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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29. 2018

증권 거래의 탄생 (2)

- 동인도 회사 그리고 주식의 탄생

4. 동인도 회사의 등장
  
  
향신료로 시작된 대항해 시대
  
동인도에서 이란,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 인도 등 이곳에서 가져온 후추, 정향, 육두구 사프란, 설탕 등의 향신료는 바로 돈이었습니다. 
  
당시의 스파이스 루트, 즉 신항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주 무대였습니다.
  
향신료는 무게와 부피에 비해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기 때문에 싣고 다니기가 편했습니다. 그리고 16세기 후반 그 수요가 폭증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상인들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상인들로부터 이런 향신료를 비싼 값에 사서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일반 시민들에게 되팔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인들은 중간에서 물건을 공급받아 하는 것보다 직접 향신료를 구해다가 팔면 훨씬 많은 이득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은 들은 풍문이긴 하지만 저 멀리 '동인도 제도' (지금의 인도네시아 일대)에만 가면 노래 한 곡 조로 향신료를 살 수 있을 만큼 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거기서 향신료를 대량으로 구입해 오기만 있다면 일확천금의 꿈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만 같았습니다.
  
포르투갈의 왕자인 엥리케는 항해 학교를 세워 세계 제1의 항해 기술자를 양성하였고 여러 차례의 탐험을 통해 포르투갈 사람들의 아프리카 항해와 식민지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당시 엥리케의 무역선에서 일한 사람들 대부분이 네덜란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엥리케 시대의 포르투갈 상인들은 당시의 ‘검은 황금’이라 불린 후추 무역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무역선을 만들 목재를 구하기도 어려웠고 인구 또한 적었으며 인건비는 비쌌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국민들은 가난해서 비싼 후추를 살 수도 없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영국, 북유럽, 프랑스, 독일의 사이에 놓여 있어 각국의 상인들이 모이기 쉬운 지정학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암스테르담에는 대형 국제 무역 시장 및 외화를 환전해주는 은행들도 많았습니다. 그러했기에 당연히 당시 유럽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항해 경험이 많은 선장·선원들, 후추 거래 또한 네덜란드 시장에서 거래되었고, 그 수익금 역시 네덜란드 은행에 입금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네덜란드인들 입장에서는 포르투갈로부터 연락을 기다리느니 스스로 힘을 합쳐 돈을 버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교황이 무역 항로에 대한 권리(카르타)를 포르투갈에 넘겼고, 작은 도시국가의 연합이었던 당시 네덜란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스페인 왕(펠리페 2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구교인 가톨릭을 위해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의 개신교도를 핍박하자 이것을 피해 네덜란드 남쪽에서 원단과 후추 사업을 하던 상인들이 북쪽인 암스테르담으로 대거 이주해버리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애초부터 스페인과 사이가 나빴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암스테르담으로 모인 자본으로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의 향료 수출국과 직접 교역할 회사를 세우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1595년 암스테르담 상인 중 일부가 '극동 기업(Company of Far Lands)'을 조직해 코르넬리스 하우트만이 지휘하는 300~500톤 급 배 3척, 50톤 급 요트 1척, 240명의 선원과 상인들로 이뤄진 선단을 동쪽 바다로 보냈습니다. 
  
바타비아(자카르타)에 도착해서 향신료를 가지고 1597년 네덜란드로 돌아왔습니다. 30개월의 항해 간 돌아올 때는 비록 3척의 배, 그리고 87명 생존만 생존해서 돌아왔지만 향신료로 이익을 낸 성공적인 항해였습니다. 이로 인해 전국에 투자 열기가 퍼졌습니다.
  
여기에 고무된 상인들은 1598년 22척의 배로 2개 선단을 꾸렸습니다. 
이들은 8척의 배와 충분한 향신료를 싣고 돌아와 무려 400%의 수익을 냈습니다.

‘검은 황금’에 대한 욕심에 1601년에는 더 많은 65척의 배가 항해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여러 회사가 생기고, 서로 경쟁하게 되자 곧 원산지의 향신료에 가격 거품이 발생해 6년 만에 100%나 치솟았으나, 반대로 유럽에서는 향신료 가격이 하락했습니다.
  
이러한 과다경쟁으로 인한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 전국의회의 요망에 따라 1602년에 이들 회사를 모두 통합하는 합동 동인도회사, 즉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깃발 :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네덜란드어로 동인도 회사이고 약자는 VOC이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정부 인허장

   
46개의 조항으로 구성된 동인도회사 인허장에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인도회사에 항해권을 독점적으로 부여하였고 네덜란드 전국의회를 대신해 아시아의 국가와 영주들과 조약 체결, 전쟁 선포, 요새와 상관 건설, 군인 충원 등 국가가 할 수 있는 여러 기능을 대신할 수 있다고 명시하였습니다.
  
동인도 회사는 외국에서 네덜란드 정부 그 자체였습니다.
  

5. 최초의 주식회사의 탄생

동양으로 가는 장거리 무역은 다른 무역에 비해 이윤이 큰 만큼 초기 자본도 더 많이 필요했습니다. 긴 항해를 위해 배도 만들어야 하고, 군대도 만들고 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규모 간 큰 사업은 여러 사람이 동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탈리아 상인들로부터 시작된 콤파니아(compañía)가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로 치면 합자회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중세 이탈리아의 콤파니아는 여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모으는 하나의 방식이었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돈을 투자하고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능력을 투자함으로써 새로운 사업을 하는 방식으로 활용이 되었는데 이것이 중세 해상무역의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한편 여기서 더 나아가 동인도회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동참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면 더욱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소액을 투자 받아 항해에 필요한 자본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현명한 방법이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어느 누구나 동인도회사에 투자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총리의 하녀, 상인들, 심지어는 인접국인 프랑스, 영국 등에서도 투자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자본금은 650만 길드로 이루어진 최초의 주식회사는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주식거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큰 회사를 시작하고, 장기투자를 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보통 일반인들에겐 그렇게 많은 투자금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주주들로부터 자본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본을 기업에 투자하고 수익을 내는 것입니다.
  
동인도회사는 투자를 받았고 나중에 배당을 해주겠다는 종이를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그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주식이었습니다.
 

162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주식


당시 해상 무역을 하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경영전략은 매우 달랐습니다. 포르투갈은 새로운 항로를 발견해 주로 영토를 확대하는 것(식민지 건설)에 목적을 두었다면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이 개척한 무역 항로를 이용해 후추와 사치품을 대량 구매해 싸게 들여다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기업의 목적은 영리추구, 즉 최대 이윤의 획득에 있습니다. 이에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는 기업의 목적인 이윤추구를 최대의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이들은 또한 정기적으로 회의를 개최해 여기서 회사의 운영방안, 물품의 판매 가격 등 주요 현안 들을 결정하기도 하였습니다. CEO 임명권도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주주총회 상임 이사회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1610년에 첫 주식 배당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향신료로 지불되었고, 그 배당 몫을 본 주식 소유자들은 크게 만족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투자액의 132%에 달하는 배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인도 회사는 성장을 거듭해, 17세기와 18세기를 통틀어 매년 평균 4%씩의 이익 배당을 투자자들에게 배당해 줄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설립되어 약 200년 가까이 유지되었습니다. 전성기인 1670년대에는 보유한 무역 선의 숫자가 영국, 프랑스, 독일, 포르투갈, 스코틀랜드, 스페인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습니다. 당시 동인호 회사는 아시아에 30개의 항구를 소유했고 이곳에서만 약 3만 명의 직원들이 일을 했습니다. 18세기 동인도회사의 총매출액은 약 5억 7,000만 길더 (현재가치 7조 4천억 원)에 이르렀습니다.
 

6. 최초의 증권거래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운영 방식도 아주 특별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주식 내용

  
이전에 설립된 회사들은 한 번이나 두 번의 항해를 하고 나면 자본을 나누고 회사가 분리돼 새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 또한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배의 항해 기간, 1년 혹은 2년간 투자하는 단기 투자에 익숙했습니다. 21년 동안 투자하는 건 당시에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동인도회사 주식이 모두 판매된 지 1개월 후, 사람들은 동인도회사 주식을 더 이상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식 보유자들은 웃돈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팔고 싶어 하기 시작했습니다.
  
긴 투자기간에도 불구하고 큰 이익 배당을 받을 수 있고, 타인에게 양도까지 가능한 동인도회사의 주식은 많은 사람들이 사고 싶어 했습니다. 동인도 회사의 주식은 주식가격은 많은 수요로 인해 계속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보유자들은 가지고 있는 주식을 오른 가격에 팔고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얻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주식 양도 기록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인도회사의 주식을 동인도회사의 직원을 통해 서로 주식을 거래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엔 아예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주식거래소가 생겼습니다.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이렇게 최초의 주식거래소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생겼습니다.
  

역사적으로 합자회사나 주식회사가 네덜란드에서 처음 시도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식회사가 대표적인 기업에 적용이 되고 개별 기업을 넘어 주식시장에서 거래가 된 것은 네덜란드가 처음입니다. 또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다수의 국민들이 투자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도 네덜란드가 처음이었습니다.
  
향신료의 욕심에서 시작된 대항해시대, 그로 인한 최초의 주식회사, 최초의 증권거래소 이들은 이렇게 탄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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