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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Sep 03. 2018

우프(WWOOF) 일기 2

FRANCE


뻬이에서의 우프가 '맛보기'에 불과했다면, 릴르슈흐라쏘흐그에서의 우프는 '본격 농촌체험'에 가까웠다. Valerie의 집에서 15일 간 머무르며 배운 농사법과 그에 걸맞은 생활 방식은 가히 전에는 없던 경험이었다. 여행에서 느끼던 감각과는 확연히 다른 '일상의 감각'이 깨어났다. Valerie는 내게 자연을 곁에 두는 삶을 보여 주었고, 하루의 시간을 순리에 맞게 쓰는 법을 알려 줬으며, 무엇보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시공간을 초월해 결국 다 비슷하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곳에도 희(喜)가 있고, 노(怒)가 있으며 애(愛)와 락(樂)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내 삶에는 남프랑스의 시골과 비슷한 경관, 사람, 생활을 찾아볼 순 없지만 그 본질은 같다. 우리가 인종과 문화를 초월해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 그리고 연대하는 존재라서가 아닐까. 개인으로서의 우리는 한없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L'lsle-sur-la-Sorgue


 두 번째 WWOOF 호스트 Valerie는 나의 방문이 확정된 후 곧바로 기본 규칙, 숙소 안내, 하루 일과 등이 상세히 적힌 메일을 보내주었다. 메일 제목이 'WWOOF 2015'라고 적힌 걸로 미루어 보면 그녀는 우프 제도를 이용한 지 적어도 3년 차인 셈이었다. 그녀가 보낸 안내문을 읽고 나니 막연한 불안감은 사라졌지만, 확실한 노동 체계가 조금은 겁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촌동생 지현이와 함께하므로, 지난번보다는 마음이 놓였다. 나는 니스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기차를 타고 세 시간 반 정도 가면 릴르-슈흐-라-쏘흐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마을의 이름은 눈으로 보아도,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봐도 도무지 적응이 안된다. 불어 발음으로 'r'은 '흐'에 가까운 소리인데, 아무리 연습해도 어딘가 어색하다.

 

 지현이는 파리에 닿자마자 여독을 풀 새도 없이, 다시 남프랑스까지 기차를 타고 오랜 시간 달려와야 했다. 내겐 어린 아기 같은 동생이 과연 이 마을까지 무사히 올 수 있을까, 기차를 놓치거나 잘못 타는 건 아닐까, 소매치기를 당하면 어떡하나.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걱정은 켜켜이 쌓여 갔지만, 동생은 정말 씩씩하게 나보다 일찍 도착해 있었다. 오가는 이도 몇 없는 적막한 기차역에서 만나게 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외치며 폭 안았다. 잊히지 않는 지현이의 한마디. ‘언니, 우리가 여기서 볼 줄 누가 알았어?’


 기차역 앞에서 캐리어를 의자 삼아 잠시 앉아 있었더니, 하얀색의 트럭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Valerie는 온화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녀는 차에 올라타라는 말과 함께 여기서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작은 동네다 보니까 City Center도 금방 나오고, 대부분의 관공서, 학교, 병원 그리고 식당이 한데 모여있었다. 주택가로 이어지는 길에는 대형 마트와 주유소 등이 있었다. 발레리의 집은 한마디로 ‘농가’였다. 본인이 머무르는 집과 바로 옆의 게스트하우스, 그리고 앞뒤로 있는 밭 그리고 근처의 비닐하우스까지. 그녀는 생각보다 넓은 면적의 밭을 소유하고 있었고, 실제로 지역 마켓에서 생산물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녀가 재배하고 있는 작물은 네 종류의 상추, 배추, 양파, 당근, 토마토, 바질, 콜리플라워 등이다. 또한 비닐하우스 옆 닭장에서 수탉과 암탉을 골고루 키우며 달걀을 공급받고 있었다.


 우리는 운 좋게도 게스트하우스 한 채를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에 Valerie의 친구 부부와 카우치서핑 게스트가 와서 잠시 집을 공유하기도 했지만 고작 하루 이틀뿐이어서, 마치 이곳을 우리의 집처럼 썼다. 도착하자마자 방 안에, 거실에, 부엌에 그리고 욕실 곳곳에 우리의 짐을 풀 때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캐리어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을 꺼내 놓았기 때문에 게스트하우스는 금세 보경&지현 하우스가 됐다. Valerie가 우리를 부를 때는 아침에 일을 나갈 때와 점심 저녁에 식사를 할 때뿐이었다. 그녀는 우리의 독립적인 시간을 철저히 존중해주었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시간 또한 존중되기를 바랐다. 


 짐 정리를 끝내고 다시 바로 옆집인 Valerie의 집에서 첫 저녁식사를 했다. 그녀의 식탁은 더없이 건강했고, 싱그러웠다. 유기농으로 재배된 여러 작물이 식탁에 고스란히 올라온 것을 보자, 내가 꿈꿨던 우프 라이프가 실현된 것 같아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박스 형태의 와인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레드, 화이트, 로제까지 종류별로 있었다. 원하는 만큼 맘껏 먹으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와인부터 맛보았다. 쪼르르- 하며 흘러내려오는 와인은 시원하면서도 달콤 쌉쌀했다. 아무래도 이때부터 나의 와인사랑이 한층 더 깊어진 것 같다. 식사를 마치자 Valerie는 아침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챙겨가라고 했다. 우리는 곡물식빵과 시리얼, 사과, 견과류, 주스 등을 챙겨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을 위해 이른 잠을 청했지만, 꽤나 뒤척인 후에야 잠들 수 있었다.


 노동의 일과를 집약하자면, 월요일부터 목요일의 오전 8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일했다. 이후로는 모두 자유 시간.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일이 아예 없어서 남프랑스로의 여행이 가능했다. 우리는 Valerie와 함께 일하는 시간만큼은 쉬는 시간 없이 철저히 일했다. 처음에는 비닐하우스에서 모종 심기를 하고, 옆에서 자라는 바질을 캐서 꽃다발 모양으로 손질했다. 밭에서는 상추, 콜리플라워, 당근을 캐고, 이따금씩 양파와 감자를 분류하는 작업도 했다. 또한 겨우내 말라비틀어진 토마토 밭을 재정비하고, 농사 지을 때 필요한 천과 호스 등의 장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도 했다.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하는 단계부터 판매용으로 다듬는 작업 단계, 그리고 마켓으로 배송하는 마무리 단계까지. 일련의 과정을 몸소 체험해본 결과, 농사일은 참으로 지혜로워야 하고, 무엇보다 몸이 부지런해야 하며, 매우 고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후에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낭만 가득한 시골살이 묘사를 보아도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면이 먼저 눈에 그려진 나였다. 직접 키우는 농산물이 우리의 식탁에 짜잔! 하고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알아서다.


  Valerie는 부모님의 집과 토지를 이어받아 2008년도부터 농사를 짓고 있는 베테랑 농부였다. 그녀가 생산물을 납품하고 있는 'La Banaste'는 마을 주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마켓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녀는 때때로 기관에서 교육을 들으며 유기농 농사법을 배우고, 연구한다. 일에 관해서라면 한시도 쉬지 않고 바지런히 움직이는 그녀는 참 대단하고 강인한 사람이자 스스로 삶의 균형을 찾아갈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일할 때는 완전히 몰입해서 하고, 쉴 때는 또 확실히 쉬고. 항상 정확하고. 하지만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도 사춘기 아들 앞에서는 쩔쩔매는 엄마였다. 국제학교 기숙사에 다니고 나서부터 방학 기간에만 집에 오는 아들 Lilian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친구들과 놀러 갈 때 직접 데려다주고, 여가시간에 같이 요가와 마사지를 한다. 특히 그녀는 전 남편과 아들이 잘 지낼 수 있도록 중간에서 신경을 많이 쓴다. 그녀가 아들을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 모든 엄마는 다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엄마가 보고 싶어질 때면 그녀와 보내는 시간 속에서 힘을 얻곤 했다. 우리의 대화의 온도는 언제나 적당했고,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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