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튤립 버블, 영국의 남해회사 버블에 이어 이번엔 프랑스이다.
영국에서 남해회사 버블이 일어났던 해에 프랑스에서는 미시시피 회사 버블이 일어났다.
존로(John Law, 1671~1729)
미시시피 회사 버블 사건은 당시의 유명한 금융가인 존로(John Law, 1671~1729)에 의해 일어났다. 존로는 스코틀랜드 파이프(Fife)의 은행가이자 금세공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로리스턴 성에서 보냈으며, 14살 때부터 아버지가 사망하는 1688년까지 집안 사업에 참여하면서 은행업을 배웠다.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 런던에서 도박으로 세월을 보내며 수학적 재능을 카드와 주사위에 쏟아부었고, 큰 돈을 잃기도 했다.
1694년 4월 9일, 존로는 이후 오크니 백작부인이 되는 엘리자베스 빌리어스(Elizabeth Villiers)와의 일 때문에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과 런던 빌름스 베리 광장에서 결투를 벌이게 된다. 이 결투에서 윌슨은 죽게 되고, 로는 체포된다. 살인 혐의로 체포된 로는 올드 베일리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이후 벌금형으로 감형되었다. 윌슨 형제의 항의로 존로는 다시 구금된다. 하지만 이후 로는 감옥에서 빠져나와 암스테르담으로 탈출한다.
당시 전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암스테르담에서 금융 시스템에 관해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운 로는 중앙은행 설립을 주장하였다. 중앙 은행을 통해 신용의 활용을 늘리고, 토지, 금, 은에 기반을 둔 은행권(banknote)을 확산시키고 싶어 하였다. 이러던 중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가 1705년에 펴낸 경제학 서적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프랑스어로도 번역되었다. 그는 금속화폐의 경직성은 유통에 장애 요인이 되므로, 통화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귀금속의 가치와 관계없이 빠르게 유통되는 은행권을 발행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특히 중앙은행 설립에 대한 주장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합으로 인해 로는 다시 범죄자 신분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다시 유럽 대륙으로 도망가게 된다.
이후 10년간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전전하며 금융 관련한 일에 종사하였다. 동시에 그는 상류층과의 만남을 가지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 경제가 위기에 빠지면서, 로는 자신의 주장을 다시 한번 관철시킬 기회를 얻게 된다. 모든 금융을 담당하는 중앙은행과, 국가 회사의 설립을 주장했으나 처음엔 아무도 그의 이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곧 국가에 의해 돌아가는 엄청난 독점 시스템을 의미하는데, 또한 이 독점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윤은 국가의 빚을 청산하는데 사용될 것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의 금융 위원회(Counseil des Finances)와 개인적 이득을 챙기고 있던 상인들, 금융업자들은 이러한 계획에 반대했다.
18세기 프랑스는 빚에 허덕이고 있었다. 루이 14세가 추진한 각종 전쟁과 베르사유 궁전을 짓는 등 프랑스의 재정상태는 총체적 난국에 빠진 상황이었다. 72년 3개월 18일 동안 재위한 루이 14세는 다섯 살에 불과한 루이 15세에게 30억 리브르에 달하는 빚을 남겨주었다. 당시 프랑스의 1년 조세 수입은 고작 1억 5,000만 리브르에 불과했고, 지출은 1억 4,200만 리브르였기 때문에 이를 뺀 800만 리브르로는 이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귀금속의 부족으로 인해 통화량이 급속히 감소한 것은 물론, 새로운 동전의 주조량 또한 제한을 받고 있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섭정이었던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존 로에게 손을 내민다.
존 로의 ‘신금융 시스템’ 아이디어는 곧 실행계획으로 구체화 되었다. 실행계획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새 통화 제도를 구축하는 것. 둘째는 법정통화를 발행할 은행을 출범시키는 것. 셋째는 새 은행의 자금 지원으로 해외 식민지를 개발하고 식민지와의 무역을 독점하여 인도 회사의 부를 창출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회사의 주식을 발행하여 주식 매각 대금으로 시민들의 수중에 있는 국채를 매입하는 것이었다.
18세기 초는 금본위제가 시행되던 때라 지폐를 발행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양의 금이 있어야 했다. 다시 말해 지폐를 발행하려면 반드시 같은 가치의 금이 있어야 했다. 존로는 국가 채무를 줄일 지폐를 발행하고 싶었지만 금이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지폐를 발행할 수 있는 근사한 근거를 찾아냈다. 그는 사람들에게 미시시피 삼각주를 개발할 예정인데 그곳에 큰 금광이 있다고 발표했고, 이 구두 약속을 통해 지폐 발행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다.
1716년 5월, 존로는 자본금 600만 리브르로 프랑스의 화폐 발행권을 가진 민간은행 ‘방크 제네랄, Banque Generale, 일반은행'이라는 은행을 설립했다. 이 은행은 네덜란드 은행처럼 예금과 대출업무 외에도 화폐 발행이라는 독특한 기능을 수행했다. 이것은 사적인 은행(private bank)였지만 정부의 어음과 정부가 인정하는 은행권의 총 3/4로 이루어진 은행이었다. 정부는 세금을 로가 설립한 은행이 발행한 지폐로만 납부하도록 했다. 프랑스 최초의 은행이 발행한 지폐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717년 8월, 스코틀랜드의 사업가 존 로는 당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미시시피 회사의 경영권을 획득하고 서방 회사(Compagnie d' Occident)라고 이름을 고쳤다. 원래 존 로의 목표는 루이지애나 식민지 등 미시시피 강 유역의 대부분을 포함한 북미의 프랑스 식민지와 무역에 있었다.
서방 회사의 경영권을 확보하자 프랑스 정부는 북아메리카와 서인도 제도와의 무역에 대한 25년 독점권을 존 로에게 주었다. 1719년 5월 23일 서방 회사는 동인도 회사, 중국 회사, 기타 프랑스 무역 회사를 합병하여 〈인도 회사〉(Compagnie des Indes 또는 Compagnie Perpétuelle des Indes)가 되었고, 또한 존 로가 ‘방크 제네랄’은 1718년에 ‘왕립 은행, Banque Royale’이 되었다. 이는 존 로가 발행했던 은행권들이 이제 루이 15세의 승인을 받은 것임을 의미했다.
이때부터 존 로가 직접 진두지휘한 프랑스 화폐 혁명이 희망에 들뜬 분위기 속에서 서막을 열었다. 이는 말도 안 되는 화폐제도 개혁이었다. 존 로의 개혁으로 프랑스의 화폐 체계는 금속화폐 시대에서 지폐 시대로 순식간에 넘어가 정부는 지폐를 법정화폐로 정하고 이를 전국으로 유통했다. 이때부터 ‘리브르’ 지폐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몇 년 후, 방크 제네랄 덕분에 정부가 큰 이윤을 얻자 정부는 지체 없이 은행을 인수하고, 존 로를 계속 은행 관리인으로 채용했다.
1720년에는 사실상 프랑스의 중앙 은행이었던 왕립은행과 미시시피 회사가 통합되었다. 이로써 사실상 국가 회사였던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에 대한 수요는 점점 더 늘어났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주식과 달리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은 거래 방식이 좀 특이했다. 국채 채권으로 같은 값의 회사 주식을 구매할 수 있었다. 당시 500리브로인 국채 채권이 시장에서는 150리브르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역업의 성장으로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은 상승일로였다. 국채 채권을 보유한 사람들은 거래소로 몰려와 채권을 미시시피 회사 주식을 바꾼 뒤 주식이 오르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미시시피 회사 계약서
시장에서는 사자 주문이 폭주해 주가는 연일 폭등했고, 투기 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투기 방법은 다음과 같다.
“A 군이 좀 멀고 정보도 별로 없는 지역에서 500리브르의 국채 채권을 150리브르에 산 후 거래소에 가서 500리브르의 미시시피 회사 주식을 바꾼다. 그리고 주식을 팔면 주식은 오르지 않았지만 A 군은 350리브르를 벌게 된다.”
국채 회수는 주당 5,000리브르에 10만 주(총 5억 리브르)씩 3차에 걸친 신주 발행을 통해 이루어졌다. 주식대금은 동일 액면가의 국채나 은행권으로 10개월에 걸쳐 분할 납부하도록 했고, 은행은 투자자들에게 인도 회사의 주식 매입대금을 대출해 주는 편의까지 베풀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익숙한 소설인 ‘노트르담의 꼽추’는 이 기간의 역사를 묘사했다.
“주인공인 꼽추는 캥캉푸아 거리에서 빈둥거리다가 다른 사람들이 주식 구매서를 쓸 때면 자신의 굽은 등을 테이블로 쓰게 했죠.”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은 실제 가치와 무관하게 계속해서 이처럼 투기에 이용되고 있었지만, 국가채무로 인해 이로 인한 위기는 찾아오지 않았다. 지나치게 회사 주식이 비싸지면 실제 가치와 가격을 맞추기 위해 신주를 추가로 발행하면 되었다.
존 로의 정책이 제공한 새로운 투자기회는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온 국민이 알게 되었다. 국채를 주식으로 교환하기 시작했고 국채 투기는 뚝 끊겼고 민간이 보유한 국채량은 급감했다. 이후 미시시피 회사는 프랑스 국내 최대의 채권자가 되었다. 또한 네덜란드와 영국의 투자자들의 자금까지 프랑스로 끌어들였다. 인도 회사가 식민지에서 유럽이 원하는 상품의 생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 주식가격은 계속 올라갔다. 주당 9,000리브르까지 고공행진을 하자 로는 수요를 만족시키고 주가를 한번 더 끌어올리기 위해 화폐 발행을 늘리기로 결심했다. 주식가치와 실제 가격을 맞추기 위해 신주 발행과, 급격한 통화량의 증가로 인해 물가 상승이 나타났다. 빵과 우유 등 기본 식량은 6배, 의복류는 3배나 올랐다. 물가가 더 오를 것이라고 생각한 투자자들의 이익실현 욕구를 더욱 자극하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회사의 주가는 마치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경기가 너무 과열되자 사람들은 그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하던 중 미시시피 삼각주에서 더는 금을 채굴할 수 없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람들은 주식을 들고 가서 계속해서 교환을 요구하자 주가는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가 교환을 요구할 경우 내줄 금이나 은이 없었다. 보유량은 지폐 발행고의 2퍼센트에 불과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상대로 버블은 붕괴했다. 1세기 전의 네덜란드 상황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슬피 우는 투자자와 참담한 표정의 사람들이 도처에 가득했고, 거래소는 휴업에 들어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은행도 강제 폐업 당한 점이다. 또 한 번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이런 느낌은 아마도 번지점프를 할 때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순간 줄이 끊어진 것을 알아채는 느낌과도 비슷할 것이다.
튤립 사건과 다른 점은 이번 사건은 단순히 거래 시장만 붕괴된 것이 아니라 화폐 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었다. 프랑스 주가는 1719년 5월부터 계속 폭등해 1720년 5월에는 상승 폭이 과거 13개월 대비 20배나 올라 1만 5,000리브르까지 치솟았다. 그달부터 주가는 13개월 연속 하락해 최종 주가는 13개월 이전의 5퍼센트에 불과한 500리브르로 하락했다. 이를 표현하면 매우 완벽한 2차 함수 그래프가 탄생할 것이다. 완벽히 대칭을 이루는 주가 포물선은 금융 역사상 처음이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미시시피 주가 변동
급기야 미시시피 버블이 붕괴된 후 공공의 적이 된 존 로는 1720년 12월 프랑스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브뤼셀을 거쳐 베네치아로 갔다. 당시 베네치아는 모두가 인정하는 도박의 수도였다. 1638년 산 모이세 광장에 공공 도박장 ‘리도토’가 세워졌을 정도다. 그 안에서 베네치아 귀족들이 은행을 운영했다. 자코모 카사노바도 빈번하게 출입했던 그 도박장은 1774년에 문을 닫았고, 이후 불법 도박장이 성행했다. 어쨌든 존 로는 다시 옛날의 취미에 빠져 베네치아에 머물렀다.
이처럼 기구한 인생을 산 그는 1729년에 세상에 이별을 고했고, 당시 산 마르코 광장에 있던(산 마르코 대성당의 맞은편) 산 제 미니아노 성당에 묻혔다. 프랑스 신문에는 한 묘지명이 실렸다.
“스코틀랜드의 유명인이 이곳에 잠들다. 이 천재는 수학의 법칙을 이용해 프랑스 사람들은 파산시켰다.”
이후 나폴레옹은 야코포 산소비노가 그 성당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무도회장을 지었다. 그런데 그해 나폴레옹의 측근이자 파리 육군사관학교 동기였던 자크 알렉상드르 로우 드 로리스통 장군이 베네치아의 총독으로 부임해 있었는데, 그는 존 로의 조카이기도 했다. 로리스통 장군은 백부의 유골을 그곳에서 멀지 않은 산 모이세 성당으로 이전했다. 존 로는 이곳에서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프랑스 왕실의 저명한 재무총감이 된 존 로를 존경하고 기억하며”로 시작하는 라틴어 묘비 아래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 훗날 그는 유럽을 떠돌며 도박을 하다 가난에 찌들어 베네치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존 로의 실험이 안긴 후유증은 오늘날까지 흔적이 남아있는데, 프랑스에서는 은행인데도 방크라는 이름은 거의 없고, 소시에테(회사)나 크레디(신용)가 은행 이름으로 대신 쓰인다. 방크라고 불리는 곳은 위에 나온 방크 제네럴, 방크 로얄의 후신인 방크 드 프랑스와 외국계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200여 년 전의 쓰라린 기억이 은행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물론 '은행의'라는 형용사는 bancaire로 그대로 쓰긴 한다.
존 로는 미시시피 버블(Mississipi Bubble)과 뒤이은 프랑스의 경제 대붕괴의 주범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평가는 1960년대 초부터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현재 그는 애덤 스미스 이전의 경제학자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시시피 버블을 터무니없는 사기행각에 놀아난 시장의 광기 정도로 치부하기 했다. 반면 ‘광기, 패닉, 붕괴 : 금융위기의 역사’에서 찰스 킨들버거는 미시시피 버블은 사기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존 로의 시스템이 잘못된 가정에 기초했기 발생한 실수이지 사기는 아니라는 말이다. 몸소 이 버블을 경험한 사상가 볼테르는 “무역과 사치품에 대하여”(1738)라는 에세이에서 프랑스인들이 알고 있는 금융과 무역에 대한 모든 지식이 존로의 덕이며, 자본금 5천만 리브르의 인도 회사와 300척에서 1,800척으로 늘어난 상선이 모두 존로 시스템의 폐허로부터 이루어낸 결과라면서 존로 시스템 실패의 원인을 변화를 거부한 프랑스 사회에 돌리고 있다.
무엇보다 존 로의 남다른 점은 경제 분야에서 신용의 역할을 인식한 것으로 볼수 있다. 그는 생산요소중 하나인 신용이 경제활동과 경제성장을 결정한 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로서는 매우 새로운 관점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화폐가 무엇인지 철저하게 이해했으나 너무 서두르다 계획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 문제라고 볼수 있다.
현재 많은 국가들은 화폐의 유동성을 늘리는 것을 통해 경제성장을 자극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바로 존 로가 발명한 방법을 가지고 말이다.
관련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bveTqvOMuBA
https://www.youtube.com/edit?o=U&video_id=YqjbQ3M0gzI
참고 자료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찰스 P. 킨들버거, 로버트 Z. 알리버 지음, 2006, 굿모닝북스
‘돈의 발명’,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 2015, 책세상
‘화폐경제’, 중국CCTV 화폐 제작팀 지음, 2014, 가나출판사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