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의 역사
보험(保險, insurance)은 비슷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자신의 위험을 제3자(보험회사)에게 전가하는 사회적 장치나 제도를 말합니다. 보험을 통해 각자가 겪을 수 있는 손실을 한데 묶음으로써 손실의 통계적 예측을 가능하게 하고, 자신의 위험을 제3자에게 전가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보험료(premium)로 발생손실을 보상해줍니다. 각종 위험에 대하여 공동으로 대응하여 손실의 회복을 꾀하는 보험과 유사한 제도는 고대사회에서부터 존재하였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서로 돕는 관행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해온 사회적인 풍속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이념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뜻하지 않던 사고나 재난을 당했을 때 공동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는 상호부조(相互扶助)의 관행이 국가적으로 장려되고, 또한 사회적으로 널리 시행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사회에서는 오가통, 두례, 계, 향약, 사창 등의 상호부조 제도가 존재했습니다.
로마 제정 후기의 동직조합(同職組合)인 콜 레기아(collegia)는 3명 이상으로 구성된 사적인 결합입니다. 기능면에서 신앙, 오락, 상호부조를 위한 결합이었습니다.
콜 레기아는 조합원의 사망 시 장례 지원금 및 유족의 생활비를 지급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의 상조회(相助會)와 아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콜 레기아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자신들이 모시는 신에 대한 종교의식을 위해 조직한 것이었습니다. 현세가 아니고 내세에서의 구제를 주장하는 그리스도교가 뿌리 깊게 정착해있었으므로 특히 장례는 굉장히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조합원이 사망했을 때는 매월 일정 금액을 각출해서 모아두었다가 차후에 장례비용을 지불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이 장례지원금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점차 유족의 생활을 돕는 용도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라누 비움(Lanuvium) 마을의 콜 레기아 사례를 살펴보면, 이 조합은 조합원의 사망 시 75데나리우스에 해당하는 지원금을 지급받았으며 군인들의 콜 레기아였던 코르니 친 콜 레기아(College of the Cornicines)의 경우 조합원의 사망 시 500데나리우스를 지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콜 레기아의 모습은 생명보험이라기보다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상조회에 더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로마시대의 콜 레기아(collegia)의 전통은 중세에 들어서 길드(guild)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길드에 대한 최초의 기술은 779년 칼 대제의 문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의 길드는 콜 레기아와 비슷한 종교적 모임으로 추정됩니다.
이 외에도 잉글랜드의 이나 왕(Ina, 688~725)과 알프레드 대왕(Alfreds, 871~901)의 법전에서도 길드 조합원들의 손해 발생 시의 보상 등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상인 길드의 경우에는 영국에서 가장 먼저 발생한 것으로 에드워드 1세(Edward I, 1239~1307) 때에는 총 92개의 상인 길드가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많은 길드가 경쟁적으로 발달하면서 사망뿐만 아니라 화재, 질병, 도난 등 조합원들이 각종 피해를 입었을 때 이를 보상해주면서 기능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중세시대 교회에서는 8세기부터 은퇴한 성직자를 위한 종신 연금제도가 등장하였습니다.
성직자가 은퇴를 하면 그가 사망할 때까지 매년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였습니다.
이러한 종신연금의 한 예로 1308년 성 데니스 수도원장이 브레멘의 대사제에게 체결한 종신연금계약이 있는데, 이 계약은 대사제가 수도원에 2400 리브르를 지급하고, 수도원은 그에게 사망 시까지 매년 400 리브르를 지급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습니다.
덧붙여 2400 리브르를 납입하고 2년 이내에 대사제가 사망하였을 경우 상속인에게 1000 리브르를 반환하는 약속이 걸려 있었습니다.
한편 국가 주도의 연금은 봉토를 대신하여 지급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잉글랜드의 헨리 1세는 1103년 프랜들 백작에게 매년 400마르크의 연금을 지급하고 여기에 대하여 프랜들 백작은 헨리 1세에게 각각 3 필의 말을 소유한 1000명의 기사를 제공하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러한 상호부조로의 형태로 존재했던 초기의 보험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근대적 보험으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전통사회의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발상에서 시작한 상호부조가 근대적 보험으로 발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보험이 서로서로를 돕는 형태에서 돈벌이 수단으로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17세기에 와서 파스칼(Pascal) 등에 의하여 창안된 확률론의 발전, 18세기 베르누이(J.Bernoulli)의 대수의 법칙 등 수학의 발전을 기반으로 근대적 형태의 생명표가 영국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헬리(Halley)에 의하여 처음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로서 평가나 보상이 편리해짐으로써 이후 근대적 보험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급속히 발전하였습니다.
15세기 유럽은 배들이 세계 곳곳의 바다를 누비며 대륙 간 항로를 개척하고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대항해 시대였습니다.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에스파냐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497년 인도양의 희망봉을 개척한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 1519년 세계일주를 시작한 마젤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식민화를 위한 해상활동, 네덜란드와 영구의 해양 패권 경쟁 등 유럽의 배들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활발한 해상 활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활발한 해상활동으로 사고의 규모가 그 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커지게 되어 생명을 담보로 사망 시 지급되는 형태의 사망보험이 15세기에 이르러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알렉산더 핑 글랜드 잭(Alexander Fingland Jack)은 “그것은 해상에서 발생하는 선박과 적하의 손실 리스크를 감당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생명에 대하여 대상(선박과 적하)과 유사한 계약을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당시 해상 활동을 중심으로 작성된 생명보험 계약은 크게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피보험자가 납치되었을 시 석방에 필요한 금액을 대납해주는 형태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예의 생명을 피보험 대상으로 하는 계약이었습니다.
피보험자가 납치되었을 때 석방 금액을 대납해주는 예로 바르셀로나의 베르나르디 드 페레라(Bernardi de Ferrera)의 인질 보험 계약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1501년 10월 발렌시아에서 사르디니아로 향하는 항해 중 자신이 납치되었을 경우 300 두카트 한도 내에서 석방에 필요한 금액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5 바르셀로나 파운드 8실링(보험금의 1.6%에 해당)을 납입하였습니다.
노예의 생명을 대상으로 한 보험은 이보다 조금 이른 시기인 1467년의 것으로, 역시 바르셀로나의 외과의사인 베르나 데 로르(Bernat dez Lor)가 그의 노예인 마리아(Maria)를 피보험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그녀는 당시 35세로 임신 4~5개월 차의 산모였으며, 그녀가 항해 중이나 항해 후 8일 이내에 임신, 혹은 출산으로 인해 사망한다면 3개월 내로 50 바르셀로나 파운드를 지급받는 조건이었습니다. 이 계약의 보험료는 월 4파운드로 보험금의 8%에 해당하는 보험요율이었습니다. 또한 1501년에는 루시아(Lucia)라는 산모가 3월 22일부터 12월까지 출산이나 여타의 이유로 사망할 경우 보험료를 지급하는 보험 계약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런던이 정의의 피를 요구하리니
6이 세 번 반복되는 해에 불벼락이 내리리라.
고대의 여인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그와 같은 많은 전당들이 소실되리라.‘
-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
런던 대화재(Great Fire of London)는 1666년 9월 2일 새벽 2시경, 빵 공장에서 일어난 불이 런던 시내로 번진 대화재를 말합니다.
당시 화재는 소방담당자의 무책임으로 인해 조기에 진화되지 않아, 5일간 87채의 교회, 1만 3천채의 집이 불에 탔습니다.
9명이 희생되었으며, 당시 인구 8만 명 중 7만여 명이 집을 잃고 노숙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 화재로 세인트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이 불타 버렸습니다.
런던 대화재가 일어나기 수년에서 수십 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예언서로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는 1666년 발생한 런던 대화재에 대해서도 자신의 저서에서 위와 같은 예언을 했습니다.
‘런던이 정의의 피를 요구하리니 ‘
실제로 빵집에서 시작된 불길은 5일 동안 대부분 목조 건축물로 이루어진 런던 시내 가옥의 80%를 태워버렸습니다.
불타버린 런던 시내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대화재가 일어날 것을 염려한 영국은 목조 건축에 제한을 두기 시작하였습니다.
런던은 이후 석조와 벽돌 건축물들을 위주로 재건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당시 내란과 역병으로 고생하던 런던 시민들에게 대화재는 그들의 미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고 런던 시민들은 앞으로 혹시나 또 올지 모르는 재앙을 대비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이러한 불확실한 미래의 재앙을 대비하기 위해 ‘화재 보험’이 등장하였습니다.
기존에 유럽의 길드 등의 조합에서도 화재 등의 사고를 보상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화재보험이라는 성격보다는 길드 조합원의 전반적인 손해를 보상해 주 것이 걷고 그중에 화재에 대한 보상도 포함이 된 것이었습니다.
독립적인 최초의 화재보험 회사는 런던 대화재가 발생한 이듬해인 1667년 치과의사 니콜라스 바본(Nicholas Barbon)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국왕의 명을 받아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르는 화재에 대비하고, 런던 대화재의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대화재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런던 시민들에게 ‘혹시 화재가 발생하여도 그 피해 금액을 보상해 준다’라는 제안은 런던 시민들에게 너무도 솔깃한 소식이었습니다.
그저 화재 사무소(fire office)로 시작했던 이 사무실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화재보험사들이 급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본의 화재보험 사무소는 1680년 합자회사로 성장하여 단기간에 정착한 대표적인 화재보험회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1705년 피닉스 화재 사무소(Pheonix Fire Office)로 개명하면서 약 100여 년 간 영업을 지속했습니다.
하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화재보험회사는 자본의 화재 사무소가 아니라 1710년 런던의 찰스 포베이(Charles Povey)가 설립한 런던 보험회사(company of London insurer)입니다
이 회사 역시 화재보험 가입 붐에 힘입어 빠르게 전국으로 영업망을 확대하였습니다.
런던 보험회사는 1726년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선 보험 사무소(Sun Insurance Office)로 개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합병을 거치면서 현재 전 세계 140개 국가에서 1700만 명의 가입자를 가진 RSA 보험그룹(RSA insurance group)으로 영업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15세기 ~ 17세기까지는 서유럽 나라들이 새로운 바닷길을 통해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던 대항해 시대였습니다.
앞에서도 해상활동으로 사고의 규모가 그 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커지게 되어 생명을 담보로 사망 시 지급되는 형태의 사망보험이 15세기에 이르러 등장하기 시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해상무역으로 인한 상인들의 물건의 손해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위험에 노출되는 해상무역을 하는 상인들 사이에서는 손해에 대한 보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중 최초의 해상보험 거래는 런던의 한 커피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 로이드 커피점이었습니다. 이후 로이드의 사망 뒤에도 그곳에 모이는 보험업자들은 로이즈(Loyd's)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계속했습니다.
이 영국 런던의 로이즈(LIoyd's) 커피하우스가 근대 보험의 기원이 됩니다.
로이즈 커피하우스는 1687년경 사무엘 로이드(Samuel Lloyd)가 처음 문을 열었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로이드(Edward Lloyd)가 물려받으면서 점차 사업가나 학생뿐만 아니라 항해와 관련된 사람들의 모임 장소로 발전하였습니다.
선원들은 로이드 커피하우스에서 바다 날씨와 만조 시간, 해적 출몰지역, 나라별 특산품, 선박의 출항 및 도착 시간 등 각종 무역거래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기 시작했고, 이 모습을 본 에드워드는 고객들의 편의를 위해 화물선의 출발 시간이나 도착 날짜 등 중요한 정보를 종이쪽지에 적어 벽에 붙여 놓았습니다.
에드워드는 손님들의 반응이 좋자, 1696년부터 '로이즈 리스트(Lloyd's List)'라는 정기 정보지를 발간해 무역 거래에 관한 중요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2면으로 구성된 로이즈 리스트는 주 3회 발행되었으며, 여러 가지 유익한 기사와 소식이 실림으로써 당시 무역상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신문이 되었습니다.
에드워드는 해상무역 과정에서 여러 손실 리스크에 공동으로 노출되어 있던 선원들에게 보장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이를 놓치지 않고 리스크를 보험업 자들끼리 공동 인수하기 시작하면서 언더라이터(Underwriter; 유가증권의 인수를 업무로 하는 금융업자 또는 보험계약을 인수하는 보험업자)가 되는데, 바로 이것이 영국 해상보험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또한, 에드워드는 정식 보험약관은 아니지만 종이 한 장(slip)에 보상내용을 약속한 뒤 하단에 서명(underwriting)을 했고, 이것이 해상보험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종 잇 조각'이라는 뜻의 slip은 오늘날 보험을 가입할 때 쓰는 '청약서'란 용어로 사용되고, 현재 증권사나 보험사 등이 '위험 심사 및 인수'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언더라이팅(underwriting)'이라는 금융용어 역시 에드워드가 보험료를 받고 위험을 인수하면서 계약서의 합의 조항 아래(under)에 그의 이름을 써주고(writing) 약속 이행을 확약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로이즈 커피하우스의 고객 중 상업이나 선박업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보험회사 대리인 그룹이 눈에 띄게 불어났고 1771년에는 재력과 신뢰를 갖춘 79명의 언더라이터들이 입회비 100파운드를 납부하고 로이즈 협회(Society of Lloyd's)를 결성하였습니다.
18세기를 지나면서 로이즈 커피하우스는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인 런던 로이즈(Lloyd's of London)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1799년 네덜란드 북쪽 웨스트 프리지어 제도에서 폭풍우를 만나 ‘루틴 호’가 침몰하였습니다.
이 배에는 당시 가치로 120만 파운드 어치의 금덩어리와 금화를 싣고 있었습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억 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거액입니다.
배에 타고 있던 240여 명의 인원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숨졌습니다.
로이드 보험회사는 이 금 전체에 대한 보험금을 지급하였습니다. 이후 선체 인양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금을 건져내지도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로이드 보험회사는 엄청난 손해를 보아야 했습니다.
현재 로이드 거래소 한 복판에는 이 사고를 기억하기 위한 ‘루틴 벨’이 있습니다.
바다에 나간 배가 실종되면 종을 울렸다고 합니다.
네덜란드 북쪽 바다에는 당시 ‘루틴 호’의 엄청난 보물이 잠자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최초의 해상 보험 회사는 1720년에 조지 1세의 특허장을 받은 로열 익스체인지 어슈어런스(Royal Exchange Assurance)와 런던 어슈어런스(London Assurance)입니다.
당시 혼란에 쌓인 금융시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화재보험, 생명보험, 해상보험 영업에 특허를 가진 유일한 회사들’로 특허장을 발부했습니다.
당시의 법안은 이 두 회사를 제외한 어떠한 회사도 해상보험 영업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두 회사는 생명보험과 해상보험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고, 화재보험에 집중하였습니다.
왕의 명령으로 소집된 보험업자들에게 당시 해상ㆍ생명보험 업계가 짊어져야 했던 리스크는 너무 컸던 것입니다.
로열 익스체인지 어슈어런스가 1720년 창립 이후 40년 간 생명보험으로 얻은 수익은 10,915파운드에 불과했으며, 해상보험의 경우 런던에서 거래되는 해상보험의 90%를 로이드 커피하우스의 개인 보험업자들이 소화하고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이 두 회사는 해상ㆍ생명보험 분야에서는 거의 영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법안에도 불구하고 로이드의 개인 보험업자들이 영업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로열 익스체인지와 런던 어슈어런스를 제외한 어떠한 ‘회사’도 영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규제 법안의 내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이드의 보험업자들은 보험업을 하는 ‘개인’ 들일뿐, 회사가 아니었기에 법망의 규제를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생명보험의 기원은 앞서 살펴보았던 고대 로마의 한 매장 조합이었던 콜 레기아(collegia), 중세의 길드(guild)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상호부조(mutual aid, 相互扶助) 제도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근대적인 생명보험제도는 근대 자본주의, 특히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 초기에 영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17세기 후반 화재보험의 성공에 힘입어 영국에서는 수많은 보험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해양 보험은 물론 가족의 병이나 장애의 구제를 위한 보험, 스스로 빚을 변제할 능력이 되지 않는 이들을 위한 보험, 자녀가 많은 이들의 이익을 위한 보험 등의 수많은 보험들이 생겨났고 이때 생명보험 또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확률론(確率論)이 연구되기 시작하고, 보험사업의 기초인 생명표(生命表)가 나옴으로써 18세기 초 비로소 근대적 생명보험이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1762년 생명표에 의거하여 가입자의 나이에 따라 보험료를 달리하는 보험을 창안한 에퀴터블 생명보험회사가 영국에 설립된 것이 근대적 생명보험회사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생명보험은 1699년에 문을 연 머 서즈 컴퍼니(Mercer's Company)였습니다.
본래 포목상들의 조합이었던 머 서즈 유니온(Mercer's union)이 조합원들의 복지를 위해 시작한 보험업이 머 서즈 컴퍼니로 확장된 것입니다.
이 회사는 가입자가 죽을 때까지 납입한 금액의 이자를 사망 시에 지급하는 회사였는데, 그 이자율이 무려 30%나 되었습니다. 지금의 시대에 생각하여도 어머어마한 이자율이었습니다.
당연히 회사는 영업을 시작한 지 몇 년 만에 파산에 이르렀고, 설립자의 뜻을 기려 몇몇 상인들이 마련한 구제 기금을 받고도 얼마 가지 않아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생명보험 회사는 어디일까요.
최초의 생명보험회사는 1706년에 설립된 아미 카블 소사이어티(Amicable Society for a Perpetual Life Assurance)로 볼 수 있습니다.
“아미 카블은 이제까지 보다 좀 더 쉽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부인이나 자녀 혹은 다른 지인에게 (사망보상금을) 지급하고자 하는 모든 구성원들의 상호 이익을 위하여 다음의 문서에 명시된 방법으로 자애로운 기여에 의해 상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세워졌다.”라고 아미 카블 소사이어티의 특허장에 설립 의의가 적혀 있습니다.
생명보험은 화재보험 회사인 니콜라스 바본(Nicholas Barbon)의 화재 사무소(fire office), 해상보험의 시작인 로이즈(LIoyd's) 커피하우스에 비교하여 상당히 늦은 시점에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보험에 비해 생명보험이 늦게 만들어진 이유는 당시에는 인간의 사망률을 예측하고 적정한 보험료를 책정할 만한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보험에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된 생명 통계가 최초로 정립된 것은 1693년의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 1656~1742, ‘핼리혜성’으로 유명한 그 핼리이다)의 사망 통계였습니다.
그러나 이 통계는 기본적으로 연금 지급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사망 통계의 작성과 수학의 발달은 계속되었지만, 결국 사망보험에 사용할 만한 제대로 된 통계가 등장한 것은 1764년이나 되어서야 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1706년에 설립된 아미 카블 소사이어티는 어떠한 방식으로 생명보험을 운용한 것일까요?
1705년 플리트가의 서점 주인이었던 존 하틀리는 가입자가 사망한 뒤에 일정 기간 동안 유가족에게 지속적으로 연금을 지급해야 하는 기존 연금보험 체계의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형태의 보험을 개발했습니다.
이는 당시 보험 가입자의 수요를 제대로 진단한 것이기도 하였는데, 부실한 보험회사나 사기 보험이 워낙 난무하던 시기라 약속된 기한까지 제대로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틀리가 도입한 방법은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고 있던 톤틴 연금을 생명보험에 적합하게 변환한 것이었습니다.
톤틴 연금은 이탈리아의 톤틴이 개발한 방식으로, 가입자를 2000명 단위로 모집하여 기금을 조성하고 그 이자를 2000명이 균등하게 나누어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시간이 지나 가입자가 사망하게 될수록 가입자 1인에게 돌아가는 이자 수익이 늘어나고, 최후의 1인은 2000명 분의 이자를 혼자서 받게 되는 방식으로 운용되기 때문에 누가 더 오래 살아남느냐로 당첨이 결정되는 복권과도 같았습니다.
하틀리가 톤틴 연금의 방식을 생명보험으로 전환하면서 변화를 준 부분은 보험금의 수령을 살아남은 사람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해 사망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분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전환은 톤틴 연금이 가지고 있던, 같은 연금 상품에 가입한 ‘내 이웃이 빨리 죽기만을 기다리는’ 도덕적인 결함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또한 사망 시에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생명보험과 조금 더 가까워진 것이기도 합니다.
생명보험 업계에서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사망률을 예측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인간의 사망률과 보험 산업을 처음 결합한 것은 1764년 문을 연 에퀴터블 생명보험(Equitable Assurance)이었습니다.
에퀴터블의 고안자인 제임스 도슨(James Dodson, 1705~1757)은 최초로 통계와 확률론을 도입하여 예상 수명을 예측하고 이를 보험에 이용하여 적절한 보험료 및 보험업자의 수익성을 보장하였습니다.
최초의 보험계리인인 윌리엄 모스 델은 나이에 따른 생존율을 기록한 노샘프턴 생명표(Northampton Table)를 기반으로 보험료를 책정하여 아미 카블이 고안한 장기 보장을 유지하면서도 평균 2%대의 낮은 보험료율로 많은 고객들을 유치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학적으로 계산된 사망 확률은 꽤나 정확하여 투자자들의 입장에서도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과학과 수학의 발달이 대중들의 보험에 대한 수요와 안정적인 투자처를 찾던 자본가의 요구를 결합시켜준 사례로, 에퀴터블을 통해 생겨난 생명표와 확률 계산 기반의 보험계리는 현재의 생명보험 업계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의 경험생명표는 영국의 에퀴터블사(社)가 1834년에 발표한 것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험생명표로는 미국의 CSO표(Commissioner's 1958 Standard Ordinary)와 아메리카 경험생명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생명보험 회사나 공제 조합 등의 가입자의 생명현상을 일정 기간 집단적으로 관찰하여 연령과 함께 변화하는 사망률에 관련된 사실을 분석하여 작성한 표인 경험생명표(experience life table)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험개발원이 1982년부터 1986년까지 5년간의 개인보험계약자 자료 900만 건을 분석·작성해 처음으로 발표한 이후 보통 3년을 기준으로 새롭게 작성되는데,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일반 국민의 평균수명이 늘어나 사망률이 크게 낮아짐에 따라 갈수록 보험료가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현재는 2015년 4월부터 시행하는 8차 경험생명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생명보험사업은 20세기 초에 들어왔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생명보험회사의 지점에 불과하였습니다.
한국 생명보험의 역사는 1921년 친일 재벌인 한상용 등이 중심이 돼 조선생명을 세운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이후 일본계 생명보험사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해방 당시에는 모두 19개의 생명보험사가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 일본계 자본이 떠나자 당시 이들 보험사가 보유하고 있던 계약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가 도마에 올랐고, 이때 일제 강점기 시절 생명보험업계에서 일했던 몇몇 유지들이 모여 ‘생명보험 조선인 중앙자치위원회’를 세우고 보험 계약의 일괄 인수를 추진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 최초로 생긴 보험 관련 조직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1946년 국내 최초의 생명보험 회사인 대한생명보험이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국내에 생명보험 시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947년 협동 생명과 고려생명, 1950년 1월에 흥국생명이 각각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보험사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여러 현안을 협의하고 업계를 대표해 정부와 대화하는 창구가 필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 2월 20일 생명보험사업의 권익 옹호와 발전, 생명보험회사의 현안 문제 협의와 처리, 생명보험사업의 대외 홍보활동 등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생명보험협회의 전신인 조선생명보험협회가 세워졌습니다.
조선생명보험협회는 1958년 대한생명보험협회로 이름을 바꿨다가 1960년 사단법인 생명보험협회(Korea Life Insurance Association, 生命保險協會)로 단체명을 변경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생명보험 회사는 한화생명보험(Hanwha Life Insurance, 韓火生命保險)입니다.
1946년 9월 강익하(康益夏) 등에 의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생명보험회사로 설립되었습니다.
1963년 8월 13일『보험계』 창간호를 발행하였고, 1965년 6월 보유계약고 10억 원을 돌파하였으며, 1969년 5월 신동아그룹에서 이 회사를 인수하였다.
1988년 9월 대한생명빌딩 옥상에서 올림픽 성화대를 점화하였습니다.
1999년 8월 금융감독위원회로부터 부실금융기관으로 선정된 후 예금보험공사의 공적자금이 투입되어 국영 생명보험사로 전환하였습니다.
대한생명보험은 2002년 12월 한화그룹에 편입되었으며, 2012년 10월 한화생명보험㈜으로 사명을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국에 서구식 손해보험이 도입된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인천·부산·원산 등 항구를 개항하여 외국과 무역을 시작하게 되자, 일본·영국·독일·중국·뉴질랜드 등의 보험회사가 한국에 대리점을 개설하여 해상보험을 판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10년 국권침탈 후 일본 보험회사의 지점들이 대거 진출하여 화재보험·자동차보험 등을 판매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보험회사는 1922년에 설립된 조선 화재 해상보험 주식회사(지금의 메리츠화재 해상보험)입니다.
광복 후 한국의 손해보험이 보험상품의 구색을 갖추게 된 것은 1962년 이후의 국민경제가 고도의 성장을 보인 때부터입니다.
1946년 8월 1일 조선 화재, 신동아 화재, 대한화재, 서울 화재를 회원사로 조선손해보험협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이후 1948년 9월 1일 사단법인 대한손해보험협회로 변경하였습니다.
1970년대 전반까지는 보험 산업이 그다지 발전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의 뒷받침으로 보험 산업 또한 급속히 발전하였습니다.
통계청 자료에서 보는 것과 같이 국내총생산(GDP)이 증가함에 따라 보험산업 또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016년 10월 말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현재 보험업계 전체 수입보험료는 159조 2,488억 원으로, 그중 생명보험이 93조 5,409억 원으로 전체의 58.7%를 점하고 있으며, 손해보험이 65조 7,079억 원으로 전체의 41.3%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보험을 통해 각자가 겪을 수 있는 손실을 최대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위험을 보상하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는 보험회사의 상품들도 잘 활용하면 지금과 같은 저금리 시대에 좋은 투자처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복리, 비과세라는 단면적인 면만 보고 지나친 사업비, 운영비 등을 고려하지 않는 다면 그런 투자는 하지 못하느니만 못하다는 건 꼭 명심해 두시기 바랍니다.
차후에는 보험사 활용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