀엽기도 하고 좀 웃겼다. 나는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을 이렇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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