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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29. 2018

투기의 역사

 역사상 최초의 버블, 튤립 버블

튤립 투기
- 역사상 최초의 버블
  
튤립 버블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튤립 과열 투기 현상을 말합니다. ‘버블’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거품이 발생한 상황, 즉 경제현상에서 정상적인 상황과는 다른 투기적인 상황, 거품이 많이 발생한 상황을 말합니다. 한없이 아름답게만 보이는 튤립이 네덜란드 나라 전체를 뒤흔든 사건이 바로 튤립 투기입니다.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투기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튤립 투기에 대해 알려면 우선 당시 네덜란드 상황부터 아는 게 좋습니다.
  
네덜란드는 12세기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지 않는 습지대였습니다. 하지만 그 땅으로 이주한 유럽인들의 노력으로 습지를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닷물을 막고 습지를 농지로 바꾸는 일은 아주 힘들고도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이주민들은 유럽 이곳저곳에서 탄압을 받던 상인들, 농민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를 위하여 그 힘든 작업을 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네덜란드 사람들은 바닷물을 막아 무려 국토 절반에 해당하는 육지를 만들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상징인 풍차는 바로 이런 땅을 개간한 이주민들의 역사의 상징이었습니다.
  
해수면보다 낮은 육지로 물의 공포가 수시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1287년 최악의 범람으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범람으로 국토 한가운데에 조이데르 바다가 형성되었습니다. 17세기 최고의 도시인 암스테르담은 그렇게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암스테르담을 이야기할 때 네덜란드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만들었지만 암스테르담은 인간이 만들었다’라고 말합니다. 암스테르담은 바로 인간의 의지인 것입니다.
  
14세기까지도 인구 100만 명이 되지 않았던 네덜란드는 청어를 잡아 영국에 수출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청어를 더 많이 잡기 위해 스코틀랜드와 세 차례나 전쟁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의 무역의 시작은 청어를 비롯한 해산물을 여러 나라에 수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영국과 마주 보고 유럽을 등지고 있던 지리적 이점으로 네덜란드는 수로를 통해 유럽 상품이 모이고 다시 다른 곳으로 공급되는 상업무역의 최적지대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6세기에는 각 나라를 통행할 때 선박세를 내야 했습니다. 당시 선박세는 갑판의 면적을 기준으로 매겨졌습니다. 네덜란드는 이 선박세를 아끼고 운임을 더 남기기 위해 내부는 넓지만 갑판은 좁은 독특한 배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뛰어난 항해기술과 선박 제조술을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는 끊임없이 새로운 항로도 계척하였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자치 정부 형태라 스페인에 일정한 세금을 바치면서 국방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 국왕 필립 2세가 유럽 여러 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돈이 부족하자 그 전쟁비용을 네덜란드에게 부담시켰습니다. 결국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전쟁을 선포하고 똘똘 뭉쳐 스페인에 대항했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많은 자금이 드는 전쟁을 여러 국가들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번이나 국가 파산을 경험할 정도로 힘든 상황으로 몰려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그들의 목숨과도 같았던 재산과 자유로운 무역권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을 하였습니다. 1576년 8,000명의 시민들이 스페인 군대에게 학살당하는 참혹한 일을 겪으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1588년 일곱 개 주가 중심이 된 네덜란드 공화국을 탄생시켰으며 신흥 네덜란드 공화국은 곧바로 스페인을 대신해 영구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 자신들의 나라를 지켜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영국은 즉각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파병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영국 역시 스페인 많은 돈을 요구했습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완전한 독립을 얻기까지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이어 영국과도 피 흘리는 전쟁을 계속 치러야 했습니다.
  
당시 스페인과의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던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전쟁 때문에 무역거래에 타격을 입고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1602년 국가적인 차원에서 회사를 설립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입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깃발 (VOC)


국가가 국민의 자금을 모아 그것으로 선박을 제조하고 신항로를 개척해 새로운 부를 창출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막대한 부는 동인도회사의 주식가치를 드높였습니다. 당시의 동인도회사 주식은 바로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자 유럽 각국의 돈이 암스테르담 주식시장으로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네덜란드는 주식시장에서 얻은 막대한 이익으로 세계 곳곳을 항해하며 부를 계속 축적했습니다. 
  
이러한 선순환으로 네덜란드 상인들은 환어음, 주식회사, 1609년에 유럽 최초의 중앙은행까지 설립했으며 다양한 경제 시스템을 계속 개발하며 부를 축적해나갔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국가 채권과 복권 등을 발행해서 대중들의 투자를 지속적으로 유도했습니다.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암스테르담의 주식거래소는 각 나라의 주식과 선물이 거래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돈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 스페인의 종교적 광기를 피해 자본이 자유로운 네덜란드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유대인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선물거래소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활발한 시장을 만들기 위해 파산처리를 도와주는 파산처리 사무소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암스테르담에는 돈이 넘쳐 났습니다. 17세기 중반에는 동인도회사의 선박이 1만 척이 세계 여러 곳에서 활발하게 무역활동을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전 세계 무역의 절반을 차지하였습니다. 
  
특히 17세기 후반에는 영국과의 해전에서 승리하고, 암스테르담의 주요 운하들이 완성되는 등 국력을 외부로 마음껏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관개농업, 목축업, 어업이 모두 조화롭게 발달했으며 여기서 나온 생산물을 거래하는 무역업도 활발했습니다. 엄청난 양의 곡물이 발틱 해 인근에서 수입됐고, 제조업도 꽃을 피웠습니다. 라이덴 인근에서는 방직공업이, 그리고 하를럼 근처에선 리넨 제조업이 활발했습니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선 일반 국민의 생활수준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네덜란드 시민들의 구매력은 나날이 좋아졌습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인 암스테르담에 사는 시민들에게는 이 도시가 끝없이 번영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을 것이며, 손에 닿는 것 모두가 황금으로 변하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시민들은 끊임없이 흘러들어 오는 이 돈을 가지고 무언가 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동인도회사(VOC) 주식은 그 돈을 넣어두기에 좋은 투자처임이 분명했습니다. VOC 지분은 언제든 쉽게 사고팔 수 있었습니다. 즉 유동성이 높았다 이런 점에서 다른 투자 자산들과는 달랐습니다. 당시 홀란트 주에서 발행하는 채권도 투자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래가 적어서 사고팔기가 어려웠고 이자율 역시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그에 반해 복권은 큰 수익을 남길 수 있었기에 17세기 당시 복권은 네덜란드에서 인기가 아주 많았습니다. 16세기부터 17세기 초까지 병원과 빈민 복지관들이 복권을 팔아 엄청난 수익을 올렸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이 복권에 몰렸고, 복권을 파는 이들은 상품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유명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기증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당첨자 추첨을 할 때는 온 도시가 들썩였습니다. 그러나 1618년부터 1619년 사이 도르드레흐트 종교회의 발표에 따라 좀 더 엄격한 칼뱅교 교리가 네덜란드를 지배하게 되면서 도박은 금지됐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쓰였던 복권 역시 판매가 금지됐습니다.
  
공식적으로 복권 같은 도박이 금지되자 그 돈은 이제 투기로 몰리게 됐습니다. 
  
튤립의 등장
 

네덜란드의 '풍차'와 국화인 '튤립'

  
네덜란드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풍차와 튤립입니다. 풍차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네덜란드 개척의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국화인 튤립은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톈산산맥

  
튤립은 파미르고원과 톄산 산맥의 중앙아시아가 원산지입니다. 동양의 꽃이었던 튤립은 동로마를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후 11~12세기 터키 장신구에서 쉽게 튤립 문양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16세기 중반 터키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도 튤립에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터키를 떠나며 튤립 구근(알뿌리) 몇 개를 가지고 자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유럽 최대의 명문 왕가인 루이 16세의 처가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가인 함스부르크왕가 황제의 정원에까지 심어졌습니다. 튤립은 터키 사람들로 인해 유럽 각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튤립 모양이 들어간 타일

튤립 모양이 들어간 자수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튤립을 연구하고 있던 프랑스 식물학자 클루시우스에 의해 다양한 종류의 튤립이 생겨났고 그가 1593년 네덜란드로 발령 나게 되면서 튤립 또한 함께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척박했던 네덜란드의 땅은 항상 자신들의 단조로운 국가 풍경에 항상 열등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원래부터 꽃은 사랑하는 네덜란드에 튤립이 들어오고, 유럽 상인들의 소문에 더해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고상한 취미생활로 점점 퍼지게 됩니다.
  
“터키 황제들이 튤립을 비싼 값에 산다더라..”
“함부르크 왕가에서는 정원을 온통 튤립으로 꾸몄다더라..”
  
이러한 소문들은 날개를 달고 당시 귀족들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사교계를 중심으로 튤립의 인기는 점점 높아졌고 특히 희귀한 모양을 가진 뿌리에 집착했습니다.
 

가장 비싼 가격에 거래되던 황제 튤립


튤립 판매장은 조명(초)과 판매장을 더 넓게 보이게 하기 위해 거울까지 동원되면서 사람들의 영혼까지 사로잡을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우아한 음악까지 추가하여 오늘날 백화점에서 사람들을 흥분시켜 구매의욕을 높이는데 필요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튤립을 찾기 시작했고 더 집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흥 부자들의 과시욕이 아름다운 꽃 튤립에 쏠렸고, 상인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튤립 투기에 뛰어들면서 공급을 초과하는 수요가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튤립 광풍 풍자화(1640년), 프란츠 할스 박물관

황제(Semper Augustus), 총독(Viceroy), 제독(Admiral Verijck)


1630년대 초기 네덜란드에서는 꽃 색깔에 따라 튤립을 분류했습니다. 
최상급 꽃은 잎에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줄무늬가 있어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 즉, ‘황제’라 불렸고 이어 ‘총독(Viceroy)’과 ‘제독(Admiral Verijck)’순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중 특히 인기가 많았던 ‘황제 튤립’은 가격이 오르면서 한 달 만에 튤립 가격이 5,000배나 상승하기도 했습니다. 부자들의 특이한 튤립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비정상적인 투기시장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황제 튤립’ 한 뿌리면 암스테르담의 대저택을 살 수 있을 정도로 그 값이 어마어마하게 뛰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노동자의 평균 연봉이 200~400길더, 부유한 상인의 연봉이 3,000길더였는데 17세기 중반 가장 인기 있는 튤립 구근(알뿌리) 한 개당 가격이 5,000길더를 넘을 정도였습니다. 이 돈으로는 통통한 돼지 16마리와 튼실한 황소 8마리, 살찐 양 24마리와 밀 48톤, 와인 4통, 맥주 1,200리터를 비롯해 치즈, 버터, 은 술잔, 옷감, 침대 세트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가격으로 치면 튤립 하나가 몇 억을 호가하는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튤립 거래에 참여하게 되었고 각종 경매와 선물거래까지 활성화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열풍, 광풍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하는 의미로 사용된 튤립은 사랑을 고백하는 꽃이 아니라 투기의 꽃, 욕망의 꽃으로 변모하였습니다.
  
튤립으로 단기간에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서민들에게까지 퍼졌고 농부, 굴뚝청소부, 시종들도 쌈짓돈과 빚을 내어 튤립 구근을 매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최고의 투자 상품이었던 동인도회사 주식은 너무 고가주였기 때문에 그곳에 서민들은 투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다 투기꾼까지 참여하여 튤립 구근의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했으나 발아하는데 3~7년이 걸리고,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되어 재배가 어렵고, 심지어는 발아하지 못하는 것도 많았던 튤립 구근(알뿌리)은 모두를 충족시키기에는 터무니없이 공급이 부족했습니다. 더군다나 비싼 가격에 거래되던 줄무늬가 들어간 튤립들은 모두 바이러스의 감영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줄무늬 튤립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소문이 트레이더들 사이에 퍼지면서 튤립 거래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습니다.
  
  
옵션의 등장과 튤립 버블 붕괴의 진실
  
튤립 거래는 주로 8~9월에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튤립 현물인 구근(알뿌리)가 귀해지자 아직 땅속에 있는 알뿌리까지 인정되는 약속어음이 등장합니다. 약속어음이란 어음을 발행한 사람이 그 어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불할 것을 약속하여 발행하는 어음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선도거래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선물거래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땅속에 있는 알뿌리를 매매 당사자를 간에 앞으로 정한 기일에 알뿌리를 받고 정한 금액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거래를 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이런 방식의 거래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암스테르담과 안트베르펜의 곡물 시장에서는 16세기 중반부터 선도 계약이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풍작이든 흉작이든 수확량에 관계없이 곡물 가격을 안정적으로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지분도 선도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주로 트레이더들의 편의성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지분을 양도하기 위해서는 거래 당사자 두 명이 동인도 하우스를 직접 찾아가서 주주명부를 수정해야 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정해진 절차였습니다. 하지만 선도 거래를 하면 이런 불편함을 대폭 줄일 수 있었습니다. 또 당장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일단 종이에 계약 내용을 적고 양측의 서명을 받아두는 것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이미 이러한 금융 시스템을 활용해 본 네덜란드 사람들은 튤립 알뿌리 거래에도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지나친 수요를 따라갈 수 없었던 튤립 알뿌리 공급을 이러한 거래 시스템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돈이 필요한 직접 거래가 아닌 사고팔 수 있는 권리를 매매하면서 튤립을 직접 거래한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튤립은 새로운 금융 시스템으로 이제 개화시기를 떠나 일 년 내내 매매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단기 차익을 노린 많은 수요들은 선도거래, 즉 선물 계약서를 놓고 경매에 또 경매를 하는 거래가 겹쳐지면서 튤립 알뿌리의 가격을 밀어 올렸습니다.

또한 당시 알뿌리 가격을 끓어 올린 이유에 대해서 당시 네덜란드에는 역병이 퍼졌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636년 네덜란드에는 역병이 퍼졌고 인구의 약 10%가 사라졌습니다. 국민 10명 중 1명이 죽는다는 건 아주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나머지 90%의 사람들은 역병이 돌기 전보다 더 부유해졌다는 뜻입니다. 유산 상속 등으로 없던 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역병으로 숨진 사람에게서 받은 유산을 튤립 알뿌리나 당시 VOC 지분에 투자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튤립 값이 얼마나 올랐는지는 1637년 2월 5일 알크마르에서 있었던 바우터 바르톨로메츠 빙켈이란 사람의 재산 경매 내역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린아이들을 남겨두고 사망했는데, 그 아이들의 고아원 양육비를 대기 위해 빙켈의 유산이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경매는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빙켈은 몇 해 전부터 튤립에 투자하고 있었고, 죽을 무렵엔 아주 훌륭한 튤립 컬렉션을 완성 해놓고 있었습니다. ‘총독 튤립(viceroy tulip)'은 무게가 33그램밖에 안 됐지만 4,200길더에 팔렸고, ’엥크하위젠 제독(Admiral of Enkhuizen)'은 5,200길더에 낙찰됐습니다. 이 경매에서 총 9만 길더가 걷혔습니다. 당시 알크마르에 좋은 집 한 채 가격이 1,000길더쯤 했으니, 빙켈의 자식들은 이제 고아원에서 호의호식할 일만 남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빙켈 경매가 있기 사흘 전에 하를럼에서 튤립 가격이 폭락했고, 경매가 있은 후 알크마르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이미 체결된 선도 계약들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튤립 가격 변천표

  
1637년 2월 4일. 튤립시장은 붕괴되었습니다.
  
그 순간은 너무도 순식간에 찾아왔습니다. 
  
1637년 2월 4일, 매도자가 갑자기 튤립을 대량으로 팔자 대중은 공황상태에 빠졌고, 튤립시장은 하루아침에 붕괴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정부가 튤립 뿌리 가격이 하락할 이유가 없다는 긴급성명을 발표하며 매각을 멈춰달라고 권고하고, 계약 가격의 10퍼센트로 모든 계약을 종결지으려 했지만 모두 헛수고였습니다. 일주일 후 튤립 가격은 평균 90퍼센트 하락했고, 일반 품종은 양파 한 개 값도 안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손실을 만회하고자 법원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상급 법원인 홀란트 주 상고법원이 이 문제에 대해 판결을 내렸습니다. 상고법원은 구근을 갖고 있는 사람이 우선 그걸 시장 가격에 내다팔고, 계약했던 금액과의 차액에 대해서는 상대로부터 보상을 받으라고 명했습니다. 튤립거래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하를럼 시에서는 이 판결이 시민들의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하를럼 지방법원은 이 문제에 대해 아예 소송 접수를 거부했기에 상인들 사이의 분쟁은 상당 기간이어졌습니다.
  
결국 네덜란드 내 여러 도시의 의회들이 공동으로 해결책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일정액의 벌금을 내는 상인은 튤립 선도 거래 계약을 이행하지 않아도 넘어가게 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벌금은 계약 금액의 3.5%로 정해졌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통상적으로 비즈니스 계약을 취소할 때 물리던 위약금이 3.5%였습니다. 이 벌금을 낸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튤립가격의 붕괴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지만 그중에 하나는 아주 사소한 사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튤립 알뿌리는 양파와 너무도 흡사하게 생겼습니다. 어느 날 한 귀족의 집에 튤립 알뿌리가 소포로 배달되었는데 그 집의 요리사가 그 알뿌리를 보고 양파인 줄 알고 그만 요리를 해버렸습니다. 당시 저택의 가격과도 맞먹는 그 알뿌리를 양파인 줄 알고 요리를 해버린것입니다.
  
비싼 값을 치르고 배달되기만을 기다렸던 귀족은 요리사를 소송했습니다. 그런데 “튤립의 재산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라고 법원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소식은 네덜란드 전역에 퍼지면서 순식간에 허황된 꿈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순간 그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단순한 꽃이었던 튤립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튤립 버블 사건은 당시 네덜란드 경제에 큰 충격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거래가 활발했던 하를럼에서는 약 285명의 상인이 튤립 거래에 참여했고, 암스테르담에서는 60명 정도가 관련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단지 훗날 근검절약을 중시하는 칼뱅주의가 탄생할 때 성직자들은 튤립 사건을 예로 들며 인간의 탐욕을 비난하는 정도였고, 200년 후 어느 베스트셀러에 이 사건이 소개될 정도였습니다.
  
튤립 파동이 오늘날까지도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이유는 튤립 구근(알뿌리)처럼 흔해빠지고 또 오래가지도 않는 상품에 이렇게 많은 돈이 몰린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뚜렷한 재산적 가치도 없는 튤립 같은 것을 네덜란드 사람들이 비싸게 사들였던 건 그저 가격이 더 오르길 기대하며 한몫 벌어보자는 심리 때문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튤립 하나가 집 몇 채만큼의 가치를 가져다줄 수 없다는 건 너무도 당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튤립 투기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건 광란이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평소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네덜란드인들이 그렇게 광란에 휩싸였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거의 4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금융위기 때마다 언론에서는 과거 발생했던 3대 금융버블 사건을 언급합니다. 2001년의 닷컴 버블, 그리고 2007년의 서브프라임 버블이 꺼질 때마다 그랬습니다. 튤립 구근에 엄청난 돈을 썼던 시대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인간은 여전히 욕심에 눈이 멀곤 합니다. 지속적인 언급과 교육에도 불구하고 더 광범위하고 큰 규모의 비극적 사건들을 예방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분명 다시 한 번 역사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대목입니다.
  

  
빨간 튤립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허황된 꿈같은 튤립투기에 대한 사랑보다는 지금 내 옆에 있는 가족, 연인에게 빨간 튤립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게 진정한 성공이 아닐까 한번 생각해 봅니다.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
  
  

관련 동영상
  
https://www.youtube.com/edit?o=U&video_id=dVn3E3UeLR0
https://www.youtube.com/edit?o=U&video_id=Ukx-4FLC9og
https://www.youtube.com/edit?o=U&video_id=JFHz74tidHk
  
참고자료
  
‘탐욕의 자본주의’, 김용관 지음, 2009, 인물과 사상사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로데베이크 페트람 지음, 2011, 이콘
‘다모클레스의 칼’, 유재수 지음, 2015, 삼성경제연구소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찰스 P.킨들버거, 로버트 Z. 알리버 지음, 2006, 굿모닝북스
‘세계역사를 뒤흔든 금융이야기’, 왕웨이 지음, 2013, 평단
‘튤립, 그 아름다움과 투기의 역사’, 마이크 대시 지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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