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비용과 국영은행의 탄생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매우 좋아했을 것이다. 정부의 규제가 적었고 세금 부담도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전쟁 비용(특히나 돈이 많이 든다)을 마련할 때 자발적인 공채에 의지했다. 그러다 잦은 전쟁으로 서서히 부채가 축적되면 이를 해결하려는 방법으로 부채 통합을 시도했다. 은행은 점차 국채를 위해 개인의 저축을 운용하는 수단이 되었다. 중세의 국가들은 차츰 밀턴 프리드면과 시카고학파의 무의식적인 추종자에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정부의 시장 개입을 옹호하는 편에 서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국영은행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 은행은 어느 시점까지 민간은행을 대신했다. 제노바에서 국영은행은 국가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베네치아공화국과 제노바공화국은 수 세기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1298년 9월 제노바 함대와 베네치아 함대 사이에서 벌어진 코르출라 해전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베네치아 함대의 패배로 끝난 이 전쟁으로 인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마르코 폴로는 해전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되어 꽤 오랜 시간(아마도 가족들이 몸값을 치르러 오기를 기다리며) 제노바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감옥에서 피사 출신의 루스티켈로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피사인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감옥에 갇혀 있었다. 제노바와 피사가 해상권을 두고 격전을 벌였던 멜로리아 전투가 14년 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여하튼 마르코 폴로는 루스티켈로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고, 루스키텔로가 이를 듣고 기록하면서 <동방견문록>이라는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치렀던 다른 전쟁들을 이탈리아에 국영은행을 탄생시킨 공채 개혁의 원인이 되었다. 1407년 제노바에 설립된 ‘카자 디 산 조르조(Casa di San Giorgio)'는 1401년 바르셀로나의 ’타울라 데 캄비스‘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국영은행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채증권은 제노바에 있는데, 1214년 1월 22일에 발행된 것이다. 그 증권은 물리적으로 실재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회계장부에 기록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유효한 공채증권으로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소유자의 재량으로 묶어두거나 양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 세기 동안 활발한 상업 거래의 중심에 있었다.
제노바는 키오자 전투(1381년)에서 베네치아에 격파당하고, 이후 프랑스에 항복(1396년)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패전과 독립권 상실의 위기는 경제적인 파멸로 치달았고, 채무는 감당이 불가능할 만큼 쌓여 있었다. 제노바 정부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오래된 부채를 통합하고 일원화하는 방법을 택했고, 채권자들은 협회를 결성했다. 이렇게 해서 카자 디 산 조르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금융기관은 세금을 거둬들이고 세금이 얼마간 모이면 부채를 갚았는데, 채권의 비율에 따라 채권자들에게 세입을 분배했다. 이때 새로운 공채(앞서 말한 통합된 부채)는 이전에 설정된 채권의 효력을 합법적으로 이어받았다.
카자 디 산 조르조은행
카자 디 산 조르조는 빚더미에서 시작했지만, 이내 많은 자금을 운용하게 되었고, 단 일 년 만인 1408년에 은행을 설립했다. 이는 매우 탁월한 결정이었다. 제노바 사람들은 새로운 은행에 자진해서 돈을 예금했고, 1440년에는 두 개의 지점이 설립되었다. 카자 디 산 조르조는 영업의 성격과 자본의 크기, 문서화된 서류의 분량에서 최초의 근대 은행으로 여겨지며 중앙은행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5년 뒤에는 잠정 폐업을 하게 되는데, 정부의 시책에 따라 금과 은의 비율을 고정적으로 유지하는 것보다 모든 활동을 동결하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영업 재개는 1530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나폴레옹시대까지 쉬지 않고 운영되었으며, 1805년에야 완전히 영업을 종료했다.
카자 디 산 조르조는 국고와 은행이라는 서로 다른 두 활동을 병행하는 국가기관이었다. 산 조르조 은행은 8개에 달했고, 일상적인 예금 업무에서 채권 발행까지 복합적인 활동을 펼쳤으며, 자유로운 거래를 통한 금융시장의 활성화를 도모했다.
이 새로운 금융기관은 국가 안의 국가가 될 만큼 엄청난 위력을 지니게 되었다. 카자 디 산 조르조는 모든 면에서 동인도회사를 앞섰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르차나, 벤티밀리아, 피레베 디 테코, 코르시카 섬, 식민지 카파와 파마구스타 등 제노바공화국의 다양한 영토를 담보로 받았고, 그 영토들을 관리했다. 그런데 광범위한 영역을 관리하는 일은 그저 공물을 징수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카자 디 산 조르조는 1562년 상당한 세금을 국유화하는 큰 손실을 감수하면서 그 영토들에 대한 권리를 공화국에 반환했다.
정치철학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이와 같은 은행과 국가 간의 역할 교환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피렌체 역사> 제8권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제노바공화국과 식민지의 영토는 대부분 카자 디 산 조르조의 통치 아래에 있다. 카자 디 산 조르조는 그 영토들을 다스리고 방어하고, 매년 대중 투표를 통해 선출한 관리자를 파견한다. 따라서 어느 지역에서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그리고 “머지않아 카자 디 산 조르조가 그 모든 도시들을 담당하게 되면 베네치아보다 더 역사에 기억될 공화국이 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16세기 후반 카자 디 산 조르조는 취급 통화를 기준으로 지점들을 나누어 개설하면서 은행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1586년부터 은행권(중앙은행에서 발행하여 현금으로 쓰는 지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신용장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종이에 예탁금의 액수를 표기한 것으로, 보장하는 예탁금의 성격에 따라 금이나 은으로 지급되었다. 한편 제대로 기능을 갖춘 은행권은 네덜란드의 발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국가가 서로 주먹질을 하는 동안 피렌체도 잠자코 있지 않았다. 전쟁의 신 마르스는 철의 대가로 많은 금을 요구하는 뻔뻔한 신이다. 피렌체에서도 전쟁 비용을 충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민에게 의지하는 것이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내놓기도 했지만, 필요에 따라 강제성을 띠기도 했다. 그러다 공공부채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통합하고 정리하는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모든 미상환 채권은 1343년 12월 29일에 통과된 법안에 따라 병합되고 정리되어 한 권의 공채 원장에 기록되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는 채권의 양도가 설정되었고, 양수인에게 5퍼센트 이자를 지급한다는 법안이 발표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343년에서 1345년 사이에 피렌체에서 ‘몬테 코무네(Monte Comune)’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채권을 사고파는 것이 정당한 거래인가 하는 신학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프란체스코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으나 도미니크회와 아우구스티누스회의 관점은 그 반대였다. 신학자들의 열띤 논쟁은 뒤로 한 채 피렌체 시민들은 몬테 코무네에서 발행한 공채를 활발하게 거래했다.
몬테 코무네는 몇 년간 잘 유지되었으나, 공채가 급격하게 불어나자 이자 지급이 점점 힘들어졌다. 급기야 이자가 연체되자 채권 이자율이 거침없이 상승세를 타더니 1458년에는 20퍼센트에 달했다. 금융 정책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피렌체인들의 전쟁 야망은 끝이 없었다. 피렌체는 계속 전쟁을 벌였고, 특히 밀라노와의 전쟁에 몰두했다. 그런데 전시 공채로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자금을 마련하려면 세금을 더 거둬야 했다. 이 요구로 인행 지주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음에도 1427년에 소득세와 재산세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토지등기소가 설립되었다.
일단 토지대장을 작성하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세금이 매겨지는 재산의 총액은 개인의 진술에 따라 작성되었다. 납세자는 등기소의 공무원이나 세금 징수원에게 재산 총액을 제시했다. 상사나 기업의 주주도 재무 보고서를 제출했다. 마키아벨리는 이 역시 관심을 두고 지켜보았다. 그는 이 새로운 제도가 가난한 사람이 세금을 더 많이 냈던 이전의 불합리한 조치와는 달리 각자의 실질적인 역량에 바탕을 둔 체계라고 평가했다. 사실 이 제도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는 아니었다. 메디치, 스트로치 등 피렌체의 유명 가문들은 값비싼 예술품으로 가득한 건축물과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과세 대상에서 언제나 면제되었다. 그 대신 피렌체 시민의 3분의 1가량에 해당하는 빈민들도 세금을 낼 의무가 없었다. 그들은 사유재산 없이 봉급만으로 대가족을 부양했기 때문이다.
토지등기는 매우 뛰어난 정책이었고, 메디치 가문의 몰락 이후 1494년에는 그 정책을 대신하여 십일조 제도가 도입되었다. 18세기까지 피렌체의 과세 정책은 부동산 소유에 한해서만 적용되었다. 상업이나 제조업 부문 투자를 비롯해 몬테 코무네의 채권은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베네치아의 국영은행
베네치아에서는 제노바나 피렌체와는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다. 나중에 베네치아의 도제가 된 세바스티아노 치아니와 오리오 마스트로피에로는 1164년에 많은 액수의 돈을 국가에 빌려주었고, 이에 대한 대가로 11년 동안 리알토 시장의 세수입을 배당받았다. 이어서 베네치아 정부는 연이율 5퍼센트의 강제성을 띤 채권을 발행했는데, 임시지출이 있어서 채권을 발행하거나 상환 기간이 장기인 채권을 발행할 경우에는 8~10퍼센트의 이자율을 지급했다.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제노바는 궁여지책으로 카자 디 산 조르조를 설립해야 했지만, 전쟁에서 이긴 베네치아 또한 엄청나게 불어난 공공부채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베네치아공화국은 다른 길을 택했고, 큰 규모의 부채는 해결한 상태였다. 따라서 정부가 직접 국고를 지휘하고 운영하면서 세금을 걷어 부채를 갚아나갔다. 이렇게 해서 제노바가 그랬듯이 베네치아도 공채를 보유한 시민들의 권리를 지켜주었다. 베네치아의 공공 재정은 남다르게 매우 탄탄한 상태를 유지해나갔다. 16세기 초에 매년 100만 두카토가 정부의 금고로 들어왔는데, 이는 피렌체의 세 배, 나폴리와 밀라노의 두 배에 해당하는 수익이었다. 한 세기가 지나자 세수입은 네 배로 증가했으며, 영국인 여행가 토머스 코리엇은 영국 왕실이 거둬들이는 수익의 두 배가 넘는 그 어마어마한 총액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베네치아는 예금주들을 공황 상태에 빠뜨린 은행 파산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1569년에 베네치아 정부는 개인은행 신설을 금지했고, 영업 중인 은행에는 3년 이내에 청산 절차를 밟으라고 명령했다. 빠르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지만, 공공은행으로 향하는 여정은 이미 뚜렷했다. 그로부터 15년 뒤 1584년, 마지막 개인 은행인 피자니-티에폴로 은행이 파산을 선언했을 때, 베네치아 원로원은 국영은행 설립에 관해 논의했다. 베네치아에서 피자니-티에폴로 은행의 파산은 개인은행의 종말을 의미했다. 이후 원로원은 돈을 예금하려는 시민들을 위해 조폐국의 전용 금고를 개방했다. 이는 개인은행에서 국영은행으로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분명한 표식이다.
같은 해에 원로원 의원 토마조 콘타리니는 공공은행 신설에 관한 두 개의 보고서(각각 찬성과 반대 의견을 담았다)를 작성해 붉은색 토가를 입은 귀족들의 회합(대평의회 의원들은 검은색 토가를 둘렀다)에서 발표했다. 그의 견해는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는데, 이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닌 게, 당시 베네치아의 귀족들은 어릴 때부터 지배층이 되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카데미에서 외교와 정치 기술을 익혔고, 다양한 주제를 정해서 공개적인 찬반 토론을 벌였다.
콘타리니는 반대 의견에서 정부가 상업적인 사업에 매달리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강조했다. 공화국의 의무는 시민을 다스리고 국력을 키우기 위해 전쟁을 치르는 것이므로, 돈을 다루고 장사를 하는 일은 시민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그는 80년 전에 겪었던 극심한 공황 상태의 악몽을 떠올리면 국영은행의 설립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은행의 파산으로 인한 큰 혼란을 지켜봤습니다. 은행에 위기가 닥치자 불안과 불신의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한 사람이 예금액을 찾아가자 너도나도 달려가 돈을 빼냈습니다. 그 탓에 은행은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파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파장은 나라 전체를 불안과 혼돈 상태로 이끌었습니다. 따라서 시민이 마음 놓고 재산을 맡기고 모든 채권자가 안심할 수 있는 공공 기관이 필요합니다.”
베네치아의 국영은행 ‘피아치 디 리알토 은행(Banco della Piazza di Rialto'은 1587년에 문을 열었다. 이로써 그동안 은행의 부재로 빚어진 도시 내의 혼란과 불편이 종식될 수 있었다. 정부 기관이자 독점기업에 해당하는 국영은행의 총재는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피추천인 가운데 원로원에서 선출하여 3년의 임기로 파견되었다. 이러한 인사 방식은 국가가 금융 부문을 점유하거나 지나치게 개입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17세기 초 베네치아의 공공은행은 두 군데로 분리되어, 한 곳에서는 개인의 예금과 관련된 업무를 취급했고, 다른 한 곳에서는 정부의 재정을 관리했다. 그러는 동안 또 다른 공공 은행인 ‘지로 은행(Banco Giro)'이 문을 열었다. 그곳은 처음에는 곡류를 매입하는 일에 주력하다가 이후 은으로 품목을 바꾸었다. 그러다 다른 공공은행의 활동도 서서히 지로 은행으로 집중되어, 나중에는 지로 은행이 베네치아의 유일한 은행으로 자리 잡았다. 지로 은행은 국영은행의 전설로 기억될 만큼 전 유럽에서 명성을 떨쳤다. 이 베네치아 은행의 유명세는 그레이트브리튼 섬과 미국에도 전해져, 1694년 잉글랜드 은행 설립에 영향을 미쳤다.
Banco Giro
방코 지로 쿠폰(1798년 1월 10일)
잉글랜드 은행
베네치아 정부의 새로운 은행은 초기에 이전 은행의 기능을 완전히 수용하지 못했던 다소 미흡한 시기를 넘기자, 1797년 베네치아공화국이 몰락할 때까지 건실하게 존립하여 명예로운 역사를 남겼다. 180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탈리아왕국의 수도를 밀라노로 정하고 ‘몬테 나폴레오네(Monte Napoleone)'라고 불린 국영은행을 설립했다. 그러면서 베네치아의 지로 은행의 영업도 허용했다. 따라서 지로 은행은 베네치아의 몰락 이후에도 1811년까지 몇 년간 더 운영되었다.
분명히 이탈리아의 다른 곳에서도 다양한 공공은행이 문을 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에나에서는 몬테 데이 파스키 은행이 설립되어 마렘마의 목축업을 지탱하고 토스카나의 농업을 장려했다. 그리고 로마의 ‘산토 스피리토 은행’은 교황청 재정을 담당했고, 대규모 공공사업에 자금을 공급했다.
참고 자료
‘돈의 발명’,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 책세상, 2015
길건우 자산관리사(
rlfrjsd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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