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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Jan 24. 2018

첫 혼자 여행

UNITED KINGDOM


분명 즐거움으로 가득할 거야. 매일매일 행복에 겨워 잠 못 이루는 밤의 연속이겠지. 멋진 신세계에 눈뜬 한 마리의 새처럼 이곳저곳을 자유로이 날아다니겠지. 혹시나 여기까지만 읽고 이 글이 '혼자 여행'의 낭만만을 묘사한다고 생각했다면 유감이다. 오히려 혼자서 떠나는 여행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지극히 현실적인 글이다. 혼행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어디까지나 나에 국한된 이야기.


혼자 간 여행이 내게 남긴 것


 영국 여행에서 돌아온 후,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물은 질문은 "그래서 어땠어?"였다. 나의 대답은 "총평을 하자면, 좋았고 멋졌고 또 가고 싶은데 혼자서는 가고 싶지 않아. 앞으로는 혼자 여행 절대 안 갈래." 이게 바로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심이었다. 행복한 순간은 분명 많았지만 그 행복이 최대치를 찍지 못하고 일정 부분에서 겉돌았달까? 실로 그랬다. 대도시라는 거대 공간은 어딘가 나를 위축 들게 만들었고, 군중 속의 고독을 경험하고 말았다. 오래도록 머무를 수 있는 한 장소에서도 이내 자리를 떴다. 계속 이동하면서 새로운 자극을 쫓았달까? 한국으로 돌아와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는데 곳곳에 나오는 런던의 지명이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 마치 그 동네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 선연히 그려지기까지 했다. 그만큼 짧은 기간 동안에 많은 곳을 보았다는 얘기다. 마치 영감을 찾아 떠도는 방랑자 마냥.


 맥주 한잔하러 들어간 펍에서는 나만 빼고 다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흥겨움은 커녕 지루한 소란이 이어질 뿐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즐기기에는 충분히 외로웠다. 나는 결국 한국인을 찾아다녔고, 그래서 우연에 의해 말을 섞게 된 인연 하나하나가 마음속에 콕 박힐 만큼 소중했는지 모른다. 여행의 순간을 황홀하게 빛내준 건 모두 사람이었다. 혼자서 발견한 행복의 순간에서도 가족, 친구들과 함께였다면 얼마나 더 기쁨이 배가 되었을지 상상하며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외로움을 많이 타고, 남에게 의존적인 인간이었나'하는 생각이 들며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쩌겠나. 이게 솔직한 내 마음이고 심정인데. 


 돌이켜보면 내 마음이 더욱 쓸쓸했던 이유가 날씨 탓도 있는 것 같다. 시린 겨울날과 더불어 우산 쓰기 애매할 정도로 내리는 빗방울은 황량한 분위기를 완벽하게 자아냈으니까. 추위를 달래기 위해 사 먹은 커피 한 잔은 내게 '이 정도론 소용없으니 집에 가서 이불이나 덮어쓰라'라고 외칠뿐이었다. 흔히 유럽 하면 떠오르는 눈부신 하늘 아래 싱그러운 풍경은, 2월엔 기대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네시 반이면 어둠이 찾아오는 건 또 어떻고. 낙천주의자의 이상도 꺾어버리는 짙은 어둠에 항복하고 말았다. 내가 겨울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게 된 결정적 계기다.


 비행기에 머문 시간을 포함해 17일간의 홀로 살이는 나만이 지닐 수 있는 진한 에피소드를 여럿 남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하는 사건이 있어 웃음부터 난다. 눈 앞에 보인 버스 기사 아저씨께 별안간 내 상황을 털어놓자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에 직접 전화해 떠나려는 버스를 붙잡아 주신 일, 호스텔 직원이 추천해준 장소가 알고 보니 영화 '클로저'에서 주드 로와 나탈리 포트만이 거닐었던 공원인 Postman's Park였던 일, 벡스힐에서 만난 Gigi 아주머니가 나와 기나긴 대화를 나누다 눈물을 흘리셨던 일, 바에서 일기를 쓰고 있을 때 뒤에서 핑퐁을 하던 외국인 언니가 때론 녹음을 하는 것도 여행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좋은 조언을 해준 일, 우연히 만나 동행하게 된 한국인 동갑내기 친구가 알고 보니 내 친구의 친구였던 일. 이 모든 게 혼자였기에 겪을 수 있었던 일들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렇게 여행을 추억하는 순간에도 공감해줄 이가 없다는 것. 혼행의 또 다른 비애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어렴풋이 이해해주기라도 하면 고맙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냥 흘려보낼 장면이라는 게 슬펐다.


 그렇지만 당시를 후회한다거나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건 절대 아니다. 왜냐면 인생에서 한 번쯤은 해봐도 나쁘지 않을 경험이기에. 언제 또 이렇게 나에게만 의지해 온 감각을 사용해보겠나. 주변 사람들은 혼자 여행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기도 하다. 나와 다르게 무척이나 잘 맞을 사람도 많을 텐데. 나 역시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함께할 수 있는 이가 없다면, 또 한 번의 '혼행'을 계획할지도 모른다. 덜 재밌을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럴 때 누가 나 좀 말려줬으면! 이제 내가 하고 싶었던 마음속 깊은 말까지 남겼으니, 영국 여행기 진짜로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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