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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29. 2018

은행의 탄생

은행의 탄생
  
은행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생활하는데 은행이 없다면 큰 불편함을 겪게 될 것입니다. 
예전 은행들은 예금 업무, 대출업무를 주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근대 은행들은 ‘금융백화점’이라 불릴 만큼 예·적금, 수익증권(펀드, 채권 등), 보험, 파생상품 등 금융 회사 중 가장 다양한 금융상품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은행 창구에서 보험 상품도 가입할 수 있고, 펀드 가입, 증권계좌 개설도 가능합니다. 
또한 세금, 공과금을 나거나 신용카드, 지로 및 공과금 자동납부, 대여금고 등의 다양한 업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와는 때려야 땔 수 없는 은행은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은행의 역사는 고대 바빌로니아 제1왕조의 제6대 왕인 함 무라 비왕(재위 BC1792~1750)의 만년인 BC1750년경 제정된 최초의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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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라비 법전 전문 中
  
42조 - 사람이 타인의 경지를 빌렸으나 그 땅에 곡물이 자라게 하지 않았으면, 그가 그 땅에서 일을 하지 않은            것을 그에게 확증할 것이니, 그는 이웃 토지의 수확고를 기준하여 그 땅의 주인에게 곡물을 주어야 한다.
         (ㄱ) 일단 임차한 토지에 대하여는 이를 경작하지 않았을지라도 지대를 납부하여야 한다.
         (ㄴ) 수재나 한재를 당하다 해에는 채무의 이자가 면제된다.
  
88조 - "상인이 곡물을 빌려 줄 때에는 곡물 1 kur(부피의 단위 : 1 qa=(약 120 l))에 대 하여 60qa의             이자를 받는다. 은을 빌려 줄 때에는 은 1 shekel에 대하여 1/6 she의 이자 를 받는다."
  
122조 - "사람이 타인에게 금이나 은이나 어떠한 물건이라도 맡기고자 하면, 맡기는 모든 것을 증인들            에게 보이고 계약서를 작성한 다음에 맡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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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개의 전문으로 이루어진 법전에는 재산의 단순한 기탁, 재산의 운용이나 그에 따른 이자에 대한 규정이 명기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은행과 유사한 기관이 나타난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 16세기 영국의 금(金) 세공업자와 은행
  
10세기 말경 중국의 상인들 사이에서 발행된 세계 최초 지폐인 교자(交子), 17세기 초 영국에서 사용된 서양 최초의 지폐들은 모두 금, 은 등의 귀금속을 맡기고 영수증으로 써준 예치증서(goldsmith note) 형태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은행권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3300~2600년경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시민’들은 자신의 재산을 안전한 신전에 보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신전은 신성한 장소였고 그 신전에서 물품을 훔치는 행위는 신의 노여움을 산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곳이 바로 신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원에 귀중품을 맡길 때는 ‘보관료’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13세기 중반 영국의 런던에서는 귀금속을 당시 조폐국에 맡겼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치르며 나라가 어려워지자 당시 조폐국에 보관하고 있던 국민들의 귀금속, 화폐를 모두 빼앗아버리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영국이라는 나라를 밑도 조폐국에 재산을 맡겼던 런던 시민들은 그 후로 더 이상 조폐국에 재산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대신 금세공업자들을 찾아갔습니다.
금(金) 세공업자들은 그들의 재료(금, 귀금속)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아주 튼튼한 금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전하게 보관도 가능하고 금의 순도 또한 그들로부터 보증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점차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약간의 보관료를 지불하면서 귀금속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귀금속을 맡긴 사람들에게 예치증서(goldsmith note) 형태의 보관증을 발급해 주었습니다.
보관료를 지불하면 그들은 안전하게 보관도 해주고, 필요할 때는 보관증을 제시하면 언제든지 맡긴 물품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무거운 금을 함부로 들고 다니는 것보다 편리한 그들에게 금을 맡기고 받은 보관증으로 거래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편리함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은 금세공업자들의 금고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금으로 직접 거래를 하지 않았습니다. 
보관증으로 거래를 시작하였습니다.
금세공업자들은 새로운 사실을 한 가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금을 맡긴 사람들의 대부분이 금을 되찾으러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금세공업자들은 약간의 금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대출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자를 받아서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점점 부자가 되어갔습니다.
당시에 금세공업자들에게 금을 맡긴 사람들은 그들이 돈을 벌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되고 항의를 하게 됩니다.
이때 그들은 대출이자로 발생하는 수익의 일부를 나누어 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합니다.
공짜 돈이 생기다는 데 흥미를 느낀 사람들은 그 거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대출로 발생하는 이익의 일부를 주인들에게 나누어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금이자'의 개념이 되었습니다.
은행들이 가장 큰 수익을 거두는 ‘예대 마진’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금세공업자들은 큰돈을 벌었고, 또 몇몇 세공업자들은 금 보관 업무를 본업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금세공업자들은 더 큰 욕심이 생겼습니다.
있지도 않은 금을 담보로 대출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금도 없이 보관증을 담보로 대출을 하게 된 데는 나름의 통계자료가 뒷받침되었습니다.
바로 금고에 있는 금을 찾으러 오는 사람들의 비율이 10% 내외라는 것.
그리고 금고 속에 있는 금의 양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자신들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의 ‘10%’라는 것은 오늘날의 ‘지급준비율’의 토대가 됩니다.
  
‘지급준비율’이란 은행이 고객으로부터 받아들인 예금 중에서 중앙은행에 의무적으로 적립해야 하는 비율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순조롭게 흘러가지 못했습니다.
간혹 빌려준 금이 회수되지 않거나, 또는 있지도 않은 금으로 대출을 한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보관증을 들고 찾아와 자신의 금을 돌려달라는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보관되어 있던 금보다 더 많은 금을 인출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파산에 이르게 되는 금세공업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이런 경우가 빈번히 발생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뱅크런(bank run)’사태입니다.
  
곤경에 빠진 금세공업자들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영국 왕실이었습니다.
당시 전쟁을 치르고 있던 영국은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금세공업자들에게 영국 왕실에 투자할 것을 제안하였고 금세공업자들은 왕실에 또 다른 제안을 합니다.
바로 왕실로부터 금 보유액의 3배에 달하는 가상의 돈을 대출할 수 있는 면허를 발급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돈이 필요했던 영국 왕실과 곤경에 빠진 금세공업자들은 서로의 제안을 수락하였습니다.
  
"CHARTED BANK = 면허받은 은행"
영국 왕실로부터 ‘CHARTED' ’ 면허받은 ‘,’ 공인된 ‘은행인 영국의 ‘스탠더드차타드 은행’은 이렇게 탄생하였습니다.
  
  
● 메디치 가문과 은행
  
르네상스 시대 지중해 교역은 베니스 등 이탈리아 주요 도시국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각각의 도시국가들은 다른 화폐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들 간의 교역을 위해 전문적인 환전 상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금과 은의 무게를 재는 저울을 놓고 벤치(bench)에 앉아 상인들과 거래를 했습니다.
일부 환전상들은 거대한 가문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도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초기의 대금업, 환전업은 메디치 가문에 의해 은행업으로 진화를 거듭해갔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은행을 조직적으로 대형화함으로써 위험을 줄이고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은행(bank)이라는 용어는 환전상들이 저울을 놓고 거래를 했던 벤치(bench)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이 환전상들도 파산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돈을 맡겼다가 날린 사람이 너무 화가 나서 탁자를 부숴버렸는데 이 ’ 부서진 탁자(banco rotto)'에서 ‘파산(bankruptoy)'이라는 용어가 생겨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 최초의 근대적 은행
  
최초의 근대적인 은행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1661년, 요한 팔름스트루흐라는 이름의 네덜란드 상인이 4년 전에 설립한 사설 은행인 스톨홀름스 방코에서 최초의 종이 은행권을 발행했습니다. 
이후 30년간의 독점권을 얻어 스웨덴에서 은행업을 하는 대신, 은행 이윤의 반은 스웨덴 왕실로 가게 되어 있었다. 팔름스트루흐는 단기 예금을 받아 장기 대부해 줄 자금을 마련했지만, 예금자가 상환을 요구할 때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은행의 자금 유동성을 개선하기 위해 그는 다양한 액면 금액으로 약속어음을 발행했습니다. 이는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어음을 발행하는 바람에 은행은 3년 후 1664년 영업을 중단하고, 팔름스트루흐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1668년 9월 리크 센스 스텐데 루스(왕국 영토의 은행)라는 새로운 기관이 스웨덴에서 은행업을 하는 특권을 이어받았습니다. 
새로운 은행은 리크 쓰다 그(의회)의 직접 감독 아래 공무원이 관리를 맡았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 은행업이라는 일은 스웨덴 국내 정책의 중요한 측면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을 상대로 예금을 받고 대부를 해 주었지만, 18세기 초 대북 방전쟁이 발발하자 최초의 기능 대신 주로 정부를 상대로 커다란 액수를 빌려 주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약속 어음 발행이 허가되지 않았지만, 은행은 1701년부터 일종의 신용장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위조를 줄이기 위해 툼 바 브루크에 제지 공장을 설립했다. 
또한 일반 은행에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게 허가했고, 발행한 은행권 액수를 충당할 만한 예금을 보유하게 되었다. 
1866년 은행의 이름이 스베 레예스 리크스 방크 롯 바뀌었다. 1897년에는 중앙은행이 되었으며 이는 오늘날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국립 은행입니다.
 

                                                                스웨덴에서 발행된 은행권

  
  
● 한국의 근대적 은행
  
한국에 근대적 은행 제도가 도입된 것은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이 개설된 1878년(고종 15)입니다. 
1909년 중앙은행으로서 구(舊) 한국은행이 설립되었으나, 국권 피탈 후 업무를 조선은행에 이관, 8·15 광복과 더불어 한국은행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상업은행은 1897년에 설립된 민족계(民族系)의 한성은행(漢城銀行)이 효시이고, 특수은행은 1918년에 발족한 조선 식산은행(한국산업은행의 전신)이 효시입니다.
  
제일은행에서는 1908년~1909년 사이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을 무마시키기 위해 화폐 도안의 일부를 광화문 등 한국적인 소재로 바꾸어 지폐를 발행했습니다. 1902년과 1904년에 발행한 은행권에는 일본 제일은행 총재의 초상이 실렸고, 우리나라의 국호도 여전히 'COREA'로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은 제일은행권 배척운동 등을 극복하고 제일은행권을 공식 법화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한국인들의 반감까지 무마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새로운 도안의 신권을 발행한 것입니다.
  
1908년 8월에 발행된 1엔 권 앞면의 도안으로는 화홍문(華虹門)이 사용되었다. 이듬해 1월에 발행된 10엔 권에는 주합루(宙合樓)가, 7월 1일에 발행된 5엔 권에는 광화문(光化門)이 주 소재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10원권에 태극장(太極章)과 벚꽃이, 5원권에는 국화 당초(菊花唐草)와 이화장(李花章)이, 1원권에는 태극장과 이화장이 들어갔습니다. 
 

                                                             제일은행에서 발행된 은행권 신권


1909년 10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중앙은행으로서 구(舊) 한국은행이 설립되었으나, 국권 피탈 후 업무를 1911년 3월 조선은행에 이관, 8·15 광복과 더불어 한국은행(韓國銀行)으로 복귀하였습니다. 
  
1903년 3월 정부는 ‘중앙은행 조례’를 제정, 공포하고 근대적인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설립 준비를 위하여 당시 탁지부 대신 심상훈(沈相薰)을 총재로, 이용익(李容翊)을 부총재로 임명하여 창립 업무를 진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1904년 8월 한일협정의 강제 체결로 이른바 고문정치가 시작됨으로써 한국 정부의 독자적인 중앙은행 설립기 도는 좌절당하였습니다.
그 뒤 1909년 7월 일제는 한국 정부로 하여금 ‘한국은행 조례’를 제정, 공포하게 하고, 8월 일제의 정계·재계의 거물급 인사를 중심으로 창립위원회를 구성하여 한국은행 설립 업무를 진행시켰는데, 한국인으로는 한상룡(韓相龍)·백완혁(白完赫) 두 사람만을 형식상의 위원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한국은행은 법적으로도 한국 정부의 중앙은행이고, 설립 당시의 자본 구성에서도 공칭 자본금 1,000만 원의 조달을 위한 발행주식 10만 주 중에서 3만 주를 한국 정부가 인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행 운영을 위한 경영자층의 구성에 단 한 사람의 한국인 참여도 허용하지 않고 완전히 일본인들로 구성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일제는 한국은행의 설립을 계기로 한층 더 강대한 재정상의 실권을 장악하여 그 해 11월 은행 업무를 개시하였습니다. 1910년 8월 국권 상실 후에도 「한국은행 조례」는 유효하였으나, 1911년 3월 「조선은행 법』의 제정, 공포로 한국은행은 조선은행으로 개칭되어 8·15 광복 때까지 존속하였습니다.
광복 후 별다른 변화 없이 중앙은행으로서 기능을 계속 수행하였으나 강력한 권한과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는 중앙은행의 설립이 요청됨에 따라 1950년 6월 새로이 한국은행을 설립하였습니다.
  
한국은행은 화폐 발행과 통화신용정책의 수립 및 집행, 금융 시스템의 안정, 은행의 은행, 정부의 은행, 지급결제제도의 운영 관리, 외화 자산의 보유·운용, 은행 경영분석 및 검사, 경제 조사 및 통계 작성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은행 본관

한국은행은 일본 메이지 시대 신건축의 권위자로서 도쿄역을 설계한 다쓰노 긴고의 설계로 1907년 착공, 1912년에 준공하였습니다.

  
일반 시중은행은 1954년 새로운 ‘은행법’이 시행되면서 한국 상업은행, 한일은행, 조흥은행, 제일은행, 서울은행 등 5개 시중은행이 설립되었습니다. 
2000년 금융지주회사 제도를 도입하고 2003년 방카쉬랑스 제도의 시행하였고, 2009년 한국판 금융빅뱅을 기치로 ‘자본시장과 금융 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을 제정했습니다. 
  
  
● 최초의 한국 은행권 
  
우리나라의 유일한 법화인 한국 은행권을 발행하고 있는 한국은행은 1950년 6월 12일에 설립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일제시대 때 중앙은행 역할을 수행하였던 조선은행이 발행한 조선은행권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한국은행은 조선은행권을 대체할 한국 은행권을 발행해보지도 못한 채 창립 13일 만에 6.25 동란을 맞이하였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됨에 따라 한국은행도 본점을 급히 대전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워낙 다급했기 때문에 한국은행 본점 금고에 보관하고 있던 금괴 일부와 조선은행권 일부를 대전으로 옮기지 못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은 불과 40억 원의 현금만을 금고에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전시 자금 수요 등을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규모였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6월 29일에 한국은행은 일본 정부에 요청하여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서 불과 10여 일 만에 최초의 한국 은행권을 제조하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한국 은행권


최초의 한국 은행권은 자체 제조한 것이 아니라 일본 내각 인쇄국에서 수입하여 발행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1,000원권 도안으로 사용된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인데, 이후 1960년 4·19 혁명 때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만이 사용되었습니다. 
최초의 한국 은행권은 이전의 은행권과 비교해 초상의 위치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였고, 한국 은행권이라는 문자 역시 이전 은행권과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씌었다는 게 크게 달라진 점입니다.
  
최초의 한국 은행권은 현제 사용되는 한국 은행권과는 달리 손으로 만져보면 돌출 부위가 쉽게 느껴지는 요판인쇄(볼록 인쇄) 방식을 적용하지 않아 위조에 취약한 은행권이었습니다.
참고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10,000원권의 경우 앞면에는 세종대왕 초상, 물시계, 문자와 숫자 등이, 뒷면에는 경회루, 한국은행 영문 명칭(THE BANK OF KOREA), 일부 금액 표시(10000 WON), 채문 문양 등이 요판으로 인쇄되어 있습니다. 
특히 앞면 요판인쇄 부위 중 문자(“한국 은행권”, “만 원”, “한국은행”)와 우측 하단 숫자(“10000”)는 깊게 요판 조각이 되어 있어 손으로 만져볼 경우 쉽게 입체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요판 인쇄판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숙련된 전문 조각가가 화폐에 인쇄되는 크기로 요판인쇄 부위를 수작업으로 강철판에 조각하는 절차가 필요한데, 이와 같은 강철판 조각 작업에만도 수개월이 소요되기 때문에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려면 통상 1년 6개월 내외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런데 최초의 한국 은행권을 불과 10여 일 만에 제조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급박한 사정을 감안하여 시간이 걸리는 요판인쇄 방식을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이처럼 긴급하게 제조된 한국 은행권은 1,000원권이 152억 원, 100원권이 2억 3천만 원이었습니다.
새로운 은행권은 1950년 7월 13일과 14일에 미군 용기 편으로 김해공항에 도착되어 7월 22일에 피난지 대구에서 최초로 발행되어 유통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북한군이 점령지 역내에서 한국은행에서 약탈한 조선은행 1,000원권을 불법 발행하는 한편 조선은행 100원권을 불법으로 인쇄하여 발행함으로써 경제를 교란시키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한국은행은 조선은행 100원권의 유통을 정지시키고 1950. 9. 15 ~ 1953. 1. 16일까지 5차에 걸쳐 한국 은행권으로 교환하는 조치를 실시하였습니다. 
  
실물은 한국은행 본점의 화폐금융박물관을 방문하면 볼 수 있습니다.
  
  
● 인터넷 전문 은행
  
점포 없이 인터넷과 콜센터에서 예금·대출은 물론 외환·신용카드·보험 판매에 이르는 모든 은행 업무를 하는 은행인 인터넷 전문은행은 2016년 금융위원회의 인터넷 전문은행 본 인가 승인을 받고, 2017년 4월 국내 첫 인터넷 전문은행인 케이 뱅크가 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1990년대부터 미국과, 일본은 2000년대부터 인터넷 전문은행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는 2008년 무렵 금융위원회가 은행법을 개정하여 인터넷 전문은행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금융실명제 법 및 자금 확보 문제, 은산분리 규제 등에 의해 무산된 바 있습니다. 특히 산업자본(비금융주력자)의 은행 지분 소유 한도를 4%로 제한하는 은산분리 규정은 본래 은행이 대기업이나 대주주의 사금고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규정으로 도입되었으나 인터넷 전문은행 설립에 걸림돌로 작용하였습니다.
  
인터넷 전문 은행은 기존의 은행들과는 달리 오프라인 점포 유지비용이 들지 않아 보다 저렴하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365일, 24시간 제한 없이 운영한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외국에선 제너럴 일렉트릭(GM)이나 소니 같은 제조업체가 세운 인터넷 전문은행도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카카오, 국민은행, 우정사업본부 등도 이루어진 ‘카카오 뱅크’, KT, 포스코, 우리은행, 현대증권 등으로 이루어진 K-뱅크가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카카오 뱅크는 출범 첫날 계좌 개설 건수가 24만 좌를 기록하였습니다.
카카오 뱅크는 올해 7일 기준 계좌 개설 고객 수가 500만 명을 넘어섰다고 밝혔습니다. 2.84초에 1명, 시간당 1267명, 하루 평균 3만 425명이 가입한 셈입니다.
케이 뱅크의 가입자 수는 62만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비대면 계좌 개설, 애플리케이션 하나로 대출·예금 등의 은행 업무, 보안카드· OTP 등이 필요 없는 거래, 수수료 면제 외에도 여러 가지 장점으로 돌풍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기존 은행들도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존 공급자 위주였던 서비스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바뀌어나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 우리들은 기원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사원을 재산을 보관하는 은행의 용도로 사용하고, 함무라비 법전에서 시작된 재산의 기탁 및 재산의 운용에 대한 기록들.
은행의 여러 가지 가설 중에서 16세기 영국의 금세공업자로부터 시작된 보관증 거래로부터 은행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금세공업자들과 그들에게 귀중품을 맡긴 사람들 간의 거래로 탄생한 예금이자, 그들의 더 큰 욕심으로 발생한 뱅크런 사태까지.
뱅크런 사태 이후 영국 왕실과 금세공업자의 거래로 탄생한 스탠더드 차타드 은행.
르네상스 시대 환전상들의 저울을 올려두었던 벤치(bench)에서 시작된 은행(bank)의 유래.
마지막으로 최초의 근대 은행들과 인터넷 전문은행까지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다른 금융기관들 중의 하나인 ‘보험사의 탄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이 시간에.
  
길 건우 자산관리사 (rlfrjsd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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