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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29. 2018

메디치가문의 사랑

귀족의 딸과 은행원의 사랑

귀족의 딸과 은행원의 사랑
  
  
아마도 베네치아에서 은행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다음의 사랑 이야기일 것이다. 베네치아 귀족의 딸 비앙카 카펠로는 피렌체 은행원과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까지 했는데, 결국 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와 결혼하여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비가 되었다. 자, 지금부터 그 사랑 이야기를 들어보자.
  
1560년경 아름다운 소녀 비앙카는 리알토 구역에 있는 가문의 저택에 갇혀 지냈다. 그 당시 베네치아에서 귀족의 딸들은 외출이 금지되어 있었다. 성탄절과 부활절 미사에 참석할 때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것도 얼굴을 베일로 가린 채 집안 남자들과 동행해야 했다.
 

비앙카 카펠로(1519년 6월 12일 ~ 1587년 10월 20일)

   
비앙카 카펠로가 살았던 저택은 현재의 산타포날 성당이다. 지금도 그 건물의 창을 통해 맞은편 건물의 창문이 보인다. 당시 맞은편 건물에는 베네치아에서 영업하던 피렌체 은행인 살비아티 은행이 있었다. 은행 지점장 조반 바티스타 부오나벤투리는 코지모 데 메디치의 정보원이기도 했다. 그는 24살의 조카 피에로 부오나벤투리를 불러 은행원으로 일하게 했다. 피렌체 청년과 베네치아 아가씨는 마주 보이는 건물의 창을 통해 서로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비앙카가 하인을 시켜 저택 옆문의 열쇠를 청년에게 몰래 건넸다. 이렇게 해서 청년은 쪽문을 통해 드나들며 은밀하게 그녀를 만났다.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비앙카가 임신하게 되자, 1563년 11월 29일 둘은 탈출을 감행했다. 배를 타거나 걷는 험난한 여정 끝에 이 연인들은 피렌체에 도착했다. 베네치아의 유력한 집안이었던 카펠로 가문은 이 사실을 알고 발칵 뒤집어졌다. 그리고 베네치아공화국과 토스카나 대공국의 외교 관계에는 금이 가고 말았다. 베네치아인들이 피에로 부오나벤투리의 삼촌을 감옥에 가둔 것이다. 그것이 토스카나 대공에 대한 모욕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비앙카와 피에로는 피렌체에서 결혼했다. 그런데 뒤늦게야 비앙카는 그의 연인이 유복하지도 않고 교양도 없는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아내와 같이 있기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이때 토스카나 대공국의 후계자인 프란체스코 데 미디치가 나타났다. 둘이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베키오 궁전의 접견실에서 왕을 알현하는 동안 처음 만났을 것으로 짐작한다. 비앙카는 결혼 덕분에 법적으로 피렌체 시민이었고 매우 아름다웠다. 메디치 가문의 24살 된 후계자는 그녀를 누여겨보았고, 둘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 피에로 부오나벤투리는 피렌체 정부의 관료가 되는 대신 아내의 연애를 눈감아주었다. 그러나 안정된 자리를 보장받고도 피에로의 생활은 평온하지 못했다. 그는 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고, 결국 그 여자들 중 한 명의 친척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이탈리아어: Francesco I de' Medici, 1541년 3월 25일 ~ 1587년 10월 19일)

   
  
한편 프란체스코의 애인이 된 비앙카는 그에게 조언자 같은 존재가 되어 영향력을 행사했고, 1565년에 프란체스코와 결혼한 합법적인 아내 오스트리아의 요하나는 강렬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메디치와 카펠로의 불륜 관계는 계속됐다. 남자는 저택과 땅을 선물했고, 여인은 더욱더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1574년 코지모가 사망하자 프란체스코는 토스카나 대공으로 취임했다. 그로부터 4년 뒤, 그의 아내 요하나도 사망했다. “따라서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이루어졌다.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와 비앙카 카펠로는 둘 다 홀몸이 되었고, 아내가 죽은 지 두 달 뒤인 1579년 6월 5일에 대공은 비앙카와 결혼했다. 비앙카는 곳곳에 이 소식을 전했고, 공식 통신이 단 5일 만에 그것을 베네치아의 군주에게 전달했다. 베네치아에서는 토스카나의 대공비가 자국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황이 멋지게 반전되었다.”
  
비앙카는 가족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세레니시마는 그녀를 ‘베네치아공화국의 진정한 딸’이라고 선포했다. 앞서 키프로스 왕국의 카테리나 코르나로 여왕에게만 수여했던 호칭이다. 프란체스코와 비앙카는 서로 사랑하며 화목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으나, 8년 뒤 포조 아 카이아노에 있는 메디치가의 별장에서 20일의 간격을 두고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말라리아라고 공식 발표됐으나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편 프란체스코의 동생이자 비앙카의 시동생인 페르디난도는 대공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급히 추기경직에서 물러났다.
  
이 사랑 이야기에는 피렌체 은행과 다른 도시의 지점, 정보원 구실을 하던 은행 지점장, 금융과 결탁한 권력, 그리고 국가 간 세력균형의 원리.... 다시 말래, 이 한편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그 시대를 구성하는 여러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탄생한 장소는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 주변이다. 카펠로 가문의 저택과 살비아티 은행 건물, 그리고 두 건물 중간에 펼쳐진 스토르토 다리를 사이에 두고 젊은 남녀의 눈빛이 오갔다.
 

베네치아 리알토 다리


그런데 이 사건은 주인공들의 죽음으로 종결되지 않았다. 2006년 12월 <브리티시 메디컬 저널>에 발표된 피렌체 대학교 연구진의 보고서에 따르면, 프란체스코 1세와 그 옆에 놓인 비앙카로 추정되는 여성의 유해를 분석한 결과 독극물의 일종인 비소 성분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이 말라리아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토스카나 대공의 자리를 탐낸 동생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 주장 또한 곧바로 반박되었다. 2009년에 피사 대학교와 토리노 대학교에서 프란체스코 1세의 뼈조직을 분석한 결과 말라리아 원충의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추리 소설과도 같은 이 사건의 결말은 알 수 없으나, 여기에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사랑과 배신, 음모와 미스터리, 그리고 은행이 모두 등장한다.
  
  
참고 자료   
‘돈의 발명’, 알레산드로 마르초 지음, 2015, 책세상
  
  
길건우 자산관리사(

rlfrjsdn@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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