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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29. 2018

증권 거래의 탄생 (1)

증권의 시작 - 향신료의 역사

  

1. 증권이란?     


주식 증서, 채권, 기타 보증부채 또는 기업의 자산분배나 이익분배에 관한 것을 소유자에게 부여하는 권리를 증권이라 합니다.     


법률상의 효력에 따라 유가증권(有價證券)과 증거 증권(證據證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로 증권은 유가증권(有價證券, securities)을 말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유가증권이란 상법상의 재산권을 표시하는 증서를 말하는 것으로 단순히 ‘증권’이라고도 합니다.   

  

유가증권은 권리의 이전·행사를 원활하고 안전하게 하고 유통성을 높이기 위해 근대 자본주의가 발달시킨 제도입니다.     


유가증권은 경제적 성질에 따라 물품 증권 혹은 상품 증권(선하증권ㆍ물품교환권), 화폐 증권(어음ㆍ수표), 자본증권(주식ㆍ채권)으로 구분되는데 일반적으로 '증권'이라고 할 때는 자본증권만을 가리킵니다.     


증권시장에서 다루는 것도 이 자본증권으로, 상장되어 있는 주식 및 채권을 지칭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증권은 언제부터 생겨나게 된 걸까요?     


우선 증권의 역사를 알기 위해선 당시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역사 중에서도 향신료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향신료의 역사     


향신료(香辛料, spice)는 음식의 맛과 향을 돋워 주는 첨가물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항해 시대는 이 향신료를 얻고자 하는 유럽인들의 갈망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향신료는 음식에 감칠맛을 더하고 향기와 색상을 더해 입맛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식물의 열매, 씨앗, 꽃, 뿌리가 모두 향신료가 될 수 있으며 향신료는 음식의 맛과 향을 북돋거나, 색깔을 내어 식욕을 증진시키고 소화를 도우며, 육류의 누린내와 생선의 비린내를 없애는 기능도 하였습니다.     


향신료는 후추, 겨자, 고추, 바닐라, 사프란, 생강, 계피, 육두구, 올스파이스, 정향, 통카 열매, 고추, 깨, 파, 마늘 등 그 종류가 매우 많습니다.      


또한 넓은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 즐겨먹는 간장, 된장, 고추장 등 장류(醬類)와 설탕, 소금도 향신료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향신료 들은 대항해시대를 통해 세계 여러 곳에 전파되어 각국의 식생활을 변화시켰습니다.   

 

고대에도 이러한 향신료, 허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대 수도승이나 의사들에 의해 쓰인 허벌(본초서)은 허브의 형체에서 심벌과 사인을 찾아 그 특성에 따른 이용법을 기술하고 있으며 스위스의 호서 유적, 남미 안데스산의 잉카 유적 등의 유적에서 고대 인류가 식물을 양식 이상의 치료제로 사용해 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유적에서 발견된 아니스, 마조람 등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허브를 실생활에 다양하게 이용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신약성서』에서도 예수가 돌아가신 후 그 시신에 스위트 밤 등 각종 허브를 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6세기경 아라비아 상인들은 중국ㆍ인도네시아ㆍ인도 등지에서 배 또는 낙타를 타고 이동하여 향신료를 이집트ㆍ그리스ㆍ이탈리아에 판매하였으며, 7세기경 향료 상권을 침공한 나라에서 가져온 모하메드가 죽은 후, 기회를 노리던 베니스의 상인들이 재빨리 향신료 시장에 뛰어들어 많은 수익을 올려 바다 위에 건축물과 예술적 걸작들을 남겨 오늘날까지도 관광객이 줄을 이으며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8세기경 모하메드의 후계자들은 스페인을 침공 사프란을 가져가 공급했으며 그 후에 사프란은 요리에 필수적인 향신료가 되었습니다.     


9세기경 유럽에서 향신료의 가치가 폭등하면서 Mace(육두구) 1파운드(약 450g)가 양 세 마리의 가치였고, 카더몬 1온스(약 28g)는 평민 1년 치 생활비에 맞먹었으며, 한 컵의 후추는 한 명의 노예와 맞바꿀 정도의 가치가 있었고, 은과 같은 가격으로 화폐로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샤프란


정향


육두구


이 당시 아랍 상인들이 향신료를 어디서 가져오는지 유럽인들은 몰랐습니다.    

  

아랍 상인들이 독점권을 갖기 위해 원산지를 극비에 부쳤으며 극동이나 근동에서 향신료를 가져오기 위해 수개월 동안 목숨을 거는 위험을 무릅쓰고 고생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로 알려져 있는 사프란(舒福蓝, saffron)은 이란이 주산지입니다. 전 세계 사프란의 90% 이상이 이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정향(丁香, Clove)은 정향나무의 꽃봉오리로, 인도네시아 몰루카 섬이 원산지입니다. 육류의 누린내를 잡아주기 때문에 돼지고기 요리에 주로 쓰이며, 푸딩, 수프, 과자류에도 이용됩니다.     


육두구(肉荳蔲, Nutmeg)는 인도네시아 몰루카제도가 원산지로, Nutmeg란 이름은 사향 향기가 나는 호두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초에 전해져 생선요리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설탕(雪糖, sugar)은 인도가 원산지입니다.     


당시 귀족들에게 인기 있던 후추 (胡椒, pepper)는 아랍의 여러 지방과 인도 남부가 원산지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향신료는 유럽에서 생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향신료는 유럽 사람들에게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물건이 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이 비싼 가격에도 불구 무리해서까지 향신료를 구하려고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 당시 유럽의 음식이 맛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통이 불편하고 냉장시설이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소금에 절인 저장육이 주식이었고, 그 외에는 북해에서 잡은 생선을 절여 건조한 것 정도였기 때문에 향신료라도 사용하여 맛을 돋우지 않으면 먹기 어려웠습니다. 

   

둘째로 약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향신료를 뜻하는 영어 스파이스(spice)는 라틴어로 ‘약품’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 당시 서양의학도 아직 유치하여 모든 병이 악풍(惡風)에 의해 발생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악풍이란 악취, 즉 썩은 냄새로서, 이 냄새를 없애려면 향신료를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일례를 들면 런던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환자가 발생한 집에 후추를 태워서 소독했다고 합니다. 사실 향신료류에는 어느 정도 약효도 있고 소독효과도 있으므로 현재 한방약으로 사용되는 것도 있습니다만 그 당시에 몹시 과대평가되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 외에 악마 또는 귀신을 쫓는 약으로도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했기 때문에 향신료는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유럽인들은 후추를 얻기 위해 유럽에서 동남아시아로 이어지는 직항로를 개척하려 했고, 이것이 세계사를 바꾼 계기가 되었습니다.           



3. 향신료, 유럽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          


향신료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후추’입니다. 이집트 파피루스에 등장하고 로마 시대에도 인기를 누렸던 후추는 35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최고의 향신료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후추는 매우 귀했습니다. 말린 후추 열매 1파운드(약 453g) 면 중세 영주가 소유한 농노 1명의 신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귀족들은 비잔틴 제국을 통해 후추를 수입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비잔틴 제국이 무너지자 후추 값이 폭등했습니다.      


안 그래도 상당한 가치가 있던 후추였는데 값이 더 오른 것입니다.      


이슬람 세력에 의해 공급이 끊겨 가격이 오른 후추는 십자군 전쟁의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후추는 음식을 먹기 위해 필요하기도 했지만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했기에 후추의 공급이 끊기는 것은 심각한 경제 위기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후추는 ‘고작 양념 중의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손쉽게 얻을 수 있지만, 향신료는 중세 유럽에서 매우 귀한 사치품이었습니다. 향신료에 대한 수요가 넘쳐나자 열강들은 직접 향신료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고, 이는 대항해시대를 여는 기폭제가 됐습니다.      


계속된 전쟁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력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이슬람을 거치지 않고 인도에서 후추를 사 올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전까지 지중해를 중심으로 근거리 항로만 이용하던 유럽의 항해 기술로 인도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항해술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해도 아직까지 원거리 항해는 쉽지 않았습니다. 몇 달간 바다 위에서 떠돌다 보면 빵은 돌처럼 딱딱해지고 물은 썩어버렸습니다. 당시의 배는 바람에 의존하는 범선이었기 때문에 혹 무풍지대라도 들어가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꼼작 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항해사 바스코 다 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 선단이 1498년 인도의 고아에 입항하는 데 성공했고 향신료를 잔뜩 싣고 리스본으로 돌아왔습니다.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 기념비

    

  

유럽인들은 이제 이슬람의 횡포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가격으로 후추를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 향신료 무역은 포르투갈이 독점하게 되고 전 유럽의 돈은 리스본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이를 갈면서 독자적으로 항로를 개척하려 힘을 쓰게 되는데 그로 인해 대항해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스파이스 루트

각 나라의 항로 개척을 통해 발견된 길을 스파이스 루트(spice route)라고 부릅니다.      


포르투갈이 인도까지 가는 항로를 발견해 후추 무역을 독점한 것만으로 순식간에 강대국으로 거듭났던 것을 보면 ‘후추를 얻는 자 세계를 얻는다’라고 할 정도로 후추는 많은 의미를 가진 향신료였습니다.     

     

콜럼버스와 이사벨라 여왕                  

         

  

마드리드 콜럼버스 기념비

     

어떻게든 후추가 지천에 널린 인도의 항로를 찾아 인생 역전을 꾀하고 싶었던 콜럼버스. 하지만 그에게는 인도까지 항해를 시도할 만한 함대도 선원도 없었습니다.      


그저 계획만 가지고 있었던 그는 포르투갈의 좋아 2세를 비롯한 각국의 왕들에게 접촉해 지원을 요청했지만 허술한 계획과 과도한 요구로 가는 곳마다 번번이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3척의 함선과 120명의 선원(전부 죄수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면 이사벨라 역시 콜럼버스에게 과도한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을 지원받게 되어 후추의 성지 인도를 향해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콜럼버스 항로

콜럼버스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인도에 도착하는 계획을 세우고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만약 그 계획대로 항해가 되었다면 그는 분명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유럽과 인도 사이에는 아메리카 대륙이 존재했습니다.    

 

1492년 10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신대륙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에 그곳을 인도로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서인도제도’라고 부르고 그곳 사람들을 ‘인디언’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본국에는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발견했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후추가 없었습니다. 다만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황금이었습니다.     


본국으로 돌아온 콜럼버스는 이사벨라 여왕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후추는 가져왔는가?”     


“폐하, 후추는 없지만 금이 널려 있습니다. 다시 한번 지원해 주시면 금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금이 있다는 소식에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에게 1차보다 더 많은 지원을 해주게 됩니다.     


2차 원정에서 콜럼버스는 도합 17척의 배를 지원받았고, 1차 원정과 달리 이때는 배에 대포도 장착하고 선원들을 칼과 갑옷, 총으로 무장시켰습니다. 1차처럼 면죄부를 전제로 여전히 범법자 선원을 모집하기는 했지만 여기에는 전직 군인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후추의 원산지 루트, 스파이스 루트를 뚫으려 했던 콜럼버스는 후추를 찾지 못하자 후추가 아닌 다른 뭔가 가치 있는 것을 가져와야만 했습니다.     


이 손실을 금으로 채우려 했으나 의외로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금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후 3차 원정에서는 더 많은 원주민들을 학살하였고 그럼에도 불구 원하는 만큼의 금을 얻지 못하자 원주민을 데려가 노예로 팔게 되었습니다.     


향신료에 대한 욕심은 세계사를 바꾸었습니다.     


향신료는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 상상 이상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바스코 다가마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까지의 항로를 개척한 일, 마젤란의 세계일주 등의 목적 중 하나는 향신료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유럽인들의 세계 식민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유럽에 향신료의 원산지가 알려진 것은 13세기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들어간 마르코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이 15세기 독일어로 번역되면서부터입니다. 


『 동방견문록』이 늦게 번역된 것도 베니스 상인들이 향신료 무역 독점권을 보다 오래 유지하기 위해 다른 나라 서책의 출간을 늦추었기 때문입니다.      


향신료 무역을 이슬람으로부터 탈취하려고 한 것이 15세기 말~16세기 초에 걸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의한 원양항로의 개발이고, 그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이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상당히 불확실한 부분도 있으나, 그는 베니스의 상인답게 향신료의 산지에 대해 정확히 기술하였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향신료 획득 전쟁은 결국 동방을 향한 포르투갈이 서방을 향한 에스파냐를 이기고 그 무역권을 독점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포르투갈도 몰락하고, 17세기 초부터는 네덜란드가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향신료를 동인도에서 유럽으로 가지고만 오면 엄청난 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으로 갈 항해 선단을 구성한다는 것은 당시 부자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갑부 아니라면 국가에서 지원이라도 받아야 수백 명의 선원의 인건비와 수척의 함대 그리고 그들이 사용할 식량을 비롯한 소모품의 값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대개 3척 가도 1-2척만 돌아올 수 있을 만큼 당시 장거리 항해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당시 런던의 상인 중 혼자서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부자는 흔치 않았습니다. 아니 설령 재산이 있다 해도 실패 가능성을 고려할 때 혼자 할 엄두는 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영국의 모험적인 상인들은 일종의 공동 투자를 제안했습니다. 이 일확천금을 꿈꾸는 항해에 여러 사람들이 투자를 하기로 하면서 이른바 "company" 가 설립되었습니다.    

  

이것이 동인도 회사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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