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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29. 2018

복식부기의 탄생

복식부기의 탄생
  

회계사에게 중세 시대는 힘든 시대였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든 것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숫자를 포함해서 말이다. 로마숫자를 사용할지, 아라비아숫자를 사용할지도 결정해야 했다. 오늘날 숫자 영(0)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0’ 없이도 매우 잘 해냈다. 로마인들은 ‘0’을 알지 못했고, 중세의 상인들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수투스 시대의 선조들이 사용했던 체계로 계산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방식에 대해 추측만 할 뿐이다. 고대 로마인들이 어떻게 곱셈과 나눗셈을 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아마 덧셈과 뺄셈은 어렵지 않게 해냈을 것이다.
  
그러다 피보나치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자노 비골로가 1202년에 <주판 책, Liberabaci>을 출간하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드디어 유럽에 아라비아 수 체계가 소개되었고, 유럽인들은 숫자 ‘0’의 놀라움을 알게 되었다. 상인들에게 숫자는 업무 도구였지만, 레오나르도는 숫자 자체에 매료되었다. 그의 아버지 굴리엘모는 알제리 북동부에 있는 도시 베자이아의 항구에서 피사공화국의 세관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곳에서 레오나르도는 인도에서 만들어진 아라비아숫자를 배웠다. 영특한 레오나르도는 새로운 숫자에 흥미를 느끼고 깊이 공부했다. 그는 앞의 두 수의 합이 바로 뒤의 수가 되는 그 유명한 ‘피보나치수열, Fibonacci sequence'(0,1,1,2,3,5,8,13,21,34,55,89........)을 완성했으며, 더 나아가 이 수열에서 앞의 수로 뒤의 수를 나누어가면 황금비(1.61803.....)에 이른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 당시 ’신성한 비율, divina proportione'이라고 불렀던 개념이다. 황금비로 만들어진 사각형 내부에 원호를 그려 이어나가면 달팽이 껍데기처럼 무한히 회전하는 아름다운 나선형 곡선이 만들어진다. 피보나치수열과 황금비, 그 속에서 발견되는 신비스러운 현상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신비주의자와 심령 술사, 마술사, UFO 연구가들의 환상을 자극했다. 하지만 우리는 신비로운 부분은 내려놓고,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바로 상인들의 회계장부다.
 

황금비로 만들어진 나선형 곡선

   
‘0’이 소개되자 모두가 두 팔 벌려 환영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것에 거부감을 표했다. 우리가 보기에 로마숫자보다 더 간편한 아라비아숫자는 당시에는 회계사들에게조차 호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교회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는 고결한 라틴어에서 유래한 로마숫자가 더 고상하다고 여겼다. 그와 달리 아라비아숫자는 천박한 이교도의 문자였다. 상인들은 로마숫자가 아라비아숫자보다 위조하기가 더 어렵다는 점에서 더 낫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로마숫자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부 학자는 품위 있어 보이려는 심리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쉽게 말해, 로마숫자는 귀족이었고, 아라비아숫자는 평민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현재에도 남아 있는데, 우리는 근엄하고 기품 있는 인상을 주기 위해 서수를 쓸 때 로마숫자로 표기한다. 특히 왕과 교황의 이름은 아라비아숫자가 아니라 로마숫자로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하튼 중세의 상인들은 아라비아숫자를 쓰면 더 편리하게 계산할 수 있었음에도, 로마숫자로 채운 권위 있고 고명한 장부를 고수했다.
  
1280년 피렌체의 아르테 델 캄비오는 아라비아숫자를 공식적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메디치 은행은 1500년까지 로마숫자를 사용했으며, 1514년까지 로마숫자로 적은 산술책이 출판되었다. 여기까지는 이탈리아의 이야기이다. 다른 곳의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1520년 독일의 도시 프라이부르크에서는 로마숫자로 표기되지 않은 회계장부를 증빙 자료로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스코틀랜드에는 17세기가 될 때까지 아라비아숫자가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오랜 천대를 받았던 아라비아숫자를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로마숫자로 표기하면 계산을 조작하기가 어려웠을지 모르나, 그만큼 실수투성이였다. 메디치 은행의 지점장은 본사에 보낸 편지에 “하느님,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우리를 지켜주소서!”라는 애타는 마음을 담기도 했다. 중세의 회계사들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계산을 여러 번 다시 하는 역경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다 차변 합계와 대변 합계가 반듯이 일치하는, 그래서 계산이 틀릴 경우 바로 알아볼 수 있는 형식의 계정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회계의 기본으로 활용되는 복식부기다. 이 같은 회계 방식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는데, 독일의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복식부기가 경영학과 경제학에서 가지는 중요성은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에서 가지는 중요성에 견줄 수 있다..”
  
회계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도 같은 복식부기가 탄생한 도시는 어디일까? 이탈리아의 무역도시들은 이를 두고 수십 년간 다투고 있다. 제노바 사람들은 제노바에서 탄생했다고 하고, 피렌체 사람들은 피렌체에서 제일 먼저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복식부기로 작성한 회계 법을 ‘베네치아 방식’이라고 불었다는 사실에 힘을 실으며 당연히 베네치아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결론을 내리자면, 은행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근대 회계 역시 금융계의 황금 삼각 지대에서, 다시 말해 제노바, 피렌체, 베네치아의 불특정한 지역에서 탄생했고, 그곳에서 발전되었다.
  
중세의 회계에서 복식부기가 얼마나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게 밝혀내기 어렵다. 남아 있는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아라비아숫자의 사용과 복식부기를 연관 짓지만, 이 또한 확실하지는 않다. 로마숫자로 복식부기를 작성한 장부가 여럿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복식부기와 로마숫자를 사용한 가장 오래된 문서는 1340년 제노바 정부의 회계 문서로 알려져 있다. 물론 복식부기는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사용됐을 것을 짐작된다. 1339년 제노바에서 시몬 보카네그라를 총독으로 세우는 민중의 폭동이 일어나서 제노바의 문서 보관소가 소실되었다. 주세페 베르디는 이 사건을 풍자한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를 만들어 5세기 뒤에 제노바의 적국 베네치아의 극장에서 초연하기도 했다. 여하튼 우리는 1340년 이전에 어떠한 문서들이 제노바에서 보관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한편 1355년 시에나 정부의 회계 문서도 복식부기로 작성되었다. 이 문서 또한 그전부터 시에나에서 복식부기가 사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15세기 이전에 쓰인 베네치아의 회계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장부를 어떻게 작성했는지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분명히 어느 도시보다도 복식부기 회계가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발전된 곳이다.
  
복식부기의 흔적을 드러내는 오래된 회계장부의 파편과 낱장들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볼로냐에서 1211년 피렌체 은행가들의 장부 일부, 1292년 페루치 은행의 문서, 1297부터 1303년까지 샹파뉴 정기시에서 토스카나 상인 라니에리 피니가 작성한 회계장부가 발견되었고, 루카에서 1332년 만니상사와 부를라마키상사의 미완성 장부, 피사에서 14세기의 회계장부들도 발견되었다.
  
중세 시대의 회계장부에 등장한 복식부기는 먼저 이탈리아를 거친 후 유럽으로 거침없이 퍼져나갔다. 이를 널리 확산하는 데 이바지한 인물은 이탈리아의 수학자 루카 파촐리(Luca Pacioli)다. 그는 1494년에 베네치아에서 출간한 <산술, 기하학, 비례와 비례적인 것에 관한 대전>을 통해 이 회계 법을 유포했다.(이하 <산술 대전>) 그렇다면 파촐리의 책이 나오기 전에는 어떻게 복식부기가 알려졌을까? 복식부기는 회계장부의 확산과 더불어 자리를 잡았다. ‘원장, Libro mastro'이라 불린 회계장부는 당시 양피지에 기록되었는데, 재료비가 많이 들었다. 계산에 밝은 상인들은 당연히 양피지를 절약할 방법을 찾았다. 상인들은 양피지의 표면을 긁어내어 글자를 깨끗하게 지운 다음 여러 번 재사용했다. 그러다 종이가 개발되면서(이탈리아의 제지 공장은 13세기 말경 마르케 주의 도시 파브리아노에서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상황이 나아졌다. 이전보다 적은 비용으로 장부를 사들일 수 있었기에, 15세기부터 회계장부가 더욱 널리 사용되었다.
 

야코포 데 바르바리, 루카 파치올리(Luca Pacioli)의 초상, 1495년

  
  
라구사 공화국의 외교관이자 경제학자인 베네데토 코트룰리에는 동료 상인들에게 선박이 난파되어 전 재산을 잃는 것보다 소액의 보험료를 내는 편이 낫다고 충고했다. 그리고 복식부기에도 관심을 두었다. 그는 상인이라면 장부를 일목요연하게 기재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상인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고 했다. 또한 장부를 적을 때 “종이의 첫 장에는 A라고 표기해야 한다"라고 했는데, 이는 마주하는 페이지의 양쪽에 주고받은 명세를 기재하는 베네치아식 기록 법을 의미한다. 한편 베네치아의 마르차나 국립 도서관에 보관된 코트룰리의 필사본에는 “복식부기에 대한 암시가 확실함!”이라는 수기 메모가 남아 있다. 책을 읽은 누군가가 회계의 역사상 중요한 뿌리를 발견했다는 감격에 겨워 의기양양하게 메모를 남겼을 것이다. 출판의 역사를 증언하는 소중한 자료를 훼손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말이다. 코트룰리의 저서의 인쇄본은 1494년에 파출리의 책이 나오고 나서 70년이 훨씬 지난 1573년에 출판되었다. 하지만 파촐리의 책보다 적어도 36년은 앞선 1458년부터 필사본 형태로 유통되었는데, 1573년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코트룰리의 인쇄본은 피렌체에서 발견된 1484년의 필사본과는 매우 다르다. 편집자 프란체스코 파트리치(Francesco Patrizi, 크로아티아에 있는 츠레스 섬 출신으로 복식부기는 동쪽 아드리아 해에 많은 신세를 졌다)는 실제로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쓰다시피 했고, 이따금 틀리게 옮기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그 당시 회계는 전문적인 업종으로 자리를 잡은 때였기에, 편집자가 복식부기에 관한 내용을 추가한 것 아니냐고 의심할 수도 있지만, 코트룰리는 이 은혜로운 회계 법을 잘 알고 있었다. 필사본에서 그에 관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라구사공화국에서 복식부기로 작성된 상인 니콜로와 루카 카보가의 장부(1417년)와 조폐국의 회계장부(1442년)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복식부기는 그에게 낯설지 않은 방식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코트룰 리가 역사에 눈부신 업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복식부기의 발명자도 이론가도 아니었다. 반면 루카 파촐리와 그의 저서 <산술 대전>이 아니었다면 새로운 부기법이 그처럼 빠르게 보급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참고 자료
  
‘돈의 발명’,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 책세상
  
  
길건우 자산관리사(

rlfrjsd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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