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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29. 2018

딸바보 아버지들의 예금

딸의 결혼을 대비한 아버지들의 예금
  
중세의 스위스 은행이라고 할 수 있는 카메라 델 프루멘토는 지위를 막론하고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려는 모든 이들을 매료시켰다. 사실 스위스 은행은 스위스인들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와 비슷한 형태의 은행이 이미 14세기 베네치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귀족들은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은행을 이용했다. 먼저, 1283년에 ‘카메라 델 프루멘토, Camera del frumento, 밀금고’라는 시스템이 만들어져 밀을 재배하지 못하는 지역에서 전략적으로 밀 판매를 관리했다. 그 성과는 매우 놀라웠다. 거의 주기적으로 발생하다시피 했던 기아의 고통으로부터 도시를 구했던 것이다. 효과가 입증된 그 시스템은 일찌감치 국가의 금고, 즉 ‘국가의 재정 협력자’가 되었다. 14세기 초부터 카메라 델 프루멘토는 예금을 받아주고, 돈을 안전하게 지키며 이자를 쳐주는 은행으로 변모했다. 지금의 정기예금과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었기에 금리는 높은 편이었다. 대신 예금액을 되찾아가려면 6개월 전에 미리 예고해야 했다. 
  
귀족들, 군주들만 카메라 델 프루멘토를 찾았던 것은 아니다. 결혼을 앞둔 딸이 있는 아버지들도 주요 고객이었는데, 결혼 지참금은 예금액에서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 시대 아버지들에게 딸의 혼사는 적지 않은 고민거리였다. 적당한 남편을 찾는 것도 문제였지만(딸이 스스로 제짝을 찾는 드문 경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돈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베네치아의 젊은 여성들은 결혼하거나 수녀가 되는 두 개의 갈림길에 섰다. 보통 딸 하나는 문제없이 결혼시킬 수 있었으나, 차녀들은 어쩔 수 없이 수녀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결혼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었기에, 베네치아의 수녀원은 특히 육체의 죄를 저지르고 속죄하는 죄인들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여하튼 지참금은 3~4퍼센트의 이자가 붙는 일반 예금보다 더 높은 연간 5퍼센트의 이자가 적용되었다.
  
피렌체의 아버지들도 딸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는 일로 동분서주했다. 1세기가 지난 1425년 피렌체에서는 지참금 은행인 몬테 델레 도티(Monte delle doti)가 만들어졌다. 몬테 델레 판출레(Monte delle fanciulle, 처녀들의 은행)라고도 불렸다. 그런데 사실 피렌체 정부의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밀라노와의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긴급하게 조달해야 했기에 시민들의 예금액이 절실했던 것이다. 초기의 불안정한 시기를 거치고 15세기 중반, 몬테 델레 도티는 정부의 공공 재정을 조달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가 되었다. 1433년에 후한 이자를 보장하면서 5년, 7년 6개월, 11년이나 15년 동안 예금액을 묶어두는 방식으로 운영 방식을 개편하면서 시민들의 호응은 더욱 뜨거워졌다. 7년 6개월의 정기예금일 경우 연간 이자가 20.96퍼센트에 달했다. 그 기간을 채우면 원금과 이자를 더한 총액이 지참금이 되었다. 지참금 은행에 100피오리노를 예금하면, 15년 뒤에 예비 신부의 결혼이 성사될 경우 500피오리노의 지참금을 받을 수 있었다. 만약 딸이 사망하면 지참금은 아버지에게 돌아갔고, 딸이 수녀가 되면 수녀원 입회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만약 아버지마저 사망하면 그 재산은 아들에게 돌아갔다. 아버지도 남자 형제도 없다면 정부의 재산이 되었다. 당시의 여성은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어떠한 권한도 누리지 못했다. 지참금 은행은 개편된 운영 방식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단 두 달 만에, 즉 1433년 5월과 6월 사이에 거의 7만 피오리노에 달하는 879건의 예금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현존하는 자료들을 통해 그 은행이 문을 닫은 1545년까지 120년 동안 3만 2,000건의 예금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몬테 델레 도티는 피렌체인들이 딸의 지참금으로 쓰일 자금을 지키는 주요 수단이었다. 이 은행을 통해 많은 미혼 여성들이 결혼 자금을 마련했지만, 모두가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예금액의 3분의 2는 카포니, 메디치, 파치, 스트로치 등 피렌체의 저명한 가문들이 차지했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안젤로 카를레티 다 키바소는 지참금 은행이 지배 계급의 특권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주었다. 제노바에 몬테 디 피에타를 창설했던 그는 1495년에 “지참금이 없는 상인의 불쌍한 딸들은 결혼하지 못하고 죄악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것”이라며 안타까웠했다. 상인들도 딸의 지참금을 준비할 수 있는 제도나 체계가 필요했다.
  
초기 20년 동안은 최소 2피오리노에서 최대 583피오리노가 예금되었고, 평균 예금액은 71피오리노였다. 77.7퍼센트의 여성이 결혼을 했고(평균 나이 18.3세), 19.5퍼센트는 사망했으며, 2.6퍼센트는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 여성은 결혼식을 올리고 신방에 들었으나 신체적인 기형으로 인해 결혼이 완료되지 못했다. 따라서 국가에서 그녀의 지참금을 몰수했다. 당시 가문과 가문 사이의 정략결혼에는 거액의 지참금이 필요했고, 몬테 델레 도티는 사회 풍습과 가족 관계를 금융적인 관점에서 적절하게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딸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시대를 불문하고 굉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 자료
  
‘돈의발명’,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 책세상
  
  
길건우 자산관리사(rlfrjsd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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