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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29. 2018

메디치은행

신과 이윤의 이름으로, 메디치 은행
  
  
  
피렌체의 여러 은행 중에서 메치디 가문의 은행은 단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금융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피렌체를 통치한 가문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를 꽃피운 피렌체에서 큰 공로를 세웠다. 메디치 은행의 전성기를 이끌기도 했던 코지모 데 메디치(Cosimo di Giovanni de' Medici)는 철학가, 건축가, 화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도시의 예술 활동과 공공사업을 후원했다. 그의 손자 로렌초(Lorenzo)는 은행가로서는 가문의 은행을 파산 직전으로 끌고 간 최악의 인물이라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력과 예술적 열정을 골고루 갖춘 뛰어난 인물로 ‘일 마니피코(il Magnifico), 위대한 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메디치 은행의 97년 역사는 “고리 대금업과 예술이 꽃을 피운 시기”와 맞물렸다.
 

코지모 데 메디치(Cosimo di Giovanni de' Medici)


금융업의 측면에서 메디치 가문이 이룬 성과는 미비하지만, “본사와 지점의 관계에서 오늘날의 지주회사의 초기 형태”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바르디 은행과 페루치 은행을 총체적 파국으로 이끌었던 구조를 방지하기”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유한책임이라는 개념이 아직 없었고, 모든 지점이 독립적으로 수익과 손실에 대한 책임을 지는 구조를 취했다. “본사의 무한한 책임 부담을 덜고 회사의 이익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은 지점을 폐쇄하고 그 자리에 다른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따금 메디치 가문은 그들을 둘러싼 정치적·경제적인 사건들에 휘말려 통제력을 잃기도 했지만, 금융의 역사가 “순풍에 돛을 단 듯 나아가게 한 주역이었다.” 그들은 역사에서 의미 있는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메디치 가문의 은행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가문의 일원으로서 운명적인 이름의 비에리 디 캄비오(Vieri di Cambio, 이탈리아어로 Cambiosms 교환을 뜻한다)는 1370년경 로마와 베네치아에 지점을 두고 자다르에 연락소를 갖춘 선도적인 피렌체 은행가 중의 한 명이었다. 그의 먼 친척 조반니 디 비치(Giovanni di Bicci)는 로마 지점에서 일하다가 1385년에 지점장이 되었다. 비에리가 사망했을 때 기업이 분배되었는데, 조반니 디 비치는 로마 지점(부채를 포함하여)을 물려받았다.
  
1397년 10월 1일 조반니 디 비치는 피렌체에서 은행을 열었다. 메디치 은행이 탄생한 것이다. 그에게는 두 동업자가 있었는데, 한 명은 50년 전에 파산한 은행 가문의 일원인 베네데토 디 리파초 바르디였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젠틸레 디 발다사레 보니였는데, 그는 몇 달 뒤 자신의 자본금을 돌려받고 사업에서 물러났다. 이는 비틀즈가 성공하기 전에 밴드에서 탈퇴한 드러머 피트 베스트의 경우와 같은 큰 실수였다고 할 수 있다. 
 

피렌체의 메디치 은행

   
메디치 은행의 본점은 전성기에도 로마 지점의 업무량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메디치 은행의 선조가 고향 피렌체로 돌아갔던 이유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로마는 자본의 출처였고, 피렌체는 유럽 은행의 중심지로서 좋은 투자 기회를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조반니 디 비치는 피렌체의 금융시장에서 활동하며 로마 지점의 잉여 자본을 활용하려고 했다.” 메디치 가문은 교황청의 막대한 재정을 관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로마에 사는 고위 성직자들의 재정 관리권도 얻으려고 했다.
  
메디치 은행에 관한 자료는 풍부하다. 피렌체 본점과 각 지점의 회계장부가 대부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점의 비밀 장부 세 권도 공개되었다. 비밀 장부는 1397년 10월 1일부터 1451년 3월 24일까지의 기록으로, 은행의 창립부터 전성기의 대부분이 포함돼있다. 코지모 데 메디치는 1429년에 은행의 지휘권을 잡았다. 그가 사망한 1464년부터 은행은 몰락의 길로 향했지만, 사실 그전에 이미 1455년부터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의 역동적인 사회에서 제자리걸음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지점에서 하나씩 가지고 있던 장부는 “종이가 아니라 양피지 위에 기록된 것으로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장부에는 “베네치아 양식에 따라 복식부기로 양쪽에 나란히 부채와 채권이 기록돼 있다.” 그리고 로마숫자로 표기되었는데, 아라비아숫자보다 위조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복식부기가 널리 활용되면서 아라비아숫자가 로마숫자를 대신하게 되었다. “신과 이윤의 이름으로”라는 표제가 붙은 비밀 장부에는 갖가지 회계 기록 이외에도 직원들의 이름과 사적인 내용도 적혀 있다. 예를 들어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가 조반니 디 비치의 관용과 박애 정신을 칭송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은행의 창시자 조반니 디 비치가 금융의 혼탁한 물에서 다시 만난 옛 동료들을 기꺼이 도왔기 때문이다.
  
조반니와 그 뒤를 이은 코지모는 관리자의 운영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메디치 은행을 직원 65명과 지사 7개를 갖춘 당대의 주요 은행(비교하자면, 한 세기 전 바르디 은행보다 조금 더 작았던 페루치 은행은 직원 90명과 지점 15개를 두었다)으로 발전시켰다. 본점과 지점 간의 거리가 아주 멀었기에 당시의 의사소통은 매우 느렸다. “피렌체 본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브루게까지는 60일, 베네치아까지는 10일, 아비뇽까지는 30일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바르셀로나까지는 60일이 걸렸고 런던에 도착하려면 무려 90일, 즉 석 달이 걸렸다.”
  
따라서 지점의 대표들은 충분한 자치권을 가지고 각 지점을 운영했다. 지점장들은 본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했다. 메디치 가문은 지점장에게 일정한 봉급을 주는 대신 성과를 기준으로 보수를 차등 지급하여 수익을 높이려 했다. “엄격한 주인 코지모는 지점장들과 수익을 배분하는 자리에서는 관대했다. 근무 성적이 좋은 사람은 얼마든지 좋은 계약 조건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활동적이고 진취적인 직원들은 주주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소주주들은 물론 해고될 수는 없었지만, 파면될 수는 있었다. 메디치 가문은 언제나 동업 계약을 파기할 권한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매우 드문 경우에만 사용되는 극단적인 방책이었다. 한편 지점장들은 의무적으로 엄격한 윤리적 규율을 지켜야 했다. 도박이 금지되었고 여자를 멀리해야 했으며 비싼 선물을 받아서도 안 되었다.
  
어쨌든 조반니 디 비치와 코지모는 영리한 구두쇠였다. 그들은 지점장들에게 제한적으로 신중하게 제공한 예외적 혜택을 제외하고는 직원들에게 제한적으로 신중하게 제공한 예외적 혜택을 제외하고는 직원들에게 많은 돈을 지급하지 않았다. 경쟁 관계에 있던 은행들과 비슷한 선에서 보수를 지급했다. “급여 인상과 진급은 대부분 개인적인 성과에 좌우되었다. (···) 하지만 친족들은 그들의 몫을 챙겼다. 초기에는 주로 메디치 가문과 바르디 가문의 일원들을 직원으로 채용했다. 특히 코지모는 바르디 가문의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금융계의 신구 명문가의 상징적 결합을 이루었다.
  
은행을 운영한 덕분에 메디치 가문은 아주 큰 부자가 되었다. 조반니 디 비치는 아내의 결혼 지참금 1,500 피오리노를 투자하여 로마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 이후 피렌체로 돌아와 은행을 설립했을 때에는 초기 투자금의 세 배가 넘는 5,500피오리 노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23년 뒤 그가 은퇴할 무렵에 메디치 은행은 15만 2,820피오리노의 총수익을 올렸다. 그중 그의 몫은 4분의 3, 즉 11만 4,615피오리노였는데, 그렇다면 1년에 4,983피오리노가 그에게 돌아간 셈이다. 그 당시 웅장한 저택을 지으려면 1,000피오리노로 충분했다. 그러므로 조반니는 그 돈으로 총 115채의 저택을 짓거나 23년간 매년 5채의 저택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분명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코지모 데 메디치는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지휘 아래 메디치 은행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 금융기관이 되었다.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피렌체에만 머물지 않았다. 교황 피우스 2세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모든 통치자와 군주들이 그의 조언을 필요로 했다”고 한다. 메디치 가문의 수장은 혼자서 마차를 끌지는 않았다. 그는 효율적으로 전체를 통제하려면 협력과 대리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마차의 지휘봉을 견고하게 잡고, 운영권은 부하들에게 위임했다. 즉, 규율을 정해 지침을 내린 다음 제대로 이행되는지 주의 깊게 살폈다. 권한을 남용하거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지점장에게는 아주 엄격하게 대했다. 브루게의 지점장 안젤로 타니가 롬바르디아인들과 거래하는 과정에서 규정을 어기고 손실을 봤을 때, 코지모는 지점을 닫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결국 그 아주 극단적인 조치를 이행했다.
  
완고하고 비타협적인 메디치가의 수장에게는 관대한 면도 있었다. 피렌체 본점의 대표 폴코 포르티나리가 어린 자식들을 남긴 채 1431년에 죽자, 코지모는 고아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 양육했다. 하지만 코지모의 선행은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낳았는데, 포르티나리의 두 형제가 은행 파산의 중대한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메디치 은행의 전성기는 조반니 디 아메리고 벤치(Giovanni di Amerigo Benci)가 은행의 관리자로 있었던 20년간(1435~1455)이다. 세 번 째 비밀 장부는 그의 손으로 쓰였다. 조반니 벤치의 개인적 삶은 중세 시대 이탈리아 상인들의 보편적인 삶과 다르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 상인들은 오랜 기간 외국에서 거주하더라도 외국 여성이나 다른 도시의 이탈리아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아내와 소는 고향에서 찾아라’라는 속담이 우연히 생겨난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하녀나 노예, 혹은 그 지역의 젊은 여자들과의 부정한 관계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수도사들의 설교가 그러한 실상을 간접적으로 증언한다 (···) 교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은 퇴폐적인 풍습에 너그러웠고, 경력상 오점으로 문제 삼지도 않았다. 종종 사생아들은 적자들과 한집에서 양육되었다.” 노예 소녀와의 사이에서 어린 카를로를 가졌던 코지모가 그랬듯이, 상인들은 부정하게 낳은 자식을 적자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길렀다.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벤치를 부자로 만들었다. 그는 평범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사후에 여러 저택과 토지, 막대한 현금과 채권을 남겼다. 그는 피렌체에서 자신의 고용주 코지모 데 메디치 다음으로 많은 세금을 냈다. 벤치는 은행의 규모를 확장하고 최대의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고용주의 기대에 보답했다. 설립 이후 5년까지 메디치 은행의 직원은 17명에 불과했다. 피렌체 본점에 5명, 로마와 베네치아에 각각 4명, 나폴리와 가에타 지점 두 곳 합쳐서 4명이었다.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1429년 2월에 사망했는데, 현직에 있을 때 그의 장남이자 아들 중 가장 유능했던 코지모에게 권력을 양도하면서 후계자를 준비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1441년, 메디치 은행은 하나의 큰 조직체에 여러회사가 결합된 홀딩 컴퍼니(holding company, 지주회사) 구조를 띠게 되었다. 피렌체의 타볼라 은행, 로마와 베네치아의 지점들, 안코나와 브루게, 제네바의 합자회사들이 결합했고, 몇 년 뒤에는 피사와 런던, 아비뇽, 지점이 신설됐으며, 끝으로 1452년에는 밀라노 지점이 문을 열었다. 주주가 지점장이 되었던 페루치 은행과는 달리, 메디치 은행은 직원들 사이에서 지점장을 선출했고, 그 이후에 주주의 자격을 부여했다.
  
모든 지점은 명칭과 자본금, 회계장부와 운영에 독자적 권한을 가진 법인이었다. “각 지점은 다른 지점을 아무 관련 없는 고객처럼 대했으며, 급여와 수수료를 책정할 때에도 서로 완전히 다른 기업처럼 나름의 체계를 따랐다.” 하지만 권력의 집중화현상은 바르디와 페루치 은행보다 메디치 은행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가령 코지모는 자신의 활동을 보고하는 일이 없었고, 업무에 관해 주주들에게 일일이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1455년에 지주회사 체제를 중단하는 것으로 은행 구조가 바뀌었다. 메디치 은행은 모회사의 기능을 없애고 규모를 대폭 축소했다. 메디치 은행은 단기간에 쇠퇴하지 않았다. 콪비모가 사망(1464)하고 피렌체에서 메디치가가 추방(1494)되기까지 30년에 걸쳐 서서히 몰락했다. “은행은 사실상 파산한 상태였다. 그때까지 영업하던 몇 안 되는 지점(리옹, 로마와 나폴리)은 총체적인 어려움에 맞서며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코지모의 후계자들은 경영 능력과 의욕이 없었고 그 주위의 협력자들도 유능하지 못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위대한 정치가로 인정받았지만, 사업 능력은 부족했다. 따라서 이후 막강한 힘을 갖게 되는 관리인 프란체스코 사세티에게 의존해 은행을 경영했다. 하지만 사세티는 그저 평범한 인물이었을 뿐이다. 그는 다수를 만족시키려 하며 어려운 결정들은 회피했는데, 이는 은행 파산을 앞당긴 지름길이었다.
  
메디치 은행의 종말과 함께 토스카나인들의 위대한 무대도 막을 내렸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탈리아 은행가들은 카탈루냐, 특히 바로셀로나의 은행가들과 더불어 중세 금융계를 지배한 세력이었다. 하지만 15세기 말에 독일 남부의 은행가들이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으며, 이들이 다음 세기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많은 은행가들이 활약했다. 푸거 가문은 합스부르크 왕가, 특히 카를 5세와의 깊은 유대 관계를 통해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탈리아에서 금융업은 완전히 변화했다. 개인은행 대신 공공은행이 들어선 것이다. 1401년 바르셀로나의 타울라 데 캄비스에 이어, 1407년 제노바의 카자 디 산 조르조은행이 탄생했으며, 1587년 베네치아의 피아자 디 리알토은행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후 공공은행이 계속 생겨났는데,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추세를 보였다.
  
메디치 가문은 그 나름대로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경제권르 포기했다. 군주의 직업으로 은행가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금융계의 계략보다는 로마 궁정의 음모에 더 관심을 기울렸다. 교황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는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으며, 피렌체인 필리포 스트로치가 그들의 재정을 담당했다. 또한 혼인을 통해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는데, 카테리나 데 메디치(Caterina de Medici)와 마리아 데 메디치(Maria de Medici)는 모두 프랑스의 여왕이 되었다. 교황 레오 10세, 즉 조반니 데 메디치가 1521년 12월 1일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같은 해 1월에는 마르틴 루터가 파문을 당했다) 그의 장례식은 피렌체 은행가들까지 가세하여 중대하게 치러졌다. 그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피렌체의 카포니 저택에 보관되어 있다. 저택의 방 하나가 카포니 가문의 문서 보관실로 남아있는데, 이곳에서 이 가문의 자손 니콜로 카포니가 <교황 레오 10세의 장례 비용에 관한 문서>라는 제목의 서류 뭉치를 발견했다. 서거한 교황에게 걸맞은 장례식을 치러주기 위해 타데오 가디와 로도비코 카포니를 비롯해 필리포스트로치와 조반 프란체스코 마르텔리의 후계자들이 협력했다.
 

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의 초상, 라파엘로

   
그들은 3만 스쿠도를 들여 장례위원회를 구성했다. 그 당시 보병들의 월급이 2스쿠도였다는 사실을 참작하면, 이는 두 달 동안 7,000~8,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메디치가 출신 교황의 장례식에는 전투를 방불케 하는 비용이 들었지만, 창과 검이 아니라 횃불과 초를 사들인 명세가 열거되어 있다. 특히 밀랍 초는 저가의 대체품이 개발되기 전이었으므로 아주 비쌌다. 이를 사기 위해 2,000스쿠도(병사 1,000명의 한 달 급여)가 지출되었다. 피렌체 은행가들은 교황이 패용하던 십자가를 받았다. 1522년 7월 26일 자 문서에는 조반 프란체스코 마르텔리의 후계자들과 로도비코 카포니가 1만 8,000스쿠도에 달하는 레오 10세의 십자가를 보관하다가 좀 더 안전한 장소인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의 금고에 맡겼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현재 그 십자가의 행방은 묘연한데, 그로부터 5년 뒤 로마를 약탈한 독일군이 파괴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하튼 교황 클레멘스 7세, 즉 줄리오 데 메디치(Giulio de Medici)는 빚을 떠맡아 고향의 은행가들과 함께 갚아나갔다.
  
은행에 관한 이야기에서 베네치아는 많이 언급되지 않았다. 세레니시마는 사업의 수도였으나 금융 부문에서는 정상을 차지하지 못했다. 산 자코모 디 리알토 성당 주위에 은행의 수는 10개 정도에 불과했다. 피렌체보다 여덟 배나 적은 숫자다. 하지만 금융의 세계에서 베네치아가 뒷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참고 자료
  
‘돈의 발명’,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 책세상, 2015
  
  
길건우 자산관리사(

rlfrjsd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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