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 버블
역사적으로 유명한 버블 사건을 뽑으라고 하면 1636년의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 1720년의 영국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와 프랑스 미시시피 회사(Mississippi Company)의 주식 버블, 1927~1929년 미국 주식시장 버블, 1970년대 멕시코를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의 신용 버블, 1985~1989년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 버블, 같은 시기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의 부동산과 주식 버블, 1992~1997 아시아 각국 부동산과 주식시장 버블, 1990~1993년 멕시코의 외국인 투자 버블, 1995~2000년 미국 나스닥시장 주식(정보기술주) 버블,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서브 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버블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지난 시간의 튤립 버블에 이어 오늘은 1720년에 영국에서 일어난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의 주식 버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남해 회사(The South Sea Company)는 근대 유럽에서 만들어진 특권 회사의 하나였습니다. 아프리카의 노예를 스페인령 서인도 제도에 수송하고 이익을 얻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1711년 영국에서 설립된 특권 회사입니다. 이후 금융 회사로 변신을 하여 1720년에 ‘남해 거품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18세기 당시 영국의 재정상황은 지출 중에서 채무상환이자 지급과 군사비가 9%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공공부채의 압박이 심했습니다. 부실 상태에 있던 많은 채권과 증권의 실부를 강제로 남해 회사 주식을 전환시켜 부채의 일부를 남해 회사로 넘기고, 국고 지원과 남해 무역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여 이자 지급 등을 이용해서 채무를 정리하는 것이 목적으로 1711년 토리당의 로버트 할리에 의해 남해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윌리엄 3세는 제임스가 프랑스의 지원 아래 복위를 꾀하자 1690년부터 네덜란드·독일·에스파냐와 협력하여 1697년의 강화 때까지 프랑스와 싸웠습니다. 그리고 전비를 조달하기 위한 방안으로 1692년 국채 발행이 시작되었으며, 1694년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었습니다. 윌리엄 치세 말기인 1702년부터 1714년까지 에스파냐 계승 전쟁에 관여하는 등 영국은 여러 나라와의 전쟁으로 많은 자금이 필요했고 그 자금을 얻기 위해 많은 양의 채권을 발행하였습니다. 아메리카의 뉴펀들랜드, 노바스코샤, 허드슨만, 지중해의 지브롤터, 메노르카 등을 획득하여 영국은 절대왕정 이래 식민지 체제를 확대하여 많은 이익을 발생시키기도 했지만 또한 국가의 부채 많이 발생시켰습니다.
17~18세기에 런던의 주식시장은 암스테르담에 비해 크지도 않았고, 영국 동인도회사(EIC) 또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성공에 비해선 많이 미미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거래량 또한 상대적으로 소량만이 거래되었습니다. 프랑스 또한 존 로로 인해 꿈틀거리고 있었던 시절, 영국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국가와 시민사회와 국민 전체가 하나의 기업처럼 혼연일체로 움직이고 있었고, 당시 영국은 타자기나 기계 피아노 같은 발명품이 나오던 벤처 창업의 전성시대였습니다.
금융 시스템 또한 네덜란드에서 온 빌럼 3세(illiam Ⅲ), 영어로 하면 윌리엄 3세로 인해 네덜란드의 금융 노하우도 일정 부분 건너간 것으로 보입니다. 1690년 런던 시장의 지분 거래량이 치솟으며, 암스테르담 시장과 똑같은 형태의 파생상품들도 거래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그 몇 년 사이 무려 25개 이상의 회사들이 주식을 발행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주식투자 열풍이 불었습니다. 런던 시장의 빠른 성장에는 일정 부분 ‘9년 전쟁(1688~1697)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국이 참여했던 이 전쟁에서 무기산업이 호황을 이루면서, 무기와 각종 물자를 공급하는 회사들 상당수의 지분이 런던 주식시장에서 거래된 것입니다. 물론 이 회사들 모두가 성공을 거둔 건 아니어서, 대부분은 17세기가 끝나기 전에 청산되었지만 이 기간 동안 영국인들은 주식시장의 힘을 이용해 큰 자본을 모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식거래소에서’, 에드가 드가
민간 기업들이 별다른 노력 없이 지분을 발행해서 큰 자본을 축적하는 것을 보고 영국 정부는 이러한 주식 열풍을 이용해서 정부의 빚을 주식회사 형태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채권을 갖고 있는 투자자들에게 돈을 갚는 대신 그들에게 남해회사 지분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남해회사에는 남미 지역과의 무역 독점권을 주었습니다.
당시 발행한 남해회사 주식
남해회사는 1713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얻은 아시엔토 무역권, 즉 아프리카 - 스페인 서인도 간의 노예무역의 권리를 행사하며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독점권을 받았기 때문에 남해회사에 투자한 주주들 또한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부는 채권 보유자들에게 높은 이자를 지급하지 않아도 되었고, 주주들 또한 주가가 계속 오르자 주식시장이 무한한 돈의 원천이라고까지 생각할 정도로 즐거워했습니다.
그리하여 남해회사는 정부가 밀고 고관 대작들이 대거 주주로 참여하여 날로 주가가 치솟았습니다. 남해 주식회사가 얻은 남해 무역권은 아시엔토 무역 독점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무역은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스페인이 인정한 무역량은 영국이 필요한 양만큼 충족될 수가 없었고, 더구나 1718년에는 스페인과 전쟁이 시작되어 무역이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회사의 사업 계획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었습니다. 남해회사는 애초부터 사기성이 짙었습니다. 당시 남미 대륙은 스페인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이 그 지역의 무역 독점권을 남해 무역에 주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치볼드 허치슨 하원의원은 실질적인 사업내용이 없는 남해회사의 주식을 사는 것은 상식과 이성을 상실한 행위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갈브레이스의 표현대로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많은 투자자들은 주식을 사기 위해 은행의 차입금을 이용해서 투자를 하였습니다. 1720년 한 해 동안 100파운드의 주식이 1,000파운드가 될 정도로 주가는 10배 가까이 뛰었습니다. 단지 주식시장에서 돈을 끌어모을 목적으로 투자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전 국민적 투기 현상은 결국 1720년 ‘남해회사 버블’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남해회사 투자 현황 도표
남해회사는 스페인과 아시엔토 조약으로 스페인령 서인도 제도와 노예무역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지만, 밀무역을 통해 스페인과의 관계 악화, 해난 사고 등으로 본업은 지지부진해졌으며, 국채를 탕진하여 남해 회사의 경영 자체가 위태로워지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남해 회사를 모방한 회사들이 난립하며 불법 상인이나 사기꾼들이 이에 편승해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1720년 6월, ‘버블 회사’가 난립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원인 제공자인 영국 정부는 ‘버블 법안’을 발표해 많은 회사를 청산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대중은 한두 회사를 의심하다 의심이 남해회사로까지 옮겨갔고, 7월부터 외국 투자자들이 남해 회사 주식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투자자들도 가세해 남해 회사 주식은 곤두박질쳤습니다. 9월에 주당 175파운드, 12월에는 124파운드까지 떨어졌습니다. 남해 회사 버블이 붕괴된 후 국왕은 휴가를 취소하고 돌아와 정사에 임했고, 국회는 조사 위원회를 발족해 재무 장관 등 10여 명의 고위공직자를 체포하고 자산을 몰수해 주주들에게 상환했습니다.
하지만 주주들은 한 주당 1,000파운드씩 팔리던 주식을 33파운드씩 밖에는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남해회사 버블‘ 사건은 노년의 대학과 아이작 뉴턴(1642~1727)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중력의 개념을 생각해 만유인력을 탄생시키고, 미적분 계산법, 망원경 발명 등으로 과학 발전에 기여한 뉴턴도 남해회사 버블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1720년 남해회사 주식이 한참 오르고 있을 때 뉴턴은 7,000파운드를 투자하여 100%로 수익률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뉴턴이 주식을 팔고 나서도 주가는 계속해서 올라갔고, 조만간 영국 정부가 지브롤터 해협의 식민지를 스페인에 반환하고 그 대가로 남해 주식회사는 당시 스페인이 차지하고 있던 남미 지역과의 무역 기득권을 넘겨받게 된다는 정보가 돌았습니다. 뉴턴은 주식을 팔고 나서 주가가 계속 올라서 배가 아픈 차에, 눈앞에서 일생일대의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뉴턴은 재차 투자에 나섰으나 거기까지였다. 1월에 128파운드였던 주가는 8배나 올라 7월에 1,000파운드가 되었지만 그것을 정점으로 대폭락이 시작되어 12월에는 124파운드로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뉴턴은 2만 파운드의 손실을 입었고, 너무나 충격을 받은 뉴턴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천체의 운동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
‘남해 거품 사건’, 윌리엄 호가스, 테이트 갤러리
남해회사 버블 사건의 비유 삽화
남해회사를 선전하는 글을 써서 주가를 조작하는데 일조했던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대니얼 디포도 투자 실패로 큰 빚을 떠안았습니다. 디포는 평생 채권자들을 피해 살아야 했으며 안식일에는 채무자를 체포하지 않는 영국의 관습을 이용해 일요일에만 외출한 탓에 ‘일요 신사’라는 오명을 얻었습니다. 디포와 함께 주가 조작에 동원되었던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도 당시의 주식 투기 광풍을, 무모하게 하늘로 날아오른 그리스 신화 속의 이카로스에 빗대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했습니다.
그는 날았다. 종이 날개에 의지해 On paper wings he takes his flight
왁스로 고정된 종이 날개에 의지해 With wax the father bound them fase
높이 오르자 왁스는 녹아내렸고 The wax es melted by the height
함께 날아오르던 아이는 추락했다. And down the towering boy es cast.
당시 프랑스와 네덜란드 공화국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1720년에는 네덜란드에서 40개 이상의 회사가 느닷없이 설립되어 주식을 발행했고, 대부분은 런던의 주식시장에 상장됐던 회사들처럼 껍데기에 불과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공화국 정부가 특별히 신경을 써서 시장을 감독했기 때문에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주식을 팔기 시작한 회사의 수도 적었고, 거품의 피해도 그만큼 적었습니다.
1720년의 남해회사 버블 사태는 주식시장이 경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확신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시장을 조금 더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주식 거품이 다시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한 여러 규제들이 도입되었고, 훗날 산업혁명을 겪으며 더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이 설립됐을 때 사람들은 과거 남해회사 버블 사태의 역사를 상기하면서 조금 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주식투자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식민지 경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영국은 금융제도를 더 철저하게 살피고 투명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주의 손실을 최대한 보상하며 제삼자 심사 제도의 입법화 등, 현대 경제제도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
관련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uplME8e43eQ
참고 자료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로데베이크 페트람 지음, 2011, 이콘
‘세계 역사를 뒤흔든 금융이야기’, 왕웨이 지음, 2013, 평단
‘남해회사’, 위키백과
‘비틀거리는 자본주의’, 조길연 지음, 2015, 꿈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