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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29. 2018

중국의 최초 버블

중국 최초의 금융위기 - 고무 버블
  
  
19세기는 산업혁명의 시대였다. 자동차와 고무타이어가 발명되어 보급됨으로써 글로벌 시장에서 고무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지금처럼 신소재와 신에너지의 응용에 관해 가장 빠르게 반응을 보인 것은 자본시장이었지만, 동시에 과민반응 현상도 나타났다. 당시의 세계 최강국인 영국과 신흥대국인 미국은 1908년부터 해마다 많은 양의 고무를 수입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고무 생산량을 늘릴 방법이 없어 고무 가격은 상승일로였다. 런던시장에서 1908년 1파운드에 2실링이었던 고무 가격은 1909년 말이 되자 10실링까지 상승했고, 고무 관련 주식도 폭등했다. 처음에는 주당 10파운드였던 주가가 얼마 안 돼 180파운드까지 상승한 회사도 있었다. 1908년 2실링에서 1910년 4월에는 12실링까지 상승했지만, 당시 고무 원가는 1.6실링에 불과했다.
 

고무나무

   
최초의 고무타이어는 1888년, 당시 수의사였던 존 보이드 던롭(John Boyd Dunlop)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최초의 고무타이어는 고무판으로 호스를 만들어 나무 바퀴에 부착하고 지면과 접촉하는 부분은 두꺼운 캔버스지로 감싼 타이어를 개발하여 시험 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쇠바퀴 자전거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딱딱한 바퀴에 익숙해 있었던 사람들에게 던롭이 시도한 고무 타이어는 일대 혁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존 보이드 던롭(John Boyd Dunlop)

   
던롭이 최초로 상용화한 타이어를 자동차용으로 완성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프랑스의 미쉐린 형제였다. 1895년 프랑스의 앙드레 미쉐린과 에드알드 미쉐린 형제는 1895년 프랑스 파리에서 던 롭의 자전거 타이어를 본떠 공기 튜브식 자동차 타이어를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세계 최초의 자동차용 공기타이어이다. 당시 자동차들은 통고무 타이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통고무 타이어는 딱딱하고 쿠션이 좋지 않았으나 튜브식 타이어는 전혀 다른 쿠션감을 보여주었다. 이후 1905년에는 타이어의 비드 부분에 강철을 사용하게 되어 훨씬 강한 타이어가 탄생하게 되었다. 1912년에는 면 블록으로, 1915년에는 보강제로서 면 코드가 사용되어 수명과 성능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며 타이어 수요가 폭풍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최초의 미쉐린 타이어맨

  
  
고무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와 그로 인한 고무 가격 상승으로 인해 동남아 지역 등 세계 각지에 있는 고무 산지에 고무회사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아직 시범단계인 주식회사 형식으로 투자자들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다. 상하이는 당시 아시아에서 자본시장이 가장 발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고무 투자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영국 <타임스>지의 통계를 보면, 1909년 말에서 1910년 초까지 불과 몇 개월 사이 동남아 지역에는 고무 관련 회사가 122개 설립되었고, 그중 적어도 40개는 상하이에 본사가 있었다. 막 땅을 매입했거나 고무 묘목을 사서 심은 회사도 있었고, 다수가 가죽 가방을 만드는 회사였다.
  
상하이에 있는 고무회사들은 앞다투어 신문에 광고를 실어 자금을 모았다. 국제 금융 투기 열풍으로 상하이의 고무 주식은 대환영을 받았다. 당시 ‘디방고무나무 회사’의 주식은 상하이 주식거래소에서 개장가가 주당 백은 25냥이었는데, 불과 1개월 만에 50여 냥까지 약 2배 상승했다. 상하이에 큰 재산을 소유한 현지인이나 화교, 외국인들이 큰돈을 벌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이들은 앞다투어 고무 주식을 매입했다. 일부 공관의 부인과 딸들은 보석이나 다이아반지를 팔아 주식을 샀다. 그러나 돈이 있어도 연줄이 닿아야 주식을 살 수 있었다.
  
이런 투기열풍으로 많은 사람이 벼락부자가 되자 투기 열기는 더욱 확대되어 주식의 실제 가격이 액면가의 몇 배, 혹은 수십 배로 뛰었다. 상하이 상무 총회가 발표한 고무 주식 보유현황을 보면, 80퍼센트는 중국인이, 20퍼센트는 상하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구매했다. 상하이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한 많은 중국인은 돈을 갖고 런던으로 가서 투기에 가담했다.
  
상하이 황푸로 1호의 서상중업공소(이후 ‘서상소’로 지칭한다)는 외국 자본으로 운영되는 중국 최초의 증권거래소로 1891년에 세워져 50년 넘게 영업했다. 서상소에서는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의 주식이 거래되었다. 1910년 6월 한 달 동안 서상소에는 30개의 고무 관련 주식이 상장했고, 그중 3분의 1이 영국 회사였다. 이번 상장으로 그들은 1,350만 냥을 쓸어갔다. 외국인 딜러 회사 외에도 많은 중국 기관이나 전장들이 딜러를 고용해 주식거래를 했다. 눈여겨볼 만한 점은 당시 서상소는 주식 분할 상장과 할부 등 다양한 금융혁신 아이디어를 선보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무회사의 주식이 한 달 사이 10여 배 상승하자 많은 신흥 귀족과 재력가들이 돈을 들고 대열에 가담하는 것을 물론 일반 직원이나 심지어는 가난한 대중조차도 모두 고무 주식에 투자하며 벼락부자를 꿈꿨다. 투자자들이 주식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겨를도 없이 주가는 계속 치솟아 상하이나 런던에서는 모두 주식을 사재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시 화상들은 상하이에서 약 3,000만 냥을 투자했고, 런던에서 약 1,000만 냥 이상 투자했다. 당시 청 정부의 연간 가처분소득은 1억 냥에 불과했다.
  
놀랍게도 일반인뿐만 아니라 ‘8대 전장’(정원, 조강, 겸여, 삼원, 원풍, 회대, 협풍, 진대)도 고무 투기 대열에 합류했다. ‘8대 전장’배후에는 ‘전장의 전장’이라 불리는 표호가 버티고 있었다. 당시 상하이에는 표호의 양대 산맥이 있었는데 하나는 닝보 매판 상인인 엄의빈이 운영하는 원풍윤표호이고, 다른 하나는 허베이 관료 상인인 이경초가 운영하는 의선원 표호였다.
  
전장이 고무 주식을 투기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투기꾼에게 돈을 빌려주고, 동시에 투기꾼이 이미 구매한 고무 주식을 담보로 새로운 융자를 받아 다시 주식을 사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전장이 직접 주식 투기를 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당시 정원 전장의 주인 전일경, 조강 전장의 주인 대가보, 겸여전장의 주인 육달생 세 사람이 총 600만 냥의 장표를 발행했다. 그중 140만 냥에 해당하는 359장은 선물 장표로 외국은행 수중으로 들어갔다. 진일경과 대가보는 또 씨티은행, 화비은행, 이와양행에서 100만 냥의 거액을 빌려 3곳 전장에 분산해 놓고 고무 주식 거래를 했다.
  
1910년, 세계 경제가 급변하자 런던 주식시장의 주식이 폭락하고 멀리 상하이에 있는 고무 버블이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많은 회사가 연기처럼 사라졌고, 많은 투자자와 기업가의 자산이 증발했으며, 주식시장은 유동성을 잃고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수많은 전장과 표호가 소용돌이에 휘말려 연쇄적으로 도산했다. 3대 전장 중 진일경은 200여만 냥의 손실을 보았고, 대가보와 육달생은 각각 180여만 냥과 120여만 냥의 손해를 보았다. 그 밖에도 5개 전장과 2대 표호도 계속해서 그 파급력에 시달렸다. 7월 21일, 정원전장과 겸여전장이 도산했고, 22일에는 조강전장과 삼원전장이, 23일에는 원풍 전장이 망했다. 24일에는 회대전장과 협풍전장 그리고 진대전장이 도산했다. 청나라 금융재정을 지탱하던 전장과 표호는 큰 타격을 입었고, 그와 관련된 관료 매판자본과 상업자본, 민간자금도 모두 잠식당했다. 금융기관끼리 서로 대출해 준 것이 화를 더욱 키운 결과를 불러왔다. 외국계 은행도 중국 금융기관에 제공하던 콜머니를 중단하고 상환을 요구해 중국 신흥 산업과 대중은 도탄에 빠져 외국자본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그러자 상하이 도대를 맡고 있던 채내황과 양강총독 그리고 장쑤 순무가 조정에 상소를 올려 선통 황제의 승인을 거쳐 외국계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고무 주식으로 인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8월 4일, 채내황은 HSBC 등 9개 외국계 은행과 ‘상하이시 대출 유지 계약’을 체결하고 350만 냥을 빌렸다. 동시에 그는 상하이 공금 300만 냥을 원풍윤과 의선원 그리고 그 산하의 장호에 예금해 시장 안정을 꾀했다. 덕분에 상하이는 안정을 되찾았다. 사실 원풍윤과 의선원은 정원 전장이 도산할 때 타격을 입어 원풍윤과 자매 전장인 덕원 전장도 200만 냥 정도 손실을 입었다. 또한 의선원에 의지하고 있던 원리 전장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이 두 전장은 자체 자본력과 채내황의 긴급 원조 덕분에 첫 번째 충격파를 가까스로 견뎌 상하이는 물론 전국의 금융질서를 유지해갔다.
  
모두가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진전되길 희망했지만 9월이 되자 청 정부는 경자 배상금을 상환해야 했다. 관례에 따라 상하이는 190만 냥을 부담해야 했다. 그러나 채내황이 공금으로 시장을 구제해 국고에는 돈이 없었다. 상하이 시황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 채내황은 대청은행에 200만 냥을 대신 지불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채내황과 사이가 좋지 않은 도지부 좌시랑 진방서는 채내황이 시장이 공황상태라는 핑계로 ‘조정을 위협’한다고 고발했다. 이에 조정은 채내황을 즉각 파직하고 그가 관리하던 자금을 2개월 내에 모두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채내황은 원풍윤과 의선원에게 공금을 달라고 독촉해 한 번에 200여만 냥을 인출했다. 10월 7일, 외국계 은행이 상하이 전장 21곳에서 발행한 장표를 받지 않겠다고 돌연 선포하자 원풍윤은 자금 회전이 안 돼 이튿날 청산을 선포했는데, 손실액이 2,000여만 냥에 달했다. 베이징, 광저우에 있는 17개 지점도 모두 도산했다. 원풍윤이 도산하며 상하이에 있던 큰 규모의 전장들도 문을 닫았고, 금융위기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이 고무 주식 버블의 두 번째 충격파였다. 
  
운풍윤이 도산하자 도지부는 대청은행에 긴급 유동성 자금 100만 냥을 상하이로 보내라고 전령을 보냈다. 12월 11일, 청 정부는 다시 시장 구제에 나섰다. 양강 총독 장인준이 HSBC, 동방회리, 덕화 3개 은행으로부터 연이율 7퍼센트에 6년 만기로 장쑤 염리를 담보로 300만 냥을 빌렸다.
  
의선원의 대주주인 이경초는 이홍장의 조카로, 당시 그는 우전부 좌시랑과 교통은행 총재를 역임하고 있었다. 그는 산업을 담보로 교통은행에서 287만 냥을 대출받아 공금 인출로 인한 공백을 메우며 의선원을 지켰다. 그러나 1911년 초 우전부 상서로 취임한 성선회는 위안스카이가 교통은행에 심어놓은 양사이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교통은행 장부를 감사하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이경초가 의선원이 교통은행에서 빌린 돈을 급히 상환하자 상하이 의선원 본점 장부에는 은이 7,000냥밖에 남지 않았다. 3월 20일, 의선원 본점 경리인 정유번은 자신이 보유한 기업의 주식으로 신임 상하이 도대 유연기에게 10만 냥을 대출받으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다음 날 의선원은 마침내 파산을 선고했고, 부채는 1,400만 냥이었다. 상하이를 유지하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며 상하이 금융산업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그 결과 전국 상공업 대공황이 이어지며 세 번째 고무 주식 충격파가 시작되었다.
  
마침내 장쑤성과 저장성 지역의 금융과 산업은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난징, 전장, 양저우, 쑤저우, 항저우, 닝보 등 6대 경제도시의 유명 전장 18개와 표호가 모두 붕괴되었다. 쑤저우를 제외한 상술한 5개 도시의 민족자본으로 운영하던 금융기관은 모두 망했다. 그 여파로 여러 도시의 민족자본 금융기관이 마비 혹은 파산에 이르렀다.
  
  
버블의 위기와 기회
  
전국적으로 확대된 고무 버블의 여파로 양무운동이 한창이던 동치중흥 이후 1903년부터 6년 연속 성장하던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갔다. 청 정부는 하는 수 없이 국제 차관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이 위기로 청 정부의 근간이 흔들렸고 재정위기는 더욱 악화됐다. 청 정부가 경제적인 압박으로 인해 결국 상인이 운영하던 철도를 회수하기로 결정하자 보로 운동이 촉발되었고, 이것이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서양의 ‘남해 버블’, ‘튤립 버블’, ‘폰지게임’ 사건이나 현재의 메도프 사건 혹은 중국의 각종 자금조달이나 투기 사건은 모두 자본시장의 내생적 현상이지 언론의 보도나 법률적인 판단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배운다는 온고지신은 끊임없이 성숙해지는 자본시장의 메커니즘이다. 이런 사건이 수차례 발생했고, 사건마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된다. 중국의 자본시장은 안팎으로 융자의 압력에 직면한 상황에서 지도자들이 만들어 낸 결과다. 더욱이 중국 각계각층의 투자자와 창업자들은 계속해서 창조의 결과에 참여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투자자나 감독관들이 자신의 지혜나 능력을 너무 과신해 과거 역사를 무시하거나 심지어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후세인들이 역사의 전철을 반복하는 가장 기본적인 잘못이다.
  
현대적 의미를 지닌 중국 최초의 금융위기를 살펴보면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첫째, 중국 만청 시기의 시장경제와 자본축적은 대부분 상하이에서 이루어졌으며, 외국의 금융기관과 중국의 전장이나 표호와의 관계는 악의적인 경쟁보다 협력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산업혁명이 확산되고 국제 자본시장과 연결되면서 상하이의 금융시장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융자 중심으로 부상했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발생한 금융위기가 상하이에서 시작된 것은 당연했다. 호설암 붕괴나 산서 표호 붕괴 같은 지역적인 위기들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는 파워가 약했다. 일찍이 유명세를 치른 상하이는 당시 아시아의 방직산업과 고무산업의 국제 자본 흐름을 주도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00년이 지난 지금도 국제금융 중심 자리를 놓고 고전하고 있다.
  
둘째, 자본시장이 발달하면서 신산업과 신상품이 버블을 형성하기는 했지만, 이 또한 매우 정상적인 현상이고 필요한 과정이다.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중국에서 모두 나타난 현상이고, 시장이 형성되는 시기에 시장의 구도를 주도했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남해 버블이 없었다면 현대 회사법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튤립 버블 사건이 없었다면 현대의 거래 메커니즘이나 감독 관리체계가 수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상하이 고무 버블이 없었다면 훗날 현대 금융기관이 전장이나 표호를 재조정하거나 10년 후 근대 상하이 금융시장의 초석을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 철도 버블(1910), 중동 석유 버블(1970), 글로벌 인터넷 버블(1990) 및 글로벌 파생상품 버블(2000) 이야기한 경제구조와 의식의 변혁을 체험할 수 있었다.
  
셋째, 어느 국가든지 산업이나 금융의 발전은 정치환경이나 국제 환경을 벗어날 수 없다. 중국은 특히 그러하다. 국제 자본 흐름은 중국에 현대경제를 수립하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글로벌 위기를 몰고 와 국민의 부를 앗아갔다. 자본시장이 수립되고 국제시장과 연계되면 안정된 메커니즘을 수립하고 완충지대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인위적인 장애를 만드는 구실이나 연계를 지연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참고 자료
  
‘세계 역사를 뒤흔든 금융이야기’, 왕웨이 지음, 2013, 평단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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